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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History Diary 365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를 매일 기록하는 공간입니다. 🏛️ 매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여, 그날의 강렬했던 기억과 교과서 밖 생생한 역사적 순간들을 조명합니다. ⏳ 모든 글은 직접 탐구한 문헌과 서적 등 객관적인 사실(Fact)을 바탕으로 작성되며 📜,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는 깊이 있는 시선을 지향합니다. 문의나 제안, 혹은 궁금한 역사가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 📧 Email: historydesign00@gmail.com

2026년 5월 11일 월요일

🕊️ 5월 13일: 파티마의 계시와 교황의 용서

 

🐑 파티마의 언덕과 세 명의 목동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의 한적한 마을 파티마의 코바 다 이리아 언덕에서 초자연적 사건이 시작됐다. 루치아(10세), 프란치스코(9세), 히야친타(7세) 등 세 명의 사촌 남매 앞에 빛나는 여인의 형상이 나타났다. 성모는 아이들에게 인류의 회개와 평화를 촉구하며 세 가지 비밀을 전했다. 교육받지 못한 시골 아이들이 전한 메시지는 지옥의 환시, 제2차 세계 대전의 예고, 공산주의 러시아의 확산 등 현대사의 비극을 관통하고 있었다. 10월 13일, 약 7만 명의 인파가 목격한 '태양의 기적'을 끝으로 발현은 멈췄으나, 그 메시지는 가톨릭 세계의 영적 이정표가 되었다.


⛪ 갈라진 운명: 사명과 이별

발현 당시 성모는 아이들의 운명에 대해 "프란치스코와 히야친타는 곧 하늘나라로 데려갈 것이나, 루치아는 세상에 남아 나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고 예언했다. 이 말은 실제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다. 오빠 프란치스코는 1919년, 동생 히야친타는 1920년에 당시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으로 인해 어린 나이에 선종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루치아는 성모의 명에 따라 가르멜 수녀회에 입회하여 수녀가 되었고, 평생을 기도와 기록에 헌신하며 파티마의 비밀을 교황청에 전달하는 '살아있는 증인'의 사명을 다했다.


🔫 성 베드로 광장의 총성과 기적

그로부터 정확히 64년이 흐른 1981년 5월 13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일반 알현 중이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향해 터키 출신 극우파 메흐메트 알리 아으자가 9mm 탄환 네 발을 발사했다. 복부와 손에 치명상을 입은 교황은 사선을 넘나들었으나 기적적으로 생존했다. 병상에서 파티마의 제3비밀을 검토한 교황은 저격 당일이 성모의 첫 발현일과 일치함을 깨닫고, 저격수의 탄환을 성모의 '보이지 않는 손'이 유도하여 자신의 생명을 구했음을 확신했다.


🤝 증오를 넘어선 용서의 완결

1983년 12월 27일, 교황은 이탈리아 레비비아 교도소를 방문해 자신을 살해하려 했던 알리 아으자를 만났다. 교황은 저격수의 손을 잡고 20여 분간 대화를 나누며 그를 공식적으로 용서했다. 2000년, 교황청은 '흰 옷을 입은 주교가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환시'가 담긴 제3비밀을 공식 발표하며 이 사건이 예언의 실현임을 확인했다. 교황은 자신의 몸에서 적출한 탄환을 파티마 성모의 왕관에 봉헌하며 감사를 표했다. 1917년 어린 목동들의 예언에서 시작된 역사는, 루치아 수녀의 증언과 교황의 피격을 거쳐 가해자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자비의 실천으로 그 거룩함을 완성지었다.

🏛️ 5월 12일, 중국 쓰촨성 대지진

2008년 초여름, 중국 쓰촨성 일대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기이한 일들이 잇따랐다. 5월 초, 몐양시와 인근 지역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 떼가 서식지를 이탈해 도로를 가득 메우는 광경이 목격됐다. 마을 우물물은 갑자기 솟구치거나 혼탁해졌고, 평소 온순하던 가축들은 먹이를 거부하며 극도로 불안한 증세를 보였다. 

🦁 청두 동물원의 사자들은 밤낮없이 포효했으며, 판다들은 나무 위로 피신해 내려오지 않는 등 미스테리한 징후들이 도처에서 포착됐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불안을 느낀 주민들의 문의가 빗발쳤으나, 당시 중국 당국은 이를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치부했다. 당국은 두꺼비 이동을 산란기 특유의 생태 활동일 뿐이라 일축하며 유언비어 유포를 경계할 것을 권고했다. 당시 중국은 8월에 예정된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와 '사회 안정'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으며, 불길한 징후에 대한 과학적 검토나 예방적 조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

5월 12일 오후 2시 28분, 규모 8.0의 거대 지진이 쓰촨성을 강타했다. 

이 재앙으로 69,227명이 사망하고 17,923명이 행방불명되었으며, 부상자는 37만 명을 넘어섰다. 가옥 500만 채가 파괴되었고 직접적인 경제적 손실은 약 8,451억 위안에 달했다. 🏚️

특히 피해는 교육 현장에 집중됐다. 수업 중이던 수많은 학교 건물이 순식간에 붕괴하면서 5,335명 이상의 어린 학생들이 매몰되어 목숨을 잃었다. 인근의 관공서 건물들이 건재한 상황에서 유독 학교들만 비정상적으로 무너져 내린 모습은 '두부공정(豆腐工程)'이라 불리는 극심한 부실 공사의 실태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피해 학부모들은 학교 잔해에서 철근 대신 발견된 가느다란 철사와 대나무 토막을 증거로 제시하며 거세게 항의했다. 🧣

하지만 당시 중국 교육부와 지진국은 조사를 통해 "지진 규모가 설계 범위를 초과했기 때문에 발생한 자연재해"라고 발표하며 부실 공사 혐의를 부인했다. 이로 인해 시공사나 관련 공무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당국은 올림픽을 앞둔 안정을 명분으로 보상금을 지급하는 대신 '더 이상 문제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강요했고, 집단 소송 시도를 철저히 차단했다. 🤐

진상을 규명하려던 활동가들에 대한 압박은 더욱 거셌다. 환경 운동가 탄쭈어런(譚作人)은 부실 학교 명단을 작성하다 '국가정권 전복 선동죄'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고, 예술가 아이웨이웨이(艾未未)는 사망 학생 명단을 수집하던 중 공안에 의해 가택 연금과 폭행을 당해 뇌출혈 수술을 받기도 했다. 올림픽이라는 국가적 축제의 뒤편에서 아이들의 비극과 부실 공사의 치부는 국가적 통제 속에 조직적으로 은폐되었다. ⚖️

부실 공사 책임자들은 아직도 처벌받지 않고 있으며 피해 유가족에겐 일정 금액의 보상금만 지급됐다. 향후 이의 제기도 집단 행동에도 참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와 함께였다. 매년 5월 12일이 되면 쓰촨성 현지에서는 희생된 아이들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리지만, 부실 공사를 언급하거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철저히 차단됐다. 2008년 5월 12일의 일이었다. 🕯️

🎭 5월 11일, 두 번째 태어난 달리

1904년 5월 11일,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두 번째 살바도르 달리가 태어났다. 

👶 그는 이미 그가 태어나기 9개월 전, 생후 21개월 만에 위장염으로 사망했었다. 그의 부모는 그때 죽은 첫째 아들이 환생했다고 믿었으며, 그 믿음을 증명하려는 듯 둘째에게 죽은 형과 똑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 🕊️

어린 달리는 죽은 형의 옷을 입고 형의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성장했다. 다섯 살이 되던 해, 부모는 그를 형의 묘지로 데려가 그가 형의 유령이자 환생임을 공식화했다. 구 이 사건은 그에게 극심한 심리적 압박과 정체성 혼란을 야기했다. 그는 자신이 독자적인 개체가 아니라 죽은 자의 대역에 불과하다는 공포에 시달렸으며, 그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괴한 행동과 과장된 몸짓으로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려 애썼다. 🎭

그의 초현실주의 예술은 이러한 분열된 자아의 투영이었다. 녹아내리는 시계와 부패하는 형상들은 그가 평생 느껴온 죽음의 악취와 불안정한 자아의 기록이었다. 🕰️ 그는 "나는 죽은 형을 죽여야만 비로소 내가 태어날 수 있다"고 서술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신격화하거나 기행을 일삼아 형과 자신을 분리하려 했다. 🎨

1929년, 달리는 인생의 전환점이 된 여인 갈라를 만났다. 당시 시인 폴 엘뤼아르의 아내였던 그녀는 달리의 천재성과 그 이면의 유약함을 동시에 꿰뚫어 보았다. 달리는 갈라를 만난 직후 "그녀는 나의 구원자이자, 나를 죽은 자의 유령으로부터 해방시킨 유일한 존재"라고 기록했다. 💍 갈라는 달리의 광기를 예술로 정제하고, 그가 '두 번째 살바도르'가 아닌 유일한 거장으로 남을 수 있도록 삶의 전반을 통제하며 지지했다.

갈라라는 안식처를 얻은 후에야 달리의 고통스러운 환생 서사는 멈췄다. 그는 죽은 형의 그림자를 지우고 오직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생애를 마감했다. ✨

🕊️ 5월 10일, 롤리흘라흘라에서 만델라까지

1918년, 트란스케이의 작은 마을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은 롤리흘라흘라. 코사어로 "말썽꾸러기"라는 뜻이었다. 👶

롤리흘라흘라는 템부족 추장 가문의 아들이었다. 아홉 살에 아버지를 잃고 부족장의 후견 아래 자랐다. 서구식 학교에 다녔고, 그곳에서 한 교사가 그에게 영어식 이름을 붙여주었다. 넬슨이었다. 그러나 마을에서 그는 여전히 롤리흘라흘라였다.

포트헤어 대학에서 학생운동에 가담했다가 퇴학당했다. 가문에서 정해준 결혼을 피해 요하네스버그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그는 흑인 차별의 실체를 보았다. 같은 도시 안에서 백인과 흑인이 다른 법, 다른 임금, 다른 통행권을 가졌다.

롤리흘라흘라는 변호사가 되었다. ⚖️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에 가입했다. 처음에는 비폭력 저항을 이끌었다. 1948년 아파르트헤이트가 법제화되었고, 1960년 샤프빌에서 평화시위대 69명이 경찰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는 결론을 바꿨다. 무장 조직 '움콘토 웨 시즈웨'를 창설하고 사보타주 작전을 지휘했다.

1962년, 그는 체포되었다. 1964년 리보니아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로벤 섬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더 이상 롤리흘라흘라가 아니었다.


466/64. 🔒

1964년에 들어온 466번째 수감자라는 뜻이었다. 466/64는 채석장에서 18년 동안 석회암을 깼다. 강한 햇빛에 시력이 상했다. 결핵에 걸렸다. 어머니가 죽었을 때도, 큰아들이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 가지 못했다.

466/64는 감옥 안에서 아프리칸스어를 공부했다. 📖 백인 간수들의 언어였다. 동료 수감자들은 의아해했다. 그는 말했다. "적을 이해해야 적을 설득할 수 있다."

466/64는 27년을 갇혀 있었다. 그동안 바깥에서는 그의 이름이 점점 커졌다.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해졌다. 남아공 정부는 1980년대 중반부터 비밀리에 그와 협상을 시작했다. 466/64는 ANC 지도부와 떨어진 채 홀로 정부 인사들과 마주앉아 미래를 설계했다.


1990년 2월 11일, 그는 걸어 나왔다. 71세였다. 그리고 4년 뒤, 

1994년 5월 10일, 프리토리아 유니언 빌딩 앞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취임 선서를 했다. 🕊️

이날부터 그는 넬슨 만델라였다.

만델라는 취임식에서 자신을 27년간 가둔 백인 교도관들 중 세 명을 귀빈으로 초대했다. 그들이 자신을 인간으로 대해줬다는 이유였다. 

그의 책 '자유로 가는 긴 여정(Long Walk to Freedom)'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감옥 문을 나서면서 깨달았다. 만약 내가 증오를 두고 떠나지 않으면, 나는 여전히 감옥에 있는 것이라는 것을."


만델라의 임기는 5년이었다.

그가 한 일들. 1996년 새 헌법을 제정했다.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헌법으로 금지한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되었다. 사형제를 폐지했다. 주거, 의료, 교육, 물에 대한 접근을 권리로 명시했다.

재건개발프로그램을 통해 약 75만 채의 저소득층 주택을 지었다. 🏠 200만 가구에 전기를 공급했다. 300만 명에게 깨끗한 식수가 닿았다. 6세 이하 어린이와 임산부에게 무료 의료를 제공했다.

진실화해위원회를 출범시켰다. 가해자가 진실을 고백하면 사면을 받는 구조였다. 약 7,000명이 신청했고 약 850명이 사면받았다. 비판도 있었다. 정의 없는 화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아공은 르완다나 유고슬라비아의 길을 가지 않았다.

5년 단임으로 물러났다. 아프리카에서 권력을 쥔 지도자가 자발적으로 내려놓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만델라의 임기에는 실패도 있었다. 💔

1996년 GEAR 정책으로 ANC는 사회주의적 공약을 사실상 폐기했다. 광산 국유화는 없었다. 토지 재분배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아파르트헤이트 말기 백인이 농지의 87%를 소유했는데, 임기 말에도 거의 그대로였다. 실업률은 1994년 20%에서 1999년 30%로 올라갔다. 흑인과 백인의 경제 격차는 좁혀지지 않았다.

HIV/AIDS 대응은 느렸다. 임기 동안 성인 감염률은 7%에서 20% 가까이로 올라갔다. 만델라 본인이 훗날 인정했다. "내가 대통령일 때 더 강하게 말했어야 했다."

강력 범죄율이 급증했다. 행정 역량의 한계가 드러났다. ANC가 정당이 아니라 사실상 국가 그 자체가 되면서, 후일 부패의 토양이 만들어졌다. 만델라 본인은 청렴했으나 그 구조까지 손대지는 못했다.


만델라는 2013년에 사망했다. 그 이후 남아공의 지도자들은 그의 절제도, 청렴도 물려받지 못했다. 제이콥 주마 시기의 '국가 포획'은 만델라가 손대지 못한 ANC 내부 문제가 곪아 터진 결과였다.

남아공은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나라 중 하나다. 지니계수는 0.63 수준이다.

그래서 지금도 남아공에서는 만델라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 떠돈다. 그 시대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희망은 있었기 때문이다.


출처 :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 - 넬슨 만델라 자서전

🌹 5월 9일,어머니날을 만든 여자, 어머니날을 증오하다

 

한 어머니의 삶

🕊️ 앤 리브스 자비스. 1832년 웨스트버지니아에서 태어난 한 여성.

그녀는 13명의 아이를 낳았다. 그중 9명이 어른이 되기 전에 죽었다. 디프테리아, 홍역, 장티푸스. 19세기 미국의 위생 상태는 그만큼 참혹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가 택한 길은 슬픔에 잠기는 것이 아니었다. 다른 어머니들을 구하는 일이었다.

🏥 1858년, 앤은 "어머니의 날 작업 클럽(Mothers' Day Work Clubs)"을 조직했다. 우유를 검사하고, 식수를 정화하고, 가난한 가정에 약을 보냈다. 영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한 풀뿌리 운동이었다.

⚔️ 남북전쟁이 터지자 그녀는 부상병을 돌봤다. 북군이든 남군이든 가리지 않았다. 누구의 아들이든 어머니에게는 똑같은 아들이니까.

🤝 전쟁이 끝난 뒤에는 더 어려운 일을 했다. "어머니의 우정의 날"을 만들어 적이었던 양측 군인과 가족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증오를 봉합하는 일. 어머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앤은 늘 말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어머니의 헌신을 기리는 날을 만들어 주기를."

딸의 약속

👧 그 말을 가슴에 새긴 사람이 있었다. 딸 안나 자비스.

1905년 5월 9일 오늘,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

안나는 결혼하지 않았다. 아이도 낳지 않았다. 평생을 어머니의 꿈 하나에 바쳤다.

✉️ 그녀는 편지를 썼다. 상원의원에게, 대통령에게, 신문사에, 교회에. 수천 통. 직접 자비를 들여 우표를 사고 봉투를 붙였다.

⛪ 1908년 5월 10일. 웨스트버지니아 그래프턴의 작은 감리교회. 최초의 공식 어머니날 예배가 열렸다. 안나는 어머니가 가장 사랑했던 꽃, 흰 카네이션 500송이를 참석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 여기서 전통 하나가 태어났다.

— 어머니가 살아계신 사람은 붉은 카네이션을. — 어머니를 여읜 사람은 흰 카네이션을.

붉은색은 살아있는 어머니의 사랑. 흰색은 떠난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한 송이의 꽃이 그 사람의 어머니가 이 세상에 있는지 없는지를 말해 주었다.

🇺🇸 그리고 1914년 5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서명했다. 5월 둘째 주 일요일을 국가 공식 어머니날로 선포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5월 9일. 그 날짜를 품은 둘째 주 일요일이 클라이맥스로 박혔다. 딸이 어머니에게 바친 9년간의 약속이 끝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다.

분노

🔥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10년도 지나지 않아 안나는 자신이 만든 기념일을 증오하기 시작했다.

💐 꽃집들이 카네이션 가격을 폭등시켰다. 카드 회사들은 "엄마 사랑해요"라고 인쇄된 카드를 팔아 떼돈을 벌었다. 사탕 회사, 식당, 백화점. 모두가 어머니날로 장사를 했다.

안나는 격분했다.

"이건 어머니를 기리는 날이 아니다. 어머니를 팔아먹는 날이다."

🗯️ 그녀는 시위에 나섰다. 어머니날 카네이션 판매 행사장에 난입해 경찰에 체포됐다. 카드는 "게으른 자들이 직접 편지 쓰기 싫어서 사는 것"이라고 욕했다. 사탕 상자는 "엄마에게 줘 놓고 자기가 먹는 것"이라고 비웃었다.

⚖️ 그녀는 소송을 걸었다. 어머니날을 상업화한 모든 단체를 향해. 미국 화훼협회는 그녀의 최대의 적이 되었다.

🏚️ 어머니의 유산도, 자신의 전 재산도 모두 이 싸움에 쏟아부었다.

마지막

👁️ 1943년. 안나는 시력을 잃었다. 청력도 잃었다. 빈털터리가 된 그녀는 필라델피아의 한 요양원에 들어갔다.

그리고 여기서 역사상 가장 잔인한 아이러니가 시작된다.

🌹 누가 그 요양원 비용을 댔는가.

미국 화훼협회. 그녀가 평생 싸웠던, 어머니날을 카네이션 장사판으로 만들었다고 저주했던 바로 그 단체였다.

그들은 안나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누구의 돈으로 살고 있는지 모른 채 그곳에 머물렀다.

⚰️ 1948년 11월 24일. 안나 자비스는 84세로 숨을 거뒀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 어머니가 되지 못한 여자. 평생을 어머니날에 바쳤지만 정작 자신을 위한 어머니날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여자.

🥀 그녀의 장례식에 보낸 헌화는 화훼협회가 했다.

흰 카네이션이었다.

🌋 🔥5월 8일, 생피에르의 펠레 화산 폭발

 

🏛️ 생피에르는 19세기 후반 카리브해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였다. 마르티니크섬 북서부 해안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인구 약 28,000명을 보유했고, 식민지 마르티니크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했다. 사탕수수와 럼주 무역이 도시 경제의 기반이었으며, 항구에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상선이 끊이지 않았다.

도시는 돌로 포장된 도로, 가스등, 전차 노선을 갖추고 있었다. 1786년에 건립된 극장은 800석 규모로, 파리에서 건너온 오페라단이 정기적으로 공연했다. 식물원, 군사 병원, 도서관, 신학교가 있었고, 시내에는 신문사 두 곳이 운영되었다. 도시의 건축물 다수는 석조 2층 또는 3층 구조였으며, 발코니와 안뜰을 갖춘 프랑스풍 양식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외국인 방문객들은 이 도시를 "서인도제도의 파리"라고 불렀다.

도시 북쪽 약 7km 지점에 펠레 화산이 있었다. 해발 1,397m의 이 산은 1792년과 1851년에 소규모 분출 기록이 있었으나, 두 경우 모두 인명 피해는 없었다. 주민들은 산을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1902년 4월 23일, 펠레 화산에서 작은 진동과 분기공 활동이 관측되었다. 산 정상 부근에서 유황 가스가 분출되었고, 이틀 뒤인 4월 25일에는 화산재가 도시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4월 말까지 화산재는 도시의 거리, 지붕, 농지를 회색으로 덮었다. 산기슭의 강물 온도가 상승했으며, 일부 지류에서는 물이 끓는 현상이 보고되었다.

5월 초가 되자 산기슭 농촌 지역에서 동물들의 이상 행동이 나타났다. 살무사를 포함한 다수의 뱀이 산에서 내려와 인근 마을로 진입했다. 5월 5일경 프레셰르 마을에서는 뱀에 물려 가축 약 50마리와 어린이 여러 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시기 라이비에르 블랑슈에서 발생한 이류(泥流)로 사탕수수 공장 노동자 23명이 사망했다.

산기슭 마을의 주민들은 이 시점부터 생피에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도시가 산에서 더 멀고, 인구가 많고, 행정 시설이 갖춰져 있어 안전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인구는 평소보다 수천 명 더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 식민지 의회 선거가 5월 1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마르티니크 총독 루이 무테는 선거를 정상적으로 진행하려 했다. 생피에르는 그의 정치적 지지 기반의 핵심 지역이었다. 5월 7일, 총독은 과학자, 의사, 약사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위원회는 화산 활동을 검토한 후 도시는 즉각적인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이 결론은 지역 신문 『레 콜로니』 5월 7일자에 게재되었다. 무테 총독은 자신의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부인과 함께 5월 7일 저녁 생피에르에 입성했고, 시내 호텔에 숙박했다. 도시 외곽 도로에는 이주를 원하는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군 병력이 배치되었다.

같은 날 저녁, 부두 노동자 루이-오귀스트 시파리스가 폭행 혐의로 시립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갇힌 독방은 감옥 부지 내 반지하 구조의 단독 감방으로, 두꺼운 석벽과 작은 환기구 하나만을 가진 형태였다.

5월 8일 오전 7시 50분경, 펠레 화산 분화구 부근에서 분출 활동이 시작되었다. 

약 8시 2분, 산의 남서쪽 측면에서 대규모 측방 분출이 발생했다. 분출물은 고온의 가스, 화산재, 화산암 파편의 혼합물로, 지표면을 따라 빠르게 흘러내렸다. 이 현상은 이후 화쇄류(pyroclastic flow)로 분류되었다. 분출물의 온도는 약 1,000°C, 이동 속도는 시속 약 670km로 추정된다.

화쇄류는 분출 후 약 1~2분 만에 생피에르에 도달했다. 도시 전체가 거의 동시에 화염과 가스에 노출되었다. 석조 건물의 벽이 무너졌고, 항구에 정박한 선박 18척 중 대부분이 화재를 입거나 침몰했다. 영국 선적 화물선 로담호 한 척만이 심하게 손상된 상태로 항구를 빠져나가 세인트루시아에 도착했다.

도시 내 사망자 수는 약 28,000명으로 추산된다. 무테 총독과 그의 부인을 포함한 행정 관료, 종교인, 상인, 노동자, 어린이가 모두 포함되었다. 사망 원인은 대부분 고온 가스 흡입에 의한 즉사로 판단되었다. 시신 다수는 사망 당시의 자세를 유지한 채 발견되었다.

생피에르 시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두 명으로 공식 기록되었다.

루이-오귀스트 시파리스는 지하 독방에서 화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그는 분출 당시 환기구로 들어온 뜨거운 가스를 옷으로 막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고 진술했다. 발견 시점은 분출 후 약 4일이 지난 5월 12일경이었으며, 그는 생피에르 외곽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등과 다리에 심한 화상 흉터가 남았다.

레옹 콩페르-레앙드르는 도시 남쪽 변두리에 거주하던 28세의 구두 수선공이었다. 분출 당시 그는 자택 현관에 있었으며, 화쇄류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약한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화상을 입은 상태로 약 6km를 이동해 인근 마을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 진술하여 기록을 남겼고, 1936년에 사망했다.

이외에 항구의 선박에 있던 선원과 승객 중 일부가 중상을 입은 채 구조되었으며, 도시 외곽 지역에서도 부상자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며칠에서 몇 주 안에 화상과 호흡기 손상으로 사망했다.

시파리스는 사면을 받은 후 미국 흥행사 바넘 앤 베일리 서커스단과 계약했다. 1903년부터 그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전시 공연에 출연했다. 무대 위에는 그가 갇혔던 감방을 재현한 모형이 설치되었고, 시파리스는 화상 흔적이 남은 몸을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출연은 약 10년간 이어졌으며, 이후 그는 공연 활동에서 물러났다. 1929년경 파나마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 일자와 장소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생피에르는 분출 이후 도시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 식민지 행정 중심은 1902년 이후 포르드프랑스로 이전되었다. 현재의 생피에르는 인구 약 4,000명의 작은 마을이며, 1902년 분출의 잔해 일부가 사적지로 보존되어 있다. 시파리스가 갇혔던 감방의 석조 구조물은 현존하며, 마르티니크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 운영되고 있다.

펠레 화산의 1902년 분출은 화산학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프랑스 지질학자 알프레드 라크루아가 분출 직후 현장 조사를 수행했고, 그의 연구는 190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화쇄류 현상이 체계적으로 정의되었으며, 이러한 형태의 분출은 이후 "펠레형 분출"로 분류되었다. 펠레 화산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다시 분출 활동을 보였으나, 그 이후로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2026년 5월 7일 목요일

🏳️ 5월 7일, 두 개의 항복과 전쟁의 종결

 

1. 베트남 디엔비엔푸 전투의 종결 (1954년)

19세기 후반부터 베트남을 식민 지배해온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복귀하여 독립을 선언한 베트민(베트남 독립동맹)과 1946년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벌였다. 프랑스군은 베트민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유인 섬멸하기 위해 1953년 11월, 베트남 서북부 고지대인 디엔비엔푸에 강력한 현대식 요새를 구축했다. 🏰

그러나 보 응우옌 잡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중화기를 분해하여 수작업으로 산 정상까지 운반한 뒤 요새를 포위 압박했다. ⛰️ 1954년 3월 13일 시작된 본격적인 공세는 56일간 지속되었다.

1954년 5월 7일 오늘, 베트민군이 프랑스군 사령부를 점령하고 드 카스트리 장군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전투는 종결되었다. 🏳️ 

이 결과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반도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으며, 같은 해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2. 나치 독일의 무조건 항복 서명 (1945년)

1945년 4월 30일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과 5월 2일 소련군의 베를린 점령으로 나치 독일의 패배는 기정사실화되었다. 히틀러의 후계자로 지명된 칼 되니츠 제해 제독은 연합군에 항복하기 위해 전권 위원들을 파견했다. 🎖️

1945년 5월 7일 오늘 오전 2시 41분, 프랑스 랭스에 위치한 연합군 최고사령부(SHAEF)에서 나치 독일 국방군 작전참모장 알프레트 요들 상급대장이 모든 독일군 전선의 무조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 

연합군 측에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사령관을 대신해 월터 베델 스미스 참모장이 서명에 참여했다. 이 서명에 따라 모든 전투 행위는 중부 유럽 표준시 기준 5월 8일 23시 01분을 기해 중단되었으며,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

🗼 5월 6일, 에펠탑 첫 개관

  

🗼1889년 5월 6일 오늘, 파리 만국박람회 개막과 함께 에펠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높이 324m, 무게 7,300톤, 부품 18,038개, 리벳 250만 개. 당시 인류가 만든 가장 높은 구조물이었다.

탑은 처음부터 임시 구조물이었다. 박람회를 위해 지어졌고, 20년 후인 1909년에 철거 예정이었다. 시 정부는 1909년에 실제로 철거 권한을 승인했다.

탑이 살아남은 이유는 미관이 아니라 용도였다. 1903년부터 군이 꼭대기에 무선 전신 안테나를 설치했고, 1차 대전 중 독일군 통신을 감청하는 데 사용되었다. 통신 인프라로서의 가치가 철거를 막았다.

건설 당시 에펠탑은 환영받지 못했다. 1887년 알렉상드르 뒤마, 샤를 구노, 기 드 모파상 등 300명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신문 '르 탕'에 항의서를 발표하며 탑을 "쓸모없고 흉측한", "야만적인 덩어리"라 비판했다. 건설비 780만 프랑 중 대부분을 귀스타브 에펠 본인이 사비로 충당해야 했다.

📰 2. 1925년의 상황

1925년 에펠탑은 다시 골칫거리가 되었다. 박람회로부터 36년이 지나 구조물은 녹슬었고, 7년마다 60톤의 페인트로 재도장해야 했다. 같은 해 귀스타브 에펠이 사망했고, 1910년부터 탑의 소유주였던 파리시는 유지 비용을 부담스러워했다. 신문에는 유지비 문제와 철거 가능성을 다룬 기사가 반복적으로 실렸다.

이 기사가 한 사기꾼의 눈에 들어왔다. 빅터 루스티히. 오스트리아-헝가리 출신, 35세, 5개 국어 구사, 가명 45개. 그는 신문 기사를 사기의 토대로 삼았다.

🎩 3. 사기의 구조

루스티히는 위조꾼을 고용해 우편 전신부(Ministère des Postes et Télégraphes)의 가짜 공문서를 만들었다. 파리에서 가장 큰 고철상 5명을 추려 크리용 호텔(Hôtel de Crillon)에서의 비밀 회의에 초대했다.

회의에서 그는 자신을 우편 전신부 차장으로 소개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 정부가 에펠탑 유지비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 1909년에 이미 철거 결정이 한 차례 내려진 바 있다.
  • 정부가 탑을 고철로 매각하기로 했다.
  • 여론 반발이 예상되므로 모든 거래가 비밀에 부쳐져야 한다.

이 정보들 중 마지막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사실에 가까웠다. 페인트 비용, 1909년 철거 승인, 여론 반발 가능성 — 모두 신문에서 확인 가능한 정보였다. 거짓 요소는 단 하나, 자신이 정부 대리인이라는 점뿐이었다.

회의 후 루스티히는 가짜 출입증으로 5명을 탑 3층에 데려가 파리 전경을 보여주었다.

💰 4. 표적 선정과 뇌물 요구

5명의 딜러 중 루스티히는 앙드레 푸아송(André Poisson)을 표적으로 골랐다. 시골 출신 신참 사업가로, 파리 상류층 사회 진입을 원하는 인물이었다.

며칠 후 일대일 만남에서 루스티히는 자신이 박봉의 공무원이며, 누구에게 계약을 줄지 결정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을 흘렸다. 푸아송은 이를 뇌물 요구로 해석했고, 그 해석이 오히려 루스티히가 진짜 관료라는 증거로 작용했다. 부패한 관료처럼 행동함으로써 루스티히는 의심을 무력화시켰다.

푸아송은 현금 2만 달러와 추가 5만 달러(낙찰 보장 조건)를 약속했다. 합계 약 7만 프랑. 거래 직후 루스티히는 빈으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 5. 두 번째 시도

루스티히는 빈에서 신문을 살피며 수배령을 기다렸으나 어떤 보도도 나오지 않았다. 푸아송이 신고하지 않았다. 신고할 경우 자신이 "에펠탑을 산 사람"으로 알려져 사회적 평판을 잃을 것을 우려한 결과였다.

이를 확인한 루스티히는 같은 해 후반 파리로 돌아와 동일한 사기를 재시도했다. 새로운 5명의 고철상을 같은 호텔에 모았고, 같은 방식으로 표적을 선정했다. 그러나 이번 표적은 거래 전 경찰에 신고했다. 루스티히는 체포 직전 도망쳐 미국행 배에 올랐다. 이번에는 보도가 나왔지만 그는 이미 대서양 위에 있었다. 🚢

🎺 5월 5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서거

⚔️ 1788년 프랑스 옥손, 언덕과 숲, 평원들이 펼쳐진 곳에 프랑스의 포병연대가 있었다. 

젊은 장교들은 각자의 방에서 생활했다. 

윗층방에 있는 젊은 소위는 밤마다 뿔피리를 불어 동료들이 공부의 방해를 받았다.

아래층의 또 다른 장교가 계단을 올라가 말했다.

"자네, 뿔피리를 너무 불면 피곤하지 않나?"

소위가 답했다.

"아니, 전혀"

"그래? 하지만 다른 많은 동료들은 자네의 뿔피리 소리 때문에 피곤해 하고 있어. 멀리 나가서 마음대로 불어도 되잖아?"

"내 방의 주인은 나야."
"그래도 지킬 건 지켜야지. 다들 자네에게 말하려고 해."

그러자 윗층의 소위가 소리쳤다.

"누구도 감히 나에게 그런 명령을 하지 못해."

아랫층의 장교가 단호히 말했다.

"나는 해!"

결국 윗층 소위는 다른 곳에 가서 뿔피리를 불었다.


1821년 5월 5일 오늘, 이 아랫층의 젊은 장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대서양 남쪽 외딴섬 세인트헬레나의 롱우드 하우스(Longwood House)에서 약 6년간 연금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프랑스, 군대, 군대의 선봉, 조세핀(France, armée, tête d'armée, Joséphine)"이었다.

나폴레옹은 처음 세인트헬레나에 묻혔으나, 1840년 루이 필리프 왕의 결정으로 유해가 프랑스로 송환되었다. 현재는 파리 앵발리드(Les Invalides)의 돔 교회 지하에 안치되어 있으며, 7겹의 관에 둘러싸인 거대한 적색 반암 석관에 묻혀 있다.


출처 : 나폴레옹 막스 갈로

🔥 5월 4일, 중국의 5.4운동

 

중국은 1차 세계대전 동안 연합군 측에 약 14만 명의 노동자(華工)를 파견했다. 서부전선에서 참호를 파고 물자를 운반하며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중국은 당당한 전승국이었고, 그만큼 종전 후 정당한 대우를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

발생 배경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열강은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다. 패전국 독일이 산둥반도(山東半島)에 가지고 있던 이권을 중국에 반환하지 않고 일본에 넘긴 것이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1915년 일본이 위안스카이(袁世凱) 정권에 강요한 '21개조 요구(二十一個條)'가 있었다.

21개조 요구의 핵심 내용 😡

21개조는 다섯 묶음(五號)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실상 중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드는 조항들이었다.

제1호: 독일이 산둥에 가지고 있던 모든 이권을 일본이 그대로 승계한다. 산둥성 내 철도 부설권과 항만 개방권도 일본에 넘긴다.

제2호: 남만주와 동부 내몽골에서 일본의 조차 기간을 99년으로 연장하고, 일본인이 토지를 임차·소유하며 자유롭게 거주·영업할 수 있게 한다. 사실상 만주 식민지화의 길을 열었다.

제3호: 중국 최대 제철 기업인 한예핑공사(漢冶萍公司)를 중일 합작으로 만든다. 중국 중공업의 심장을 일본이 쥐겠다는 뜻이었다.

제4호: 중국 연안의 항만과 섬을 다른 나라에 절대 양도하지 않는다. 중국 주권을 일본이 통제하겠다는 조항이다.

제5호(가장 충격적): 중국 중앙정부에 일본인 정치·재정·군사 고문을 채용하고, 주요 도시 경찰을 중일 공동 관리하며, 일본에서 무기의 절반 이상을 구입하고, 푸젠성에서 일본 외 외국 자본을 배제한다. 이건 중국을 사실상 제2의 조선으로 만드는 조항이었다. 🔥

위안스카이 정권은 제5호를 빼고 나머지를 수락했다. 5월 9일 조약 체결일은 이후 '국치일(國恥日)'로 불렸다. 산둥 이권을 일본에 넘긴 파리강화회의 결정은, 4년 전 그 굴욕이 국제적으로 추인되는 순간이었다. 누적된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한 이유다.

🔥1919년 5월 4일 오늘, 베이징대학을 중심으로 한 13개 대학 학생 약 3,000명이 톈안먼 광장에 모였다. 

"산둥을 돌려달라", "21개조를 폐기하라", "매국노를 처단하라"는 구호가 거리를 뒤덮었다. 학생들은 친일파로 지목된 차오루린(曹汝霖)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장쭝샹(章宗祥)을 구타했다.

베이징 정부가 학생들을 대거 체포하자 시위는 톈진, 상하이, 우한으로 번졌다. 6월부터는 상인들의 철시(撤市)와 노동자들의 파업이 가세하며 이른바 '삼파(三罷)' 투쟁으로 발전했다. 결국 정부는 친일 관료 3명을 파면하고 파리강화조약 조인을 거부했다.

사상적 토대: 신문화운동 📚

5.4운동의 뿌리는 1915년 천두슈(陳獨秀)가 창간한 『신청년(新青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후스(胡適)의 백화문 운동, 루쉰(魯迅)의 봉건사회 비판, "민주(德先生)와 과학(賽先生)"이라는 구호가 새로운 세대의 의식을 일깨웠다. 5.4운동은 이 사상적 흐름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건이었다.

두 청년, 그리고 도미노 🚩

이 운동에서 두 명의 인물이 결정적이었다. 베이징대 도서관 사서로 일하던 무명의 청년 마오쩌둥과 학생이었던 저우언라이. 두 사람 모두 이 운동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빠져들었고, 30년 후 중국 공산당이 권력을 잡았다. 5월 4일은 사실상 중국이 공산화되는 첫 도미노였던 셈이다.

운동 직후인 1921년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고, 문어체 문언문 대신 구어체 백화문이 표준어로 자리 잡았다. 한국의 3.1운동(1919년 3월 1일)이 중국 지식인들에게 자극을 주었다는 평가도 있다.


출처 : 종횡무진 동양사 남경태

오늘날의 5월 4일

중국은 지금도 이 날을 청년절(青年节)로 기념하며, 시진핑은 청년 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이 날을 인용한다.


5월 3일, 금지를 금지하라

 

영광과 권태 사이, 전후 프랑스 🇫🇷

1945년의 프랑스는 승전국이었지만 동시에 패전국이었다. 나치에 점령당했던 4년의 기억, 비시 정권의 협력, 레지스탕스라는 신화. 이 모순된 유산 위에서 제4공화국이 출범했다. 그러나 정부는 평균 6개월마다 무너졌고, 의회는 분열했으며, 식민지에서는 피가 흘렀다. 인도차이나에서 패배했고(1954년 디엔비엔푸), 곧이어 알제리가 불타올랐다.

경제는 달랐다. 이른바 "영광의 30년"(Trente Glorieuses)이 시작됐다. 마셜 플랜의 자금, 국가 주도의 산업화, 베이비붐. 르노 4CV가 거리를 채우고 냉장고와 텔레비전이 가정에 들어왔다. 농촌 인구는 도시로 쏟아졌고, 대학생 수는 1950년 약 14만 명에서 1968년 60만 명을 넘어섰다.

드골의 귀환과 "위대한 프랑스" ⚜️

1958년, 알제리 위기로 제4공화국이 붕괴 직전에 몰리자 드골이 돌아왔다. 그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핵심으로 한 제5공화국 헌법을 만들었고, 이듬해 대통령에 올랐다.

드골의 비전은 분명했다. La grandeur de la France. 위대한 프랑스.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독자 노선을 걷는 강대국. 1960년 사하라에서 첫 핵실험을 했고, 1966년 NATO 통합군사령부에서 탈퇴했다. 1964년에는 서방 진영 가운데 이례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했다. 프랑(franc)은 강해졌고, 콩코드 여객기 개발이 시작됐다.

겉으로는 영광스러웠다. 그러나 그 영광은 권위주의적이었다. 텔레비전과 라디오는 사실상 국가 통제 아래 있었고, 드골은 78세의 노인이었으며, 그가 호명하는 "프랑스"는 점점 더 젊은 세대의 감각과 멀어졌다.

알제리, 모두가 외면한 모순 🩸

알제리 전쟁(1954-1962)은 프랑스 사회의 가장 깊은 상처였다. 100년 넘게 식민지가 아니라 프랑스 본토의 일부로 간주된 땅. 그곳에서 독립 전쟁이 벌어지자 기성 정치권은 모순 속을 헤맸다.

좌파 사회당 정부는 진압을 강화했다. 우파는 알제리 사수를 외쳤다. 드골은 처음에 "Je vous ai compris"(나는 여러분을 이해했다)며 식민지 정착민들에게 손을 내미는 듯했지만, 결국 1962년 에비앙 협정으로 알제리 독립을 인정했다. 이 과정에서 OAS(비밀군사조직)는 드골 암살을 시도했고, 파리 한복판에서는 1961년 10월 알제리계 시위대가 경찰에 살해되어 센강에 던져진 사건까지 벌어졌다.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힌 학살이었다.

요점은 이거다. 기성 정치는 고문을 묵인했고, 식민 지배의 종말을 직시하지 못했으며, 자유·평등·박애를 외치면서 파리 시민이 강에 떠오르는 광경을 외면했다. 1968년에 스무 살이 된 세대는 바로 그 모순을 보며 자랐다. ⚖️

낭테르의 기숙사, 사소해 보였던 도화선 🚪

1964년, 파리 외곽의 황량한 부지에 낭테르 대학이 세워졌다. 소르본의 과밀을 해소하기 위한 위성 캠퍼스. 그러나 현실은 처참했다. 빈민가(bidonville) 옆에 들어선 콘크리트 건물, 부족한 시설, 1만 명이 넘는 학생들이 들어찬 비좁은 공간.

그리고 기숙사 규정이 있었다. 남학생은 여학생 기숙사에 출입할 수 없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21세 미만은 부모 동의 없이 이성을 방에 들일 수 없었다.

1967년 3월, 학생들이 여학생 기숙사를 점거했다. 1968년 1월, 청년체육부 장관 프랑수아 미소프(François Missoffe)가 새 수영장 개장식에 참석했다. 한 청년이 다가가 따져 물었다. "장관님이 쓰신 청년백서 600쪽을 읽었는데, 청년의 성 문제에 대한 언급이 한 줄도 없습니다." 미소프는 비꼬듯 답했다. "그런 문제가 있으면 수영장에 뛰어들게." 청년이 받아쳤다. "그게 바로 파시즘 시대 청년 정책이지요."

그 청년이 다니엘 콘-방디였다. 별명은 "붉은 다니"(Dany le Rouge). 🔴

기숙사 규정은 작은 문제였지만 동시에 모든 것의 축약이었다. 권위주의, 가부장제, 청년의 몸과 욕망에 대한 통제, 어른들이 만든 세계의 위선. 3월 22일, 콘-방디를 비롯한 학생들이 낭테르 본관 행정동을 점거했다. *"3월 22일 운동"*이 탄생했다.

1968년 5월 3일 오늘,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

대학 당국은 4월 말 콘-방디를 비롯한 활동가들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했다. 5월 2일, 낭테르 학장은 캠퍼스를 폐쇄했다. 학생들은 소르본으로 향했다.

5월 3일 토요일 오후, 소르본 안뜰에 약 500명이 모였다. 토론, 연설, 격앙된 분위기. 학장은 경찰을 불렀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 실수가 벌어졌다. 800년 가까이 경찰은 소르본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대학 자치의 불문율이 깨진 것이다. 진압 경찰(CRS)이 안뜰로 진입해 학생들을 호송차에 실었다.

라탱 지구의 다른 학생들이 소식을 듣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동지들을 풀어줘라!" 자갈이 날아갔고 최루탄이 터졌다. 그날 밤만 수백 명이 체포됐고, 소르본은 폐쇄됐다.

벽에는 곧 새 글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Il est interdit d'interdire.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

Sous les pavés, la plage. 자갈 아래에 해변이 있다.

Soyez réalistes, demandez l'impossible.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이 문장들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영광의 30년이 만든 풍요, 드골이 외친 위대한 프랑스, 알제리에 대한 침묵, 낭테르의 기숙사 규정—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거부하는 선언이었다. ✊

자갈을 뜯어내자 그 아래는 모래였다. 도시의 단단한 표면 아래 해변이 있다는 그 문장은, 억압된 질서 아래 다른 가능성이 잠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5월의 프랑스는 그 해변을 잠시 보았다.

출처 : 진격의 10년, 1960년대  김경

2026년 5월 5일 화요일

🕯️ 5월 2일, 거장 다 빈치의 서거

 

1490년, 밀라노의 어느 흐린 봄날이었다. 열 살 소년이 한 작업장 문 앞에 섰다. 이름은 잔 자코모 카프로티. 오레노 마을 출신, 농부의 아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발에는 신발조차 변변치 않았다. 🌫️

문이 열렸다. 안에서 한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았다. 서른여덟의 화가. 곱슬머리에 긴 수염, 화려한 분홍빛 튜닉. 도시 전체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소년은 몰랐다. 자기가 들어선 그 문이 역사 속으로 통하는 문이라는 것을.

들어간 첫날, 소년은 주인의 돈을 훔쳤다. 다음 날에는 손님의 은제 첨필을 훔쳤다. 그 다음에는 가죽 한 장. 또 그 다음에는 동료의 옷. 주인은 노트에 적었다.

"도둑. 거짓말쟁이. 고집쟁이. 대식가."

그리고 별명을 붙였다. 살라이(Salaì) — 작은 악마. 😈

상식이라면 쫓아냈어야 했다. 하지만 주인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옷을 사주었다. 장미색 튜닉, 은박 망토, 스물네 켤레의 신발. 가난한 농부의 아들에게는 평생 만져볼 일 없을 사치품들이었다. 동료들은 수군거렸다. 왜 저 아이만 특별한가.

이유는 단순했을지 모른다. 살라이는 아름다웠다. 황금빛 곱슬머리, 긴 속눈썹, 양성적인 얼굴선. 주인은 노트 여백에 무의식적으로 그의 옆모습을 그렸다. 한 번, 두 번, 수십 번. 〈세례자 요한〉의 양성적 미소도, 〈바쿠스〉의 관능적 곡선도 모두 그 얼굴이었다. 살라이는 모델이었고, 뮤즈였고, 그 이상이었다. ✍️

세월이 흘렀다. 살라이는 자라 화가가 되었다. 재능은 평범했다. 그가 그린 그림 대부분은 주인 작품의 모사였다. 그래도 주인은 그를 내치지 않았다.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피렌체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다시 밀라노로 — 주인이 가는 곳에 살라이도 있었다. 30년이었다.

주인은 비밀이 많은 사람이었다. 노트는 거울에 비춰야 읽을 수 있는 글씨로 가득했다. 시신을 해부하다 교황의 노여움을 샀고, 청동 기마상을 만들다 실패했고, 광장에서는 같은 도시에 사는 거친 조각가와 공개적으로 다투었다. 그 조각가는 주인을 향해 외쳤다. "당신이나 직접 설명하시오, 미완성으로 둔 사람이여!" 주인은 침묵했다.

살라이는 그 모든 것을 곁에서 보았다. 천재의 영광과 굴욕, 환호와 좌절. 그는 도둑이었지만, 30년간 한 번도 떠나지 않았다. 🕯️

1516년, 주인은 알프스를 넘었다. 프랑스 왕이 그를 불렀다. 살라이도 따라갔다. 앙부아즈의 클로 뤼세 저택, 강이 내려다보이는 방. 하지만 살라이는 오래 머물지 않았다. 2년 만에 밀라노로 돌아갔다. 주인이 선물한 포도밭이 그곳에 있었다. 이별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한 귀향이었을까.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1519년 5월 2일 오늘.

그날, 앙부아즈의 작은 성에서 노화가가 숨을 거두었다. 67세. 오른팔은 이미 마비되어 붓을 들지 못한 지 오래였다. 머리맡에는 충실한 귀족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가 있었다. 전설은 프랑스 왕이 그의 품에 안겨 죽었다고 말하지만, 그건 후세의 미화일 뿐이다. 🥀

유언장이 펼쳐졌다. 노트와 도구, 대부분의 그림은 멜치에게. 하지만 한 줄이 있었다. 밀라노 포도밭의 절반 — 살라이에게.

그뿐이 아니었다. 살라이가 죽은 뒤 작성된 그의 재산 목록에는 믿을 수 없는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세례자 요한〉. 〈성 안나와 성모자〉. 그리고 한 여인의 초상화 한 점. 미소 짓는 여인. 피렌체의 비단상인 부인이라 알려진 그 그림.

라 조콘다. 모나리자.

어떻게 그것들이 살라이의 손에 들어갔는지, 기록은 침묵한다. 선물이었는지, 유산이었는지, 아니면 작은 악마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훔친 것이었는지. 결국 그 미소 짓는 여인은 프랑스 왕의 손에 들어갔고, 살라이는 그 대가로 돈을 받았다. 어떤 학자는 말한다 — 그 여인의 얼굴이 살라이 자신과 묘하게 닮았다고.

5년 뒤, 1524년. 살라이는 석궁에 맞아 죽었다. 마흔넷이었다. 결투였는지 암살이었는지, 그것도 미스터리다. 작은 악마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림자였다.

그가 평생 곁을 지킨 그 노화가의 이름을, 이제는 모두가 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천재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 30년간 머문 자가 도둑이자 거짓말쟁이였다는 사실.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어쩌면 모든 천재의 곁에는 그를 인간으로 붙들어두는 작은 악마가 한 명씩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

🕊️ 5월 13일: 파티마의 계시와 교황의 용서

  🐑 파티마의 언덕과 세 명의 목동 1917년 5월 13일, 포르투갈의 한적한 마을 파티마의 코바 다 이리아 언덕에서 초자연적 사건이 시작됐다. 루치아(10세), 프란치스코(9세), 히야친타(7세) 등 세 명의 사촌 남매 앞에 빛나는 여인의 형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