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시대의 공기
1983년의 유럽은 얼어붙어 있었다. 냉전 전 기간을 통틀어 가장 긴장이 고조된 해 중 하나였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이 데탕트의 종지부를 찍었고, 그해 3월 레이건 미 대통령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규정했다. 9월에는 소련이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했다. 11월에는 NATO의 군사훈련 '에이블 아처'를 소련이 핵 선제공격 준비로 오인해, 인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핵전쟁의 문턱까지 다가갔다.
이 모든 긴장의 최전선이 독일이었다. 미국의 퍼싱 II 중거리 핵미사일이 서독에 배치될 예정이었고, 본에서는 수십만 명 규모의 반대 시위가 열렸다. 베를린 장벽은 22년째 그 자리에 있었다. 같은 언어를 쓰고 친척이 살고 불과 몇 시간 거리지만, 동독은 서독 사람에게 들여다볼 수 없는 블랙박스였다. 슈타지의 감시망 아래에서 정보는 단편적으로만 흘러나왔다.
이 불투명성이 핵심이다. "동독에서 왔다"는 한마디가 검증 면제권으로 기능하던 시대였다. 동구권에서 비공식 경로로 흘러나오는 골동품·문서·예술품 이야기는 그 자체로 진위를 따지기 어려웠다. 망명자 증언, 비밀 문서, 익명의 출처 — 냉전기 언론은 "출처 보호"라는 명분 아래 검증 절차를 건너뛰는 일이 흔했다. 비밀이 곧 권위였다.
나치 과거를 둘러싼 분위기도 미묘하게 들끓고 있었다.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가 사라지기 전에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강박이 학계와 언론계를 짓누르고 있었다. 1979년 미국 드라마 《홀로코스트》 방영 이후 대중의 관심이 재점화됐고, 학계에서는 히틀러 개인의 의지를 중시하는 해석과 나치 체제의 구조적 동학을 강조하는 해석이 격돌하는 '역사가 논쟁'의 불씨가 타오르기 시작했다.
표면 아래에서는 또 다른 흐름이 진행 중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나치를 단죄하는 사회였지만, 수집가 시장에서는 나치 유물 거래가 조용히 번창했다. 친위대 휘장, 히틀러 친필 편지, 괴링의 개인 소장품 — 이런 물건들이 음지에서 거액에 거래됐다. 이 그늘진 경제가 위조꾼들에게는 황금어장이었다.
서독 최고 권위의 시사주간지 슈테른은 이 모든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발행부수 180만 부, 영향력으로는 독일어권에서 견줄 데가 없는 매체였다. 그러나 1980년대 초의 슈테른은 시사 분야에서 새로운 한 방을 갈망하고 있었다. 누군가 히틀러의 미발견 일기를 들고 나타난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 있는 편집국은 세상에 없었다.
2. 4월 25일, 함부르크
1983년 4월 25일 오늘, 함부르크 그루너+야르 출판사 본사 강당에 전 세계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슈테른이 긴급 기자회견을 예고한 날이었다. 사람들은 어떤 특종이 터질지 알 수 없었지만, 분위기만으로도 평범한 발표가 아님을 직감했다.
편집장 페터 코흐가 단상에 올랐다. 그의 선언은 짧고 단호했다. 슈테른이 아돌프 히틀러가 1932년부터 1945년까지 직접 쓴 일기장 60권을 입수했다. 독일 현대사가 다시 쓰여야 한다.
강당이 술렁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단상 옆에는 검은 표지의 노트들이 전시돼 있었고, 표지에는 고딕체 금속 이니셜이 박혀 있었다. 코흐는 이 자료가 1945년 4월 베를린 인근 뵈르너스도르프에 추락한 비행기에서 수습돼 동독 농가 헛간에 수십 년간 숨겨져 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락 사건은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 나치 수뇌부의 문서를 싣고 베를린을 떠난 항공기가 그 지역에서 추락했고, 적재물이 끝내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이야기는 역사의 빈 자리에 정확히 들어맞았다.
슈테른은 자료 확보에 약 930만 마르크, 당시 380만 달러가량을 지불했다고 밝혔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 미국 '뉴스위크'와의 국제 연재권 계약도 이미 체결돼 있었다. 영국의 저명한 나치 역사학자 휴 트레버-로퍼가 진본 보증에 이름을 올렸다. 옥스퍼드 출신, '히틀러 최후의 날들'의 저자, '선데이 타임스'이사. 그의 권위는 의심을 잠재우기에 충분해 보였다.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텔렉스가 전 세계로 송출됐다. 신문 1면 헤드라인이 일제히 바뀌었다. 만약 이것이 진짜라면, 나치 독일 연구의 판도가 바뀐다. 히틀러 개인의 의지와 광기에 관한 해석, 홀로코스트 결정 과정, 동부전선 작전 판단 — 모든 것이 새로 검토돼야 했다.
서방 언론사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동독 언론은 침묵했다. 슈테른 편집국은 그날 저녁 샴페인을 터뜨렸다. 세기의 특종이 손에 잡혔다는 확신이 강당을 채웠다.
3. 첫 번째 균열
축포는 24시간을 가지 못했다.
발표 당일 저녁부터 독일과 미국의 역사학자들이 의심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첫 의문은 단순했다. 히틀러는 손이 떨려 말년에 글씨를 거의 쓰지 못했고,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다는 기록이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방대한 분량의 일기가 존재했다면 측근 회고록 어딘가에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언급이 단 한 줄도 없었다.
두 번째 의문은 표지의 이니셜이었다. 사진을 본 한 독일 기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AH'(Adolf Hitler)여야 할 자리에 'FH'가 박혀 있었다. 위조꾼이 고딕체 A와 F를 혼동한 흔적이다. 이 우스꽝스러운 오류 하나만으로도 전 세계의 농담거리가 되기에 충분했다.
세 번째 균열은 진본 보증에서 왔다. 트레버-로퍼 본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4월 25일 이전, 그는 자료를 짧은 시간 동안만 검토했고, 슈테른이 보여준 '방대한 출처 자료'에 압도돼 진본 판정을 내렸다. 그러나 발표 직후 며칠 사이 그는 자신이 본 것이 너무 적었음을 깨달았다. 4월 말, 그는 '선데이 타임스'와 'BBC' 인터뷰에서 입장을 번복했다. 학자로서의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같은 시기 독일 연방기록원(Bundesarchiv)이 물리·화학 분석에 착수했다. 슈테른이 자체 검증을 졸속으로 끝낸 것과 달리, 연방기록원은 종이 섬유, 잉크 성분, 표지 재료를 본격적으로 분석했다.
결과는 5월 초 차례로 도착했다.
4. 풀리는 수수께끼
연방기록원의 보고서는 일기장을 한 항목씩 해체했다.
종이에는 1954년 이후에야 산업적으로 사용된 형광 표백제가 검출됐다. 일기가 1932~1945년에 쓰였다는 주장은 이 한 가지만으로 무너졌다. 잉크 분석은 문서가 작성된 지 수년 이내, 즉 1980년대 초반에 쓰였음을 보여줬다. 표지의 접착제, 제본 실, 라벨에 사용된 합성 섬유 — 모두 전후 제품이었다.
내용 분석도 처참했다. 일기 상당 부분이 역사학자 막스 도마루스가 1962년 편집한 히틀러 연설·포고문 모음집을 거의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었다. 더 결정적인 단서는 도마루스 책의 편집상 오류까지 일기에 그대로 전사돼 있다는 점이었다. 진짜 히틀러가 자기 연설에서 도마루스의 1962년 편집 오류를 미리 베껴 적을 수는 없다.
5월 6일, 연방기록원은 공식 발표했다. "명백한 위조." 모든 자료가 전후에 만들어졌고, 내용은 표절이며, 물증은 일관되게 위조를 가리켰다.
슈테른 강당의 샴페인 거품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발표일로부터 11일 만이었다.
곧이어 출처 추적이 시작됐다. 슈테른이 그렇게 보호하던 '동독 채널'은 단 한 사람으로 좁혀졌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나치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는 골동품상, 콘라트 쿠야우. 동독 출신으로 서독에 정착한 인물, 그리고 이미 나치 기념품 위조 판매 전력이 의심되던 인물이었다.
쿠야우는 처음 며칠간 부인했다. 그러나 압수 수사에서 결정적 증거가 나왔다. 그의 작업실에서 미완성 일기장 페이지, 차로 종이를 누렇게 만든 흔적, 위조 연습용 노트가 발견됐다. 그는 결국 자백했다. 일기장 60권 전체를 그가 혼자 썼다. 차를 묻혀 누렇게 만들고, 표지에 금속 이니셜을 붙이고, 도마루스 책을 베껴 적었다. 'AH'와 'FH'를 헷갈렸다.
쿠야우는 또 한 가지를 진술했다. 자신은 일기장을 슈테른의 한 기자에게 넘겼고, 회사가 지급한 돈의 상당 부분이 그 기자의 손에서 사라졌다는 것이다. 수사의 화살이 두 번째 인물을 향했다.
5. 두 번째 인물
게르트 하이데만(1931~2024)은 슈테른의 베테랑 기자였다. 1955년 입사 이후 거의 30년을 그곳에서 일했다. 우간다 독재자 이디 아민의 몰락을 현장 취재했고, 콩고 용병 전쟁과 중동 분쟁 지역을 누볐다. "위험한 곳에 보내면 이야기를 가져오는 집요한 추적자"가 그의 평판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부터 하이데만은 변해 있었다. 1973년 그는 헤르만 괴링이 소유했던 요트 '카린 II'를 사들였다. 복원에 막대한 빚을 졌고, 그 과정에서 옛 나치 인사들과 깊이 교류하기 시작했다. 괴링의 딸 에다 괴링과 연인 관계가 됐다. 친위대 장군 카를 볼프, 클라우스 바르비, 발터 라우프 — 전직 나치 고위 인사들을 사적으로 찾아다녔다. 일부 망명 나치 잔당 모임에 직접 참석했다. 그는 더 이상 나치를 취재하는 기자가 아니라, 나치 세계의 일부가 돼 있었다.
쿠야우와의 만남은 1979년경이었다. 수집가로서 그의 가게를 드나들던 하이데만이 일기장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슈테른 편집부에 가져갔다.
여기서 슈테른의 두 번째 결정적 실패가 일어났다. 경영진은 특종 누설을 막는다는 이유로 일기장의 존재를 극소수 인사만 알게 했다. 자료 입수, 출처 보호, 동독 측 접촉 — 이 모든 것을 하이데만 한 사람이 단독으로 전담했다. 다른 기자나 편집자는 출처를 직접 만날 수 없었다. 검증을 위한 필적 대조에 사용된 '진짜' 히틀러 샘플 중 일부가, 알고 보니 쿠야우가 예전에 위조해 팔아넘긴 것이었다. 위조품으로 위조품을 검증한 셈이었다.
수사가 진전되면서 하이데만의 진짜 역할이 드러났다. 슈테른이 지급한 930만 마르크 중 약 170만 마르크 이상이 그의 손에서 사라졌다. 부동산을 사고, 빚을 갚고, 더 많은 나치 유물을 사들이는 데 썼다. 그는 단순히 속아넘어간 기자가 아니었다. 의심의 신호를 의도적으로 외면하며 이득을 챙긴 적극적 가담자였다.
1985년 함부르크 법원은 두 사람을 사기죄로 기소했다. 쿠야우 4년 6개월, 하이데만 4년 8개월. 재판 내내 두 사람은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책임을 떠넘겼다. 누가 더 많이 가져갔는가, 누가 먼저 거짓말을 했는가. 결과는 동등한 유죄였다.
⚡ 6. 두 사람의 사기극
세기의 특종은 결국 두 사람의 작품이었다.
한 명은 슈투트가르트의 골동품상이었다. 정규 미술 교육도, 역사학 훈련도 받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은 대담함과 시대를 읽는 본능이었다. 동독이라는 블랙박스, 추락한 비행기라는 역사적 공백, 나치 유물 시장의 그늘 — 이 세 요소를 엮으면 어떤 위조품도 그럴듯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슈테른의 베테랑 기자였다. 그가 가진 것은 제도권 언론의 신뢰와 30년 경력이었다. 신참이 같은 이야기를 들고 갔다면 즉시 의심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만의 이름이 붙는 순간, 자료는 검증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었다.
이 둘이 만나지 않았다면 사기는 성립하지 않았다. 쿠야우 혼자였다면 그의 위조품은 슈투트가르트 뒷골목의 수집가 시장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이데만 혼자였다면 그의 나치 집착은 사적 일탈로 끝났을 것이다. 두 사람이 만나, 한 사람은 위조품을 만들고 다른 한 사람은 그것을 제도권 언론으로 운반하면서, 사기는 비로소 세기의 규모로 부풀어 올랐다.
뒷이야기는 길지 않다. 슈테른 편집장 두 명이 사임했다. 잡지의 신뢰도가 회복되는 데 수년이 걸렸다. 트레버-로퍼는 학자로서의 명성에 영구적 흠집을 안고 살다 2003년 사망했다. 쿠야우는 출소 후 자기 위조품을 '쿠야우 위조작'이라며 공공연히 팔아 또 다른 명성을 얻었고, TV 토크쇼 단골이 됐다가 2000년 사망했다. 그가 죽은 뒤에는 '쿠야우 위조작'을 위조하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위조의 위조라는 기이한 유산이다.
하이데만은 주류 언론에 복귀하지 못했다. 수십 년간 결백을 주장했고, 한때는 슈타지 음모론까지 꺼냈지만 누구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말년의 그는 함부르크의 작은 아파트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자신이 모은 나치 관련 문서 더미에 둘러싸여 있었다. 2024년 12월 93세로 사망했다. 부고 기사들은 그를 "한때 유능한 탐사 기자였으나 자기가 추적하던 어둠에 스스로 삼켜진 사람"으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