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About)

"안녕하세요" History Diary 365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를 매일 기록하는 공간입니다. 🏛️ 매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여, 그날의 강렬했던 기억과 교과서 밖 생생한 역사적 순간들을 조명합니다. ⏳ 모든 글은 직접 탐구한 문헌과 서적 등 객관적인 사실(Fact)을 바탕으로 작성되며 📜,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는 깊이 있는 시선을 지향합니다. 문의나 제안, 혹은 궁금한 역사가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 📧 Email: historydesign00@gmail.com

2026년 9월 28일 월요일

🏠 7월 7일, 메리 서랫 하숙집의 과부, 865년

🏠 하숙집

메리 서랫은 워싱턴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던 과부였다. 남편을 잃고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방을 세놓아 생계를 이었다.

그 집에는 아들 존의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젊은 남자들이 아들을 찾아와 방에 모이곤 했다. 어머니는 이따금 그들의 부탁으로 심부름을 했다. 한 번은 아들의 친구가 건넨 꾸러미를 시골 여관에 전해 주었다. 배우라는 그 친구의 이름은 존 윌크스 부스였다.

그녀는 몰랐다. 아들의 손님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 나라를 뒤집은 밤

1865년 4월 14일 밤,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포드 극장에서 부스가 링컨 대통령의 뒤통수를 쏘았다. 그날 밤의 표적은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다른 공모자가 국무장관 수어드의 집에 침입해 그의 목을 칼로 찔렀다. 부통령마저 노려졌다. 연방 정부의 지휘부를 하룻밤에 쓸어버리려는 음모였다.

아들의 손님들은, 평범한 손님이 아니었다.

🚪 모른다고 말했다

이틀 뒤 밤, 수사관들이 하숙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이 메리 서랫을 체포하려던 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곡괭이를 든 남자가 인부 차림으로 서 있었다. 배수로를 파러 왔다고 했다. 그는 이틀 전 밤 수어드의 목을 칼로 찌른 바로 그 공모자, 루이스 파월이었다.

수사관이 물었다. 이 사람을 아느냐고.

겁에 질린 여주인은 답했다. "하느님 앞에 맹세코, 저는 이 사람을 모릅니다. 본 적도 없습니다."

그 한마디가 그녀의 목을 조였다. 암살범 중 하나가 하필 그녀의 문 앞에 나타났고, 그녀는 그를 모른다고 했다. 수사관들에게 그것은 거짓말로 보였다.

⚖️ 군사재판

메리 서랫은 민간 법원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섰다. 그를 옭아맨 증거는 대부분 정황이었다.

검찰의 결정적 증인은 존 로이드였다. 그는 메리가 워싱턴 인근에 소유한 선술집을 빌려 운영하던 사람으로, 암살 당일 존 부스 일당이 그곳에 들러 미리 숨겨둔 총과 물품을 챙겨 달아났다고 증언했다. 메리가 그날 낮 그 술집에 들러 "물건을 준비해 두라"는 말을 전했다는 것이 검찰 논리의 핵심 고리였다. 그러나 로이드는 이름난 애주가였고, 체포될 당시에도 술에 취해 있었으며, 증언한 내용 역시 술기운 속에서 오간 대화라는 점이 변호인 측에서 거듭 지적되었다. 목숨이 걸린 증언의 신빙성이 그만큼 흔들렸던 것이다.

함께 처형될 파월은 처형대에서 "메리 서랫은 무죄"라고 말했다. 진짜 가담자 중 하나가 그녀의 무고를 증언한 것이다.

재판부의 판사 아홉 중 다섯이 그녀의 나이와 성별을 이유로 감형을 청원했다. 그러나 그 청원은 처형 이틀 전에야 대통령에게 전해졌고, 존슨 대통령은 사형에는 서명하고 감형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 7월 7일

1865년 7월 7일 오늘 오후, 네 명이 교수대에 올랐다. 그중 하나가 메리 서랫이었다.

교수대에서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제발 저를 떨어뜨리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그녀는 미국 연방 정부가 처형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오래 없던 일이었다.

🚪 그리고 아들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아들 존 서랫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암살 직후 캐나다로, 다시 유럽으로 달아났다. 어머니가 붙잡혀 재판을 받고 교수대에 오르는 동안, 그는 이집트에 숨어 있었다. 이듬해 붙잡혔지만, 그는 군사법정이 아니라 민간 법정에서 재판받았다. 배심원단의 의견은 갈렸고, 그는 풀려났다. 다시 기소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죽고, 아들은 살았다.

링컨의 죽음으로 두 여인이 남았다. 남편을 잃고 슬픔 속에 여생을 보낸 영부인 메리 토드 링컨, 그리고 교수대에 오른 하숙집 과부 메리 서랫. 두 사람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같았다.

2026년 9월 25일 금요일

7월 6일, 저항의 시인 신석정

'이 밤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중략

어머니...

밤이 왔습니다.

그 검고 무서운 밤이 또 왔습니다.

...

태양이 가고

...

어둠은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까지도 먹칠하였습니다.

어머니

...

옛이야기나 하나 들려 주세요.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1907년 여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시절, 일본인 교사가 수업료를 내지 못한 여학생을 학대하자, 아이는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동했다. 무기정학을 당했다.

일제에 맞선 첫 지조였다.

1931년 《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 지조는 시로도 굽히지 않았다.


'방(房)'

세상이 뒤집어졌었다는 그리고 뒤집어지리라는 이야기는 모두 좁은 방에서 비롯했단다.

...

그 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

새로운 세대가 오리라는

새로운 세대가 오리라는

그 막막한 이야기는 바다 같이 터져나올 듯한 울분을 짓씹는 젊은 '인사로푸'들이 껴안은 질화로 갓에서 동백꽃보다 붉게 피었다.

천년이 지나갔다.

좁은 방에서.

만년이 지나갔다.

좁은 방에서.


탄압은 거세졌다. 1939년 이 시 '방(房)'으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

난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 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1940년 '문장'에 투고한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는 아예 검열로 삭제됐다. '문장'은 곧 폐간됐다.

일본어 원고 청탁에 단호히 거절하며 절필을 선언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경찰서의 출두명령엔 피신했다.

그렇게 광복을 맞았다.

발표 없이 쓰기만 했던 시들이 해방을 맞았다.


'슬픈구조'

...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광복 직후, 새나라 문학 건설을 도모했다. 교직 생활과 함께 해방 직후의 불안한 상황을 '서른 여섯 해'의 어둠으로 노래했다.


'꽃덤불'

...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

겨울의 달이 아직도 차거니

...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광복 이후, 그는 독재 앞에서도 저항했다.

교사들이 '교원노조' 설립을 요구하며 국회 의사당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그는 시로써 응원했다.


'단식의 노래'

-싸우는 교육동지들에게-

배고픈 사람들끼리
주저앉고 쓰러진 채
서로서로 얼굴을 본다
눈이 눈을 본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진다

...

우리들의 것을 찾기 위하여
이웃들의 것을 찾기 위하여
다시는 不義와 不正에 지지 않기 위하여

...

同志여! 그 거룩한 손을 잡고
울어도 좋다!
...
우리의 民主學園을 위해서…


그는 이 시를 썼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며칠의 취조 끝에 풀려났다.

그러나 그의 독재에 대한 저항은 굽히지 않았다.


'영구차의 역사'


강물 같은 밤을

잉태한 촛불 아래

분향焚香이 끝난

다음,

영구차靈柩車는 다락 같은 말에 이끌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

목메어 우는 소녀를 보았다.

...

그것은 아버지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웃들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

그 어느 별을 지나갔을 나의 외로운 영구차였는지도 모른다.

촛불이 흔들리는 강물 같은 밤에……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혹독한 취조를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뒤 문학상 심사를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1974년 7월 6일 오늘,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


시인 신석정. 그의 이름은 잊히지 않았다. 

오랫동안 목가 시인으로만 읽히던 그를, 뒷사람들은 저항 시인으로 다시 불렀다.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 7월 5일, 울산 무노조 왕국이 뚫린 날

✊ 6월, 그 뒤

1987년 6월, 시민들의 항쟁이 군사정권을 물러서게 했다.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약속되었다. 그러나 6·29 이후의 정치 지형에서도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 요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화의 공간이 열리자, 그 요구를 자기 손으로 들고 나온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 병영 같은 공장

당시 공장은 군대처럼 통제되었다. 노동자들은 휴일도 없이 하루 12시간 넘게 일했다. 한 시간 일찍 나와 현장을 청소하고 군대식 체조를 했으며, 점심시간에도 일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 일일이 기록되었고, 물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했다.

정문에서는 두발 검사를 받았다. 머리가 길면 그 자리에서 잘렸다. 관리자는 나이 많은 노동자에게도 반말을 했다. 반장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정강이를 걷어차이는 일이 있었고, 고위 간부의 차가 지나갈 때 담배를 끄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는 일도 있었다. 인사 고과와 상여금은 차별의 수단이 되었다.

공장 밖에서 이들은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며 천대받았다.

🙏 소박한 요구

1987년 여름, 울산의 노동자들이 회사에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스물한 개 항목이었다. 그 첫째와 둘째는 이러했다. "머리를 기르게 해 달라." "출퇴근할 때만이라도 사복을 입게 해 달라." 공장 밖에서만이라도 천대받는 신분을 감추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노조를 만들 권리도, 파업할 권리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요구를 관철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그렇게 노조가 태어났다

현대에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 자체가 금기였다. 창업주 정주영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 된다"고 할 만큼 노조를 완강히 반대했고, 그전까지 노조를 세우려는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회사는 스스로를 '무노조 왕국'이라 불렀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회사의 눈을 피해야 했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울산 옥교동의 한 디스코텍에 몰래 모여 노동조합 결성 대회를 열었다. 초대 위원장은 현대엔진의 노동자 권용목이었다.

'무노조 왕국'의 벽이 처음으로 뚫렸다. 그렇게 노동조합이 태어났다.

🔥 전국으로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로 노조 결성이 이어졌다. 다급해진 현대는 계열사에 서둘러 어용노조를 만들어 민주노조 결성을 막으려 했다. 그럼에도 흐름은 울산을 넘어 부산, 마산, 창원, 거제로, 다시 전국으로 번졌다.

7월부터 9월까지 벌어진 노동쟁의는 3,341건이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기간 전체의 쟁의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고, 그중 76%가 노조가 없던 중소 사업장에서 일어났다. 그해가 저물 무렵 노동조합은 2,675개에서 4,103개로, 조합원은 약 104만 명에서 127만 명으로 늘었다.

8월 중순, 울산의 현대 노동자 6만여 명은 중장비를 앞세우고 가족과 함께 도심을 행진했다. 전투경찰이 물러섰다. 8월 말부터 정권은 강경 진압으로 돌아섰지만,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 그날

그리고 오늘, 이한열이 끝내 숨졌다.

2026년 9월 16일 수요일

7월 4일, 뉴욕 노예해방

🇺🇸 건국, 그러나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하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밝혔다.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노예제는 남부와 북부 모두에서 이어졌다.

뉴욕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노예제는 약 200년간 존속했다. 1626년 네덜란드인이 처음 노예를 들여왔고, 영국 지배 아래 규모가 커졌다. 1790년 뉴욕의 노예는 2만 1천 명이 넘어, 북부에서 가장 많았다.

폐지는 단번에 이뤄지지 않았다. 1799년 법은 그 뒤에 태어난 아이들만, 그것도 오랜 의무 노동을 마친 뒤에야 풀어주었다. 1817년 법이 마지막 해방일을 1827년 7월 4일로 정했다.

⛓️ 1827년 7월 4일

그렇게 이날, 뉴욕주에서 노예제가 법으로 완전히 끝났다. 약 4,600명이 자유인이 되었다. 뉴욕은 노예제 전면 폐지법을 통과시킨 첫 주였고, 남북전쟁 이전 북미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해방이었다.

해방일이 7월 4일이 된 것은 10년 전 법이 그렇게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하필 나라의 독립기념일과 같은 날이었다.

📅 하루 뒤에

정작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그날을 축하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술 취한 백인들이 독립기념일을 즐기다 벌이는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시끄러운 그날 대신 자신들만의 날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튿날인 7월 5일, 약 4,000명이 브로드웨이를 행진해 아프리칸 시온 교회에 모였다. 그곳에서 흑인 노예제 폐지 운동가 윌리엄 해밀턴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쓰라린 속박에서 벗어나 구원받았다."

이 '7월 5일' 기념은 그 뒤로도 수십 년간 이어졌다. 25년 뒤, 탈주 노예 출신의 노예제 폐지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유명한 연설 "노예에게 7월 4일은 무엇인가"도 7월 5일에 나왔다. 미국이 자유를 기념하는 그날을 노예의 눈으로 되물으며, 나라의 이상과 노예제라는 현실의 모순을 정면으로 고발한 연설이었다.

🎙️ 오늘날

'7월 5일'을 기념하는 전통은 남북전쟁 이후 대체로 사그라들었고, 노예해방을 기리는 날의 자리는 오늘날 6월 19일 준틴스로 옮겨갔다. 다만 더글러스의 그 연설은 지금도 해마다 7월 5일에 낭독된다. 워싱턴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는 국립공원관리청이 매년 참석자들과 함께 연설 전문을 소리 내어 읽는다.

2026년 9월 14일 월요일

✈️ 7월 3일, 이란 항공 655편 사과하지 않은 격추

🌊 화약고가 된 만

1979년 혁명으로 국교가 끊긴 뒤, 미국과 이란은 서로를 적으로 여겼다. 1988년의 이란은 이라크와 벌인 전쟁의 8년째를 보내고 있었다. 두 나라는 페르시아만에서 서로의 유조선을 공격하며 상대의 숨통을 조였고, 사람들은 이 국면을 탱커 전쟁이라 불렀다.

미국은 겉으로 중립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이라크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이란에 몰래 무기를 팔았다. 1987년부터는 자국 국기를 새로 단 쿠웨이트 유조선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만 안에 대규모 함대를 상주시켰는데, 이란은 이를 명백한 적대 행위로 받아들였다.

긴장은 곧 직접 충돌로 번졌다. 그해 4월, 유조선을 호위하던 미 군함이 이란이 부설한 기뢰에 부딪혀 선체가 크게 찢겼다. 나흘 만에 미국은 보복에 나섰고, 단 몇 시간 만에 이란 해군의 가동 전력 절반을 파괴했다. 그 바다 위로 여객기 한 대가 날아오른 것은 그로부터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 7월 3일, 7분

7월 3일 오늘 아침, 이란 남부 반다르아바스 공항에서 여객기 한 대가 이륙했다. 두바이로 향하는 655편이었고, 28분이면 닿는 짧은 노선이었다.

바로 그 시각, 미 순양함 빈센스호는 이란 고속정들과 총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교전에 쫓기던 배는 어느새 이란 영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레이더에 상승하는 항적 하나가 잡히자, 승무원들은 그것을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F-14 전투기라고 판단했다.

실제로는 여객기였다. 민간용 식별 신호를 내보내며 정해진 항로를 따라 천천히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 빈센스호는 미사일 두 발을 쏘았다. 이란의 민간 655편이 이륙한 지 7분 만이었다.

탑승객 290명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가운데 66명이 어린이였고, 여섯 나라의 국적을 가진 이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 빗나간 발표

사건 직후 미국이 내놓은 설명은 분명했다. 여객기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며 배를 향해 곧장 날아왔고, 민간 항로를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두 달 뒤에 나온 국방부 보고서는 그 설명을 대부분 뒤집었다. 여객기는 하강한 적이 없었다. 정해진 항로 안에서 천천히 상승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보고서는 빈센스호의 장교들에게 잘못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미국 대표로 선 사람은 부통령 조지 부시였다. 대선 유세가 한창이던 그는 격추를 정당한 대응이라 옹호하며, 사실이 어떻든 미국을 위해 사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 훈장

2년이 지나, 미 해군은 빈센스호의 함장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페르시아만에서 보인 뛰어난 복무가 이유라고 했다. 리전 오브 메리트라 불리는 그 훈장의 표창장 어디에도, 그가 격추한 여객기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 655

이란은 미국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세웠다. 소송은 여러 해를 끌다가 1996년에야 합의에 이르렀다. 미국은 "깊은 유감"을 표하고 희생자 한 사람당 약 21만 달러의 배상금을 냈지만, 끝내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 태도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이란에서는 해마다 그날을 기린다. 그리고 이란 항공은 여전히 테헤란과 두바이를 잇는 그 노선에 655라는 편명을 붙인다. 

"그리고 2026년, 미국과 이란은 그 격추가 일어난 바로 그 바다에서 다시 전쟁을 벌이고 있다."

2026년 9월 10일 목요일

🖤 7월 2일, 덴마크 비지, 죽지 않는 생각

🎟️ 복권으로 산 자유

덴마크 비지는 1767년 무렵 카리브해 세인트토머스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이름은 텔레마크였다. 열네 살 무렵 노예상 선장 조지프 비지에게 팔려 그의 성을 따랐고, 여러 항해 끝에 찰스턴에 정착했다. 1799년, 길거리 복권에 당첨된 그는 그 돈으로 자기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샀다. 그러나 그는 아내는 사지 못했다. 비지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아내와 자식들은 사슬 안에 남았다.

⛪ 교회를 세우다

목수로 일하며 그는 노예제 폐지를 다룬 글을 읽었고,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스스로 세운 나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1816년 무렵 찰스턴에 독립 흑인 교회를 여러 흑인들과 함께 창립했다. 신도는 1,800명을 넘었다. 당국은 이 교회를 거듭 단속했다.

⚔️ 최대 봉기의 계획

결국 그는 봉기를 계획했다. 도시와 인근 농장의 흑인 수백에서 수천 명이 가담하기로 했다. 계획은 이랬다. 시내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확보하고, 노예주들을 제압한 뒤 도시를 장악하고, 배를 타고 아이티로 향한다. 거사일은 1822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잡혔다.

당시 훅인 봉기중 역대 최대의 계획이었다.

🔍 밀고와 수색

계획은 안에서 새어 나갔다. 봉기에 반대한 노예 몇 사람이 주인에게 밀고했다. 소문이 번지자 비지는 거사일을 앞당겼다. 그러나 6월, 그의 이름이 주모자로 지목되었고 찰스턴 일대에 이틀에 걸친 수색이 벌어졌다. 그는 자유를 얻지 못한 아내의 집에 숨어 있다 붙잡혔다.

⚖️ 미리 쓰인 판결

찰스턴 노역소에 갇힌 그를 비밀리에 꾸려진 특별 법정이 심리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고 대부분 전해 들은 말이었다. 피고들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문은 이미 쓰여 있었다. 역사가에 따르면, 이미 정해진 판결이 낭독되자 비지는 봉기의 과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답했다. 자신을 목매달 수는 있어도 그 생각까지 죽일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 1822년 7월 2일

1822년 7월 2일 오늘, 덴마크 비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와 함께 연루된 서른네 명이 처형되었고, 더 많은 이들이 유죄를 받거나 추방되었다. 얼마 뒤 그가 세운 교회는 백인 당국에 의해 불에 탔다. 모든 흑인 교회는 금지됐다. 이때부터 신도들은 공개된 예배당 없이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30년간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올렸다.

🧱 다시 세워진 교회

남북전쟁이 끝나자 신도들이 정식으로 재조직하고 '이매뉴얼'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캘훈가 자리에 2층 목조 교회를 세웠다.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덴마크 비지의 아들 로버트 비지였고, 흑인 노동자들이 직접 지었다. 목조 건물이었고 얼마 뒤 지진으로 붕괴됐다. 1891년, 지금의 고딕 리바이벌 양식의 벽돌 건물이 완공되었다.

🖤 193년 뒤, 현재

그리고 2015년 6월, 스물한 살의 백인 남성이 바로 그 이매뉴얼 AME 교회에 들어가 한 시간가량 성경 공부에 함께 앉아 있다가 아홉 명을 총으로 살해했다. 희생된 아홉 명 중에는 담임목사이자 주 상원의원이던 클레멘타 핑크니도 있었다. 다시 벌어진 인종 증오의 폭력은 이렇게 193년간 이어졌다.


출처: 하워드 진의 《살아 있는 미국 역사》

2026년 8월 31일 월요일

☢️ 7월 1일, 비키니 환초와 비키니 수영복

🌊 떠나라는 통보

1946년 2월, 미 해군 준장 벤 와이엇은 비키니 환초 주민들을 불러 모아 섬을 떠나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일이 "인류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 지도자 유다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달렸다는 말로 답했다. 그해 3월 7일, 167명의 주민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섬을 떠나 롱게리크 환초로 옮겨졌다. 그들은 이주가 일시적이라고 들었다.

☢️ 7월 1일

1946년 7월 1일 오늘 아침, 비키니 환초의 석호에는 낡은 군함 90여 척이 표적으로 떠 있었다. 그중에는 전쟁에서 노획한 일본과 독일의 전함도 있었다. 미군은 이 함대 상공에서 나가사키에 쓴 것과 같은 종류의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크로스로즈 작전의 첫 실험, 암호명 '에이블'이었다.

미국은 이미 한 해 전에 폭탄을 실전에 두 번 썼고, 그전에 시험으로도 성공을 확인한 뒤였다. 그래서 이 실험의 목적은 폭탄의 성능 확인이 아니었다. 원폭이 군함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재보는 것, 그리고 원자력 시대에 해군이 여전히 쓸모 있는지를 두고 벌어진 군 내부의 다툼을 가리는 것이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때와 달리 이 실험에는 대규모 언론과 외국 참관인이 입회했다. 냉전이 시작되던 시점의 공개된 힘의 과시이기도 했다.

에이블의 폭탄은 표적을 크게 빗나가 다섯 척만 가라앉혔다. 해군은 안도했다. 그러나 표적함에 실어둔 돼지와 염소, 쥐들은 빗나간 폭발에도 상당수가 방사선으로 죽거나 병들었다. 눈에 보이는 폭풍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방사선이 진짜 위협이었다.

🏝️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7월 25일, 두 번째 실험 '베이커'가 물속에서 이어졌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비키니 환초에서는 스물세 차례의 핵실험이 이루어졌다. 롱게리크로 옮겨진 주민들은 곧 식량과 물이 부족해졌고, 이후 다시 다른 섬으로 옮겨졌다. 일시적이라던 이주는 끝나지 않았다. 방사능 오염으로 섬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 이름의 여행

1946년 7월 5일, 첫 실험 나흘 뒤, 프랑스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는 파리의 한 수영장에서 두 조각짜리 수영복을 선보였다. 그는 이 옷을 '비키니'라고 불렀다. 며칠 전 보도된 그 핵실험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노린 이름이었다. 정식 모델들이 착용을 거부하자, 무용수 미슐린 베르나르디니가 대신 입고 무대에 섰다. 경쟁하던 디자이너 자크 앵은 비슷한 시기에 조금 더 큰 수영복을 내놓으며 '아톰(원자)'이라 불렀다.

섬에서 사람들이 쫓겨나고 땅이 오염되던 그해 여름, 그 섬의 이름은 지구 반대편에서 여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 그 후

비키니 환초는 오늘날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다. 원주민과 그 후손들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킬리섬과 마주로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정착한 킬리섬마저 해수면 상승과 강한 폭풍으로 살기 어려워졌다. 핵실험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이제는 기후위기로 두 번째 삶터마저 잃을 처지에 놓였다.

2026년 8월 27일 목요일

🌍 6월 30일, 콩고 독립 선언식에서의 연설

🌍 배경 — 레오폴드의 콩고

콩고는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식민 지배를 받은 곳 중 하나였다. 

1885년부터 1908년까지,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소유지였다. 나라가 아니라 왕 한 사람의 재산이었다. 레오폴드는 고무를 원했다. 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콩고인의 손목은 잘려 나갔다. 

콩고 원주민 인구가 이 시기에 절반으로 줄었다는 추산이 있다. 

1908년 국제 여론의 압박으로 레오폴드가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넘겼고, 이후 1960년까지 벨기에의 식민지가 됐다.

📮 루뭄바 — 우체국 직원에서 총리까지

파트리스 루뭄바는 1925년생으로, 우체국 직원이자 맥주 회사 영업 사원이었다. 

1958년 콩고민족운동(MNC)을 창설해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1959년 반식민 봉기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갔으나, 오히려 감옥에서 더 유명해졌다. 1960년 5월 콩고 최초의 의회 선거에서 그의 당이 의석 과반을 차지했고, 루뭄바가 콩고 최초의 민선 총리가 됐다. 서른다섯이었다.

🎙️ 세 개의 연설

1960년 6월 30일 오늘, 독립 선언식이 열렸다.

먼저 벨기에 왕 보두앵이 연설했다. 그는 레오폴드 2세가 "천재적인 구상으로 시작한 문명화 사업의 결실"이 콩고 독립이라고 했다. 손목을 자른 왕의 업적을 칭송한 것이었다.

다음은 대통령 카사부부가 예정된 온건한 연설을 했다.

그때 루뭄바가 일어섰다. 그의 연설은 예정에 없었다. 벨기에 왕과 외교관들 앞에서 그는 지난 75년을 말했다.

"우리는 새벽부터 밤까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온 조롱과 모욕과 구타를 잊지 않는다. 우리의 상처는 너무 깊고 아직 쓰라리다."

보두앵 왕이 자리를 떴다. 미국 대사관은 워싱턴에 보고서를 올렸다. 위험한 선동가.

훗날 분석가들은 말했다. 루뭄바의 죽음은 그날 연설에서 시작됐다.

🛢️ 24조 달러

콩고의 땅 아래에는 구리, 코발트, 우라늄,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광물 자원 가치가 24조 달러로 추산됐다.

독립 직후 벨기에의 지원을 받은 카탕가주가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광산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루뭄바는 미국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순간 냉전의 논리가 작동했다. 워싱턴은 그를 "아프리카의 피델 카스트로"라 불렀다.

1960년 8월 26일, CIA 국장 앨런 덜레스가 콩고 현지 요원에게 전보를 보냈다. 루뭄바의 제거는 긴급하고 최우선적인 목표다.

🔫 6개월

1960년 9월, 루뭄바와 함께 일하던 군 총사령관 모부투가 CIA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루뭄바는 총리직에서 쫓겨났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다.

공항에 도착하는 그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손이 뒤로 묶인 채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진이 전 세계에 퍼졌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현장에 있었으나 개입하지 않았다.

1961년 1월 17일, 루뭄바와 두 명의 동료가 카탕가주로 이송됐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구타당했다. 도착 후 벨기에 장교들의 감독 아래 몇 시간을 더 맞았다. 그날 밤 총살됐다. 여전히 서른다섯이었다.

🦷 치아 하나

시신은 땅에 묻혔다가 파내어졌다. 벨기에 경찰관 제라르 소에테의 지휘 아래 황산에 녹여 없앴다. 소에테는 훗날 자랑스럽게 이 일을 증언했다. 루뭄바의 치아 두 개를 기념품으로 챙겼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 금관이 씌워진 치아 하나가 소에테의 딸에게서 벨기에 정부로 넘어갔다.

2022년, 벨기에 정부가 그 치아를 루뭄바의 가족에게 공식 반환했다. 처형된 지 61년 만이었다. 콩고에 돌아온 루뭄바의 흔적은 치아 하나뿐이였다.

🌑 지금

루뭄바를 제거한 모부투는 이후 32년간 콩고를 통치했다. 2001년 벨기에 의회 조사위원회가 루뭄바 암살에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고, 2002년 공식 사과했다. 형사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다.

2026년 현재, 벨기에 법원이 94세의 전직 외교관 에티엔 다비뇽을 루뭄바 불법 억류와 모욕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65년 만에 처음으로 관련자가 법정에 선다.

루뭄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라 불렸다. 콩고의 부는 콩고에 남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26년 8월 19일 수요일

🔨 6월 29일, 복권 같은 사형 제도

 

⚖️ 복권 같은 사형

미국의 사형제도는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졌다. 독립 이후에도 각 주가 독자적으로 운영했고,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연간 150건 이상 집행되며 정점을 찍었다.

문제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었다. 배심원단이 알아서 결정했다. 법에 "이런 경우엔 사형, 이런 경우엔 징역"이라는 기준이 없었다. 같은 살인 사건인데 피고가 백인이면 징역, 흑인이면 사형이었다. 같은 강간 사건인데 돈이 있으면 징역, 가난하면 사형이었다. 어떤 날 어떤 배심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목숨이 갈렸다.

강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90퍼센트가 흑인이었다. 살인 사건에서도 피고가 흑인이고 피해자가 백인일 때 사형 선고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법관 스튜어트는 훗날 이렇게 썼다. 사형이 이 피고들에게 내려진 것은, 벼락을 맞는 것만큼이나 자의적이다.

🔨 1966~1972년

1960년대 들어 흑인 민권 운동이 고조되면서, NAACP(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 법률방어기금이 전국의 사형 집행을 법적으로 막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수백 건의 집행을 정지시키는 데 성공했고, 1966년부터 1972년까지 6년간 미국에서 단 한 건의 사형도 집행되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사형 집행 공백기였다.

그리고 1972년 6월 29일이 왔다.

🔨 판결

미국 연방대법원이 5 대 4로 판결했다. 사형은 수정헌법 8조, 즉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금지하는 조항에 위반된다.

629명의 사형수 형량이 그날 모두 종신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판결의 이유가 문제였다. 9명의 대법관이 모두 별도의 의견서를 썼다. 사형 자체가 위헌이라고 본 대법관은 둘뿐이었다. 나머지 세 명의 다수 의견은 사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지금 방식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가 복권처럼 결정되는 방식이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제도를 고치면 된다는 여지를 남겼다.

🔄 37개 주의 반격

37개 주가 즉각 법을 고쳤다. 이번엔 기준을 명시했다. 배심원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가중 요소(잔인한 방법, 다수 피해자 등)와 감경 요소(초범, 정신장애 등)를 법에 적고 그것을 따라 결정하도록 했다. 자의적이지 않게 만든 것이다.

1976년, 대법원은 개정된 조지아 사형법을 7 대 2로 합헌이라 판단했다. 사형 집행이 재개됐다.

🌑 남은 것

사형을 막으려 한 판결이, 사형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미국 27개 주와 연방정부가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사형 대기 중인 사람은 2,414명이다. 미국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 중 사형제를 유지하는 유일한 나라다.

629명이 살았던 그 4년은, 4년으로 끝났다.

🗳️ 6월 29일,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 체육관 선거

1972년 이후, 한국 대통령은 체육관에서 뽑혔다. 국민이 아니라 선거인단이 뽑았다. 1980년, 1981년, 1984년. 장충체육관에서 세 차례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국민은 구경만 했다.

1979년 박정희가 죽자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았다.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에게 군을 보냈다. 수백 명이 죽었다. 전두환은 그해 대통령이 됐다.

📋 4·13 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 임기 내에 개헌은 없다. 현행 헌법대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다. 체육관 선거를 유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해 1월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물고문으로 죽었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다. 5월, 사건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분노가 끓었다.

🌊 6월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쓰러졌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부산에서 30만 명이 모였다. 이태춘이 최루탄에 맞아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행진했다.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시민들이 원한 것은 단순했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었다.

🎙️ 1987년 6월 29일

열흘이 지나지 않아 정권은 무릎을 꿇었다.

경찰력으로는 막을 수 없었고, 군을 투입하면 광주가 반복될 것이었다. 6월 29일, 차기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 정치범을 석방한다. 김대중을 사면·복권한다. 언론 자유를 보장한다. 8개 항이었다.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모든 공직을 사퇴하겠다고 했다. 전두환도 수용 담화를 발표했다. 1972년 유신 이후 15년 만에 직선제가 돌아왔다.

그리고 엿새 뒤, 27일간 의식불명이었던 이한열이 숨졌다. 7월 9일 장례식에 100만 명이 모였다. 그것으로 6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 아쉬운 결말

10월 27일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

12월 16일, 마침내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1972년 이후 15년 만의 직접선거였다. 야권의 김영삼과 김대중은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다. 노태우가 36.6%로 당선됐다.

직선제를 쟁취한 선거에서, 직선제를 선언한 후보가 이겼다. 거리를 메웠던 400만 명의 함성은 분열된 표 앞에서 흩어졌다. 체육관 선거는 끝났으나, 정권은 바뀌지 않았다.

🏳️‍🌈 6월 28일, 뉴욕 스톤월 — 1969년

 

🚨 새벽 2시

1969년 6월 28일 새벽 2시, 뉴욕 경찰이 그리니치빌리지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53번지 스톤월 인을 급습했다. 게이 바 단속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있던 일이었다. 손님들은 순순히 나와 기다렸다.

그런데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여장한 사람들을 화장실로 끌고 가 성별을 확인했다. 수갑이 너무 꽉 조인다고 항의하는 손님을 경찰이 거칠게 다루는 것을 군중이 목격했다. 동전이 날아들었다. 병이 날아들었다. 경찰차 타이어가 펑크났다.

기동대가 새벽 4시를 넘겨서야 진압했다.

🔥 엿새

다음 날 밤, 스톤월 인이 다시 문을 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경찰이 다시 왔다. 구타와 최루 가스가 뒤따랐다. 그래도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이후 엿새 동안 크리스토퍼 스트리트는 비워지지 않았다.

스톤월 이전에도 게이 바 단속은 있었다. 스톤월이 달랐던 것은 처음으로 맞섰다는 것이었다.

당시 뉴욕에서 동성 간 성적 접촉은 불법이었다. 여장은 불법이었다. 술집이 동성애자에게 술을 파는 것도 불법이었다. 법이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었고, 경찰은 그 법을 집행했다.

🏳️‍🌈 1주년

1970년 6월 27일, 시카고에서 150명이 거리로 나왔다. 미국 최초의 프라이드 행진이었다. 다음 날 6월 28일, 뉴욕에서 수천 명이 스톤월 인에서 출발해 센트럴 파크까지 행진했다. 같은 날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행진이 열렸다.

공식 구호는 이랬다. "크게 말해라, 게이는 자랑스럽다."

이후 행진은 매년 6월 마지막 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다. 그 시작은 스톤월이었고, 날짜는 6월 28일이었다.

🍺 지금의 스톤월 인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53번지, 스톤월 인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지금도 게이 바로 영업 중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은 오후 2시에 문을 열고 새벽 4시에 닫는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이 건물을 국가 기념물로 지정했다. 2024년 6월 28일, 55주년 기념일에 스톤월 국가 기념물 방문자 센터가 문을 열었다.

2026년 2월 9일, 트럼프 행정부의 지침에 따라 국립공원청이 기념물의 무지개 깃발을 내렸다. 사흘 뒤, 지역 주민들이 모여 깃발을 다시 올렸다. 깃발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1969년 경찰이 문을 닫으려 했다. 닫히지 않았다.


San francisco 프라이드 퍼레이드(2022년 6월 26일)


6월 27일, 세계 법정에 선 초강대국

 

🕳️ 의회가 끊은 자금

1979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소모사 독재를 무너뜨리고 니카라과의 정권을 잡았다. 미국은 이에 맞서는 반정부 무장단체 콘트라를 지원했다. 미 의회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볼런드 수정안(Boland Amendment)을 잇달아 통과시켜, 니카라과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한 콘트라 지원에 연방 예산을 쓰는 것을 금지했다. 1984년 10월 서명된 수정안은 군사·준군사 활동 자금을 전면 차단했다. 그럼에도 미 중앙정보국(CIA)은 1984년 초 니카라과 항구 세 곳에 기뢰를 부설했다.

⚖️ 작은 나라가 제기한 소송

1984년 4월 9일, 니카라과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미국을 제소했다. 미국이 콘트라를 지원하고 니카라과 항구에 기뢰를 부설했다는 것이 소송의 내용이었다. 니카라과는 소송과 동시에 잠정조치를 요청했다.

🚪 재판을 떠난 피고

1984년 11월 26일, 재판소는 관할권이 있으며 니카라과의 소송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미국은 1985년 1월 18일, 더 이상 이 사건의 절차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심리는 피고인 미국이 불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 1986년 6월 27일의 판결

재판소는 미국이 무력 사용 금지, 타국 내정 불간섭, 타국 주권 존중, 평화적 해상 통상 방해 금지라는 관습국제법상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콘트라 지원과 항구 기뢰 부설이 그 근거였다. 재판소는 미국이 주장한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소는 미국이 모든 위반 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니카라과에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했다.

✈️ 격추된 보급기

판결로 콘트라 지원이 국제법 위반으로 확인된 뒤에도, 콘트라에 무기를 나르는 비밀 비행은 계속되었다. 1986년 10월 5일, 코스타리카 국경에 가까운 니카라과 남부 상공에서 열아홉 살의 산디니스타 병사가 어깨에 멘 지대공 미사일로 미국의 C-123 수송기 한 대를 격추했다. 기내에는 AK-47 소총과 탄약, RPG 유탄발사기 등 콘트라에 전달할 무기가 실려 있었다. 조종사 등 세 명이 사망하고, 화물을 밀어 내리는 일을 하던 유진 헤이즌퍼스 한 명만이 낙하산으로 탈출해 살아남았다. 그는 하루 만에 붙잡혔고, 자신이 CIA와 계약을 맺고 이 보급 임무를 수행해 왔다고 진술했다. 미국 정부는 그와의 연관을 부인했다.

🛑 거부권

니카라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판결 이행을 요청했다. 1986년 7월 31일, 완전한 이행을 촉구하는 결의안은 표결에서 11 대 1로 지지를 받았으나, 상임이사국인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부결되었다. 10월 28일 제출된 두 번째 결의안(S/18428) 역시 미국의 거부권으로 부결되었다.

🗳️ 총회로 간 판결

안보리에서 길이 막히자 니카라과는 유엔 총회로 향했다. 1986년 11월 3일, 총회는 결의안 41/31을 채택했다. 판결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으며, 찬성 94, 반대 3, 기권 47로 가결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세 나라는 미국, 이스라엘, 영국이었다. 총회는 이후 회기에서도 같은 취지의 결의를 반복해 채택했다.

🔚 판결 뒤에 남은 것

미국은 배상 협상에 응하지 않았고, 판결은 이행되지 않았다. 니카라과는 배상액 산정을 위한 준비서면을 1988년 3월 29일 제출했다.

유엔 헌장 제94조는 재판소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당사국이 있을 경우 상대국이 안전보장이사회에 호소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었다. 판결을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절차는 안전보장이사회를 거치는 것이었고, 그 이사회에서 미국은 거부권을 쥐고 있었다.

1990년 대선에서 비올레타 차모로가 이끄는 국민야당연합이 승리해 산디니스타 정권이 물러났다. 1991년 9월, 니카라과는 소송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다고 재판소에 통보했다. 미국은 이를 환영했다. 1991년 9월 26일, 사건은 재판소의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니카라과는 배상을 받지 못했다. 세계 최고 법원의 판결은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 6월 26일, 1907년 티플리스 은행 강도

 💣 예레반 광장

1907년 6월 26일 오늘, 오전 10시 30분, 티플리스(지금의 트빌리시) 예레반 광장에 현금 마차가 들어왔다. 마부, 출납원, 회계원, 경비, 무장 군인, 코사크 기병이 호위했다.

신호가 떨어졌다.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총성이 울렸다. 혼란 속에 기병 대위 복장을 한 사내가 돈 보따리를 마차에 던져 넣고 사라졌다.

40명이 죽었다. 50명이 다쳤다. 강도단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 탈취한 돈은 24만 1천 루블이었다. 현 시세로는 약 500만 달러에 해당한다.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광장을 포위했다. 돈도 범인도 이미 없었다.

전 세계 신문이 떠들썩했다. 런던 타임스는 "티플리스 폭탄 만행", 뉴욕 타임스는 "폭탄으로 다수 사망, 17만 달러 탈취"라고 전했다.

범인들의 이름이 뒤늦게 알려졌다. 현장 지휘자는 카모였다. 자금 세탁을 맡은 자는 리트비노프였다. 폭탄을 만든 자는 크라신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자는 코바였다.

🔍 배후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 단순해 보이던 강도 사건의 배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탈취한 돈은 볼셰비키 당으로 흘러들어갔다. 코바와 카모는 1905년 혁명 실패 이후 자금이 바닥난 볼셰비키를 위해 이 강도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승인을 내린 사람은 런던과 베를린에서 망명 중이던 레닌이었다.

아이러니가 있었다. 강도가 일어나기 불과 몇 주 전, 런던에서 열린 당 대회는 폭력적 수탈을 공식 금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레닌은 그 결의에 서명했다. 그리고 베를린으로 건너가 코바, 크라신, 리트비노프를 만나 티플리스 강도를 논의했다.

당의 결의는 종이 위에만 있었다.

💸 돈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강도는 성공했으나 돈을 쓸 수 없었다.

500루블짜리 대형 지폐들의 일련번호가 경찰에 알려져 있었다. 레닌은 유럽 전역에서 동시에 환전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표시된 지폐들이 유럽 은행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국제 경찰 공조가 시작됐다.

1908년 1월, 파리에서 리트비노프가 표시된 지폐 열두 장을 갖고 있다가 체포됐다. 베를린에서는 카모가 체포됐다. 그는 가혹한 심문에서 정신이상을 연기해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뒤 탈출했다. 1917년 혁명 이후에야 석방됐다.

주요 공모자 가운데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없었다.

🚬 코바

이 강도를 기획한 코바는 가명이었다.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조지아 고리 출신의 전직 신학생이었다. 1904년부터 강도와 수탈 계획에 관여해 왔으며, 스스로를 "코카서스의 산적"이라 불렀다.

훗날 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스탈린.

그는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수천만 명이 그의 통치 아래 죽었다. 당일 그의 행적에 대해 트로츠키는 훗날 이렇게 썼다. "다른 사람들이 싸웠고, 스탈린은 멀리서 감독했다." 트로츠키는 나중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예레반 광장은 지금 자유광장이라 불린다. 40명의 피가 흘렀던 그 광장에, 자유라는 이름이 붙었다.

6월 26일, 세금을 가장 많이 낸 남자

 

    1917년, 평안북도 용천의 부잣집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의주 일대에 이름난 대지주였다. 아이는 부족함 없이 자랐고, 신의주상업학교를 마친 뒤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다.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한, 그 시절엔 흔치 않은 인텔리였다.

해방이 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고향에는 새 질서가 서고 있었다. 토지개혁으로 지주였던 집안은 무너졌다. 가진 것을 잃은 그는 1947년 홀로 삼팔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쪽에서 그는 월남한 청년들의 반공 단체에 몸담아 간부를 지냈고, 정보기관과 우익 조직의 언저리에서 움직였다. 1948년에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이듬해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정면으로 맞서던 정당,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당 조직부장의 추천이었고, 입당은 곧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 당의 당수에게 면담을 청했다.

1949년 6월 26일, 면담을 하기로 한 날. 당수를 마주한 자리에서 그는 네 발의 총을 쐈다. 당수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는 곧 체포되었다.

법정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형은 곧 15년으로 줄었고, 이듬해 전쟁이 터지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감옥에 있은 것은 한 해 남짓이었다. 그는 군으로 돌아가 복무했고, 1953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예편한 그는 강원도 양구로 갔다. 1956년, 군에 식료품을 대는 군납공장 신의 기업사를 차렸다. 두부와 콩나물을 만들어 부대에 넘겼다. 사업은 군이 알선해 주었다. 공장은 십 년 가까이 돌아갔고, 그는 큰돈을 벌었다. 훗날 그의 근황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한때 그가 강원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낸 사람 축에 들었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도내 납세액 3위였다.

양구에서 그는 왕처럼 살았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교장이 교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를 벌하려는 손이 여러 번 뻗어 왔지만, 그를 지켜 주는 힘은 늘 그보다 컸다.

그가 암살한 이는, 한독당 당수 백범 김구였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정오, 그 자리에서 암살됐다. 향년 74세.

이 암살범 안두희는 훗날 한 시민의 손에 맞아 죽었다. 1996년의 일이었다.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2026년 7월 8일 수요일

🔒 6월 25일,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 — 1950년

🌧️ 새벽 4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 7만 5천 명이 38선을 넘었다. 탱크가 앞섰다.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38선은 한국인이 그은 선이 아니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미국의 두 장교가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를 보고 30분 만에 38도선을 그었다.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는 경계였다. 조선인은 이 결정에 없었다. 임시 분단이었으나, 영구가 됐다.

⚔️ 3년

미국이 유엔 안보리 결의를 통해 참전했다. 소련이 당시 안보리를 보이콧 중이었기 때문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21개국이 참전했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뒤집혔고,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밀어붙이자 중국이 개입했다. 전선은 다시 38선 부근으로 밀렸다. 2년간의 소모전이 이어졌다. 포로 송환 문제 하나로 협상이 2년을 끌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서명됐다. 유엔군 사령부와 북한군·중국군이 서명했다. 한국은 서명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무력 통일 실패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망자는 최소 250만 명이었다.

🔒 정전

정전협정의 첫 문장은 이렇다. 적대행위의 완전한 중지를, 최종적인 평화 해결이 이루어질 때까지 보장하기 위해.

72년이 지났다. 최종적인 평화 해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전협정은 전쟁을 끝낸 것이 아니다. 싸움을 멈춘 것이다. 법적으로 한국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DMZ는 평시 국경이 아니라 전시 완충지대다. 주한미군 2만 8천 명은 평화 조약이 아니라 전시 권한으로 주둔한다.

🕊️ 종전 논쟁

종전을 먼저 선언하고 비핵화를 이끌어내자는 쪽과, 비핵화 없이 종전선언은 위험한 양보라는 쪽이 맞섰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평화협정을 요구해 왔다. 목적은 주한미군 철수였다. 1994년 제네바 합의, 2005년 6자회담 공동성명, 2018년 싱가포르 공동선언. 합의가 있을 때마다 북한은 핵 개발을 계속했다.

2018년 문재인과 김정은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다. 그해 말까지 종전을 선언하기로 했다. 2019년 하노이 북미 회담이 결렬됐다. 모든 것이 멈췄다.

2024년 김정은은 한국을 주적으로 헌법에 명시했다. 2025년 노동당 대회에서 남측과의 모든 대화를 거부했다. 2026년 한국 정부는 다시 종전선언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 지금

합의문들은 종이 위에서 사라졌다.

1953년 정전협정 서명국들은 평화 회의를 석 달 안에 열기로 했다. 그 회의는 열렸으나 실패했다. 그 이후의 모든 합의도 실패했다. 72년이 지났다.

DMZ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중무장된 국경이다. 38도선을 30분 만에 그은 두 장교 중 한 명인 딘 러스크는 훗날 국무장관이 됐다. 그 선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2026년 7월 3일 금요일

⚔️ 6월 24일, 모든 권력은 국민에게 — 1932년, 방콕

🏛️ 선언

1932년 6월 24일 아침, 방콕의 왕립 광장에서 한 장교가 탱크 위에 올라 선언문을 낭독했다. 카나 랏사돈, 즉 민중당이 700년 절대왕정을 끝냈다. 국왕 프라차티폭은 후아힌의 별궁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다.

사흘 뒤, 헌법이 공포되었다. 민중당 지도자 프리디 파놈용이 미리 써둔 초안이었다. 헌법의 첫 문장은 이렇다. 이 땅의 최고 권력은 전 국민에게 있다.

국왕이 방콕으로 돌아와 민중당 대표들을 접견했다. 시암 문화에서 왕은 신하가 예를 갖출 때 앉아 있는 것이 관례다. 국왕은 일어섰다. "나는 카나 랏사돈을 경하하여 일어선다." 700년 왕정이 그렇게 끝났다.

⚔️ 쿠데타의 시작

혁명이 성공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같은 군대가 민선 총리를 몰아냈다. 1933년의 일이었다. 혁명의 선례가 쿠데타의 선례가 되었다.

1938년, 피불송크람이 정적들을 제거하고 파시즘 노선을 택해 2차대전에서 일본 편에 섰다. 1947년, 군이 다시 선출 정부를 무너뜨렸다. 1951년, 피불이 자기 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1932년 헌법을 복원했다. 1957년, 사릿 타나랏이 자기 상관을 몰아냈다. 1958년, 사릿이 두 번째 쿠데타로 독재 체제를 완성했다.

군은 1947년부터 1973년까지 26년을 통치했다.

🩸 1973년과 1976년

1973년 10월, 학생들이 거리로 나왔다. 수십만 명이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군이 발포했다. 그래도 물러서지 않자, 군은 결국 권력을 내놓았다. 태국 최초의 진정한 민주 정부가 들어섰다.

3년이었다.

1976년 10월 6일, 군이 학생 시위대를 학살했다. 공식 사망자는 46명이었다. 쿠데타가 뒤따랐고, 민주주의는 다시 지워졌다.

🔄 반복

1977년, 1991년, 2006년, 2014년. 쿠데타가 이어졌다. 방식은 거의 같았다. 선거로 집권한 정치인이 방콕 엘리트의 이해와 충돌하면, 군이 개입했다. 2006년에는 탁신 친나왓 총리가 유엔 총회 참석차 뉴욕에 있는 사이 쿠데타가 일어났다. 2014년에는 그의 여동생 잉락이 같은 방식으로 쫓겨났다.

어느 쿠데타 지도자도 처벌받지 않았다. 성공하면 총리가 되었고, 실패해도 망명이나 사면으로 끝났다. 미국은 냉전 내내 공산주의를 막는다는 이유로 태국 군사 정권을 지원했다.

📜 헌법

1932년 이후 태국은 헌법을 20번 바꿨다. 쿠데타가 일어날 때마다 헌법이 폐기되고 새 헌법이 만들어졌다. 헌법이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헌법을 만들었다.

🪙 사라진 동판

1932년 혁명이 선포된 왕립 광장 바닥에는 기념 동판이 박혀 있었다. 그날의 선언을 새긴 동판이었다. 어느 날 동판이 사라졌다. 누가 가져갔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 지금

2023년 5월, 비교적 공정한 선거가 치러졌다. 2025년 현재, 태국-캄보디아 국경 분쟁으로 또다시 쿠데타 우려가 커지고 있다.

1932년 6월 24일 공포된 헌법의 첫 문장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이 땅의 최고 권력은 전 국민에게 있다.

2026년 6월 30일 화요일

📖 6월 23일, 탈영병 — 1959년 파리

🫀 시한폭탄

그는 자신의 심장이 시한폭탄임을 알았다. 

서른을 넘기기 힘들다던 의사의 경고에도, 그는 오히려 더 격렬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음표 하나를 불 때마다 내 수명이 하루씩 줄어든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밤새 트럼펫을 불었다.

📖 금서와 명작

세상이 그를 미국인 필명 뒤에 숨은 삼류 외설 작가라 손가락질할 때, 

그는 "나는 네 무덤에 침을 뱉으리"를 통해 백인 주류 사회의 위선과 잔혹한 인종차별을 고발했다. 

금서가 되었고, 기소당했다.

그 냉소 뒤편, 그의 진짜 영혼은 "세월의 거품"속에 살았다. 

폐 속에 자라는 수련 때문에 숨이 막혀가는 연인을 위해 전 재산과 목숨을 바쳤지만,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환상과 슬픔이 뒤섞인, 독창적인 초현실주의적 언어와 재즈의 리듬감으로 풀어낸 명작으로 평가받았다.

🎺 탈영병

1954년, 프랑스는 전쟁 중이었다. 

국가는 젊은이들을 인도차이나와 알제리의 진흙탕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그는 대통령의 집무실을 향해 펜을 꺾어 편지를 썼다.

"만약 피를 흘려야 한다면, 당신의 피를 흘리십시오."

지배자들의 전쟁에 내 목숨을 헌납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제목 그대로 "탈영병"이었다. 

그 대가는 금지와 탄압, 그리고 무대 위로 날아드는 협박의 칼날이었으나 그는 단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 1959년 6월 23일 오전 10시

그는 자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시사회에 참석했다. 

이미 제작자들과 싸워 자기 이름을 크레딧에서 빼달라고 요구한 상태였다. 

영화가 시작되고 몇 분 뒤, 그가 갑자기 소리쳤다.

"저 사람들이 미국인이라고? 말도 안 돼!"

그리고 쓰러졌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 숨졌다. 서른아홉이었다.

"내 무덤에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던 그의 말은 쓸쓸한 예언이 됐다.

🌹 죽음 이후의 부활

그러나 보리스 비앙의 진짜 저항은 죽음 이후에 부활했다. 

그가 떠나고 9년 뒤인 1968년 5월, 파리의 바리케이드 위에서. 

기성세대의 군화와 오만에 맞서 거리로 쏟아져 나온 청년들의 손에는 빛바랜 그의 책들이 들려 있었고, 

그들의 입에선 "탈영병"이 울려 퍼졌다.

그는 죽어서야 비로소 '68혁명'의 가장 뜨거운 심장이자, 영원한 저항의 푸른 불꽃이 되었다.

🔥6월 22일, 강이 불탔다 — 1969년 , 클리블랜드

 🌊 커야호가

원주민 에리족의 말로 커야호가는 '구불구불한 강'이다. 오하이오주를 160킬로미터 흘러 이리호로 들어가는 강이다. 남북전쟁 전까지 클리블랜드는 작은 항구 도시였다. 강은 맑았고 물고기가 살았다.

🏭 강이 하수도가 되다

전쟁이 끝나자 공장들이 들어섰다. 철강 제련소, 석유 정제소, 조선소, 도살장, 페인트 공장. 존 D. 록펠러가 이곳에 스탠더드 오일을 세웠다.

공장들은 강을 하수도로 썼다. 철강 공장은 황산철을 쏟았고, 석유 정제소는 기름찌꺼기를 흘렸다. 페인트 공장의 폐액이 강물 색을 바꿨다. 법이 없었다. 오하이오주 수질오염관리위원회가 기업들에게 폐수 방류 허가를 내줬고, 시 당국은 묵인했다. 오염은 산업의 대가라 불렸다.

기름막이 수면 위에 7센티미터 두께로 쌓였다. 물고기가 사라졌다. 지렁이조차 살지 못했다. 강물은 금속을 부식시킬 만큼 독해졌다.

🔥 첫 번째 불

1868년, 강에 처음 불이 붙었다. 수면의 기름막에 불씨가 떨어진 것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이후 강은 열한 번을 더 불탔다. 사람이 죽었고, 배가 타고, 다리가 무너졌다. 신문은 짧은 기사 한 줄로 처리했다. 화재는 업계의 일상이었다. 피해는 산업의 대가로 불렸다. 기업은 벌금을 내지 않았다. 주 정부는 허가를 내줬고, 시 당국은 묵인했다.

🔥 1969년 6월 22일

열세 번째였다.

철도교 위를 지나던 열차에서 불씨가 떨어졌다. 리퍼블릭 스틸의 쇳물 폐수, 스탠더드 오일의 기름, 셔윈-윌리엄스 페인트 공장의 화학물질이 뒤섞인 강 위로. 불이 붙었다. 불길이 15미터 솟았다.

24분 만에 꺼졌다. 피해액은 5만 달러. 불이 너무 빨리 꺼져 사진을 찍은 사람이 없었다. 지역 신문은 다음 날 여섯 줄로 처리했다.

6주 뒤, 타임지가 이 화재를 대서특필했다. 실은 사진은 1969년이 아니라 1952년 화재 사진이었다. 불길에 휩싸인 배의 사진이 전국 독자들에게 퍼졌다.

열세 번 불탄 강이, 열세 번째에 가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 그 뒤, 그리고 지금

1970년 미국 환경보호청(EPA)이 설립됐다. 1972년 청정수법이 제정되어 기업의 폐수 방류를 처음으로 규제했다. 2019년, 강의 물고기를 먹어도 안전하다고 선언됐다.

그러나 2025년 현재도 강바닥의 오염 퇴적물 정화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이리호는 매년 여름 유해 조류가 번식한다.

첫 번째 불이 난 지 157년이 지났다. 강은 아직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2026년 6월 29일 월요일

🏯 6월 21일, 적은 혼노지에 있다.


🏯 천하를 눈앞에 두고

오다 노부나가는 일본의 절반을 쥐고 있었다. 최강의 라이벌을 그해 봄에 꺾었고, 통일이 눈앞이었다.

아케치 미쓰히데는 십사 년을 곁에서 섬긴 가신이었다. 귀족 문화에 밝았고, 싸움에도 능했다.

🔥 함부로 대하다

노부나가는 그를 가장 믿었고, 그래서 가장 함부로 대했다.

연회에서 손님들 앞에 미쓰히데의 머리를 짓눌렀다. 대머리라고 조롱했다.

미쓰히데가 야카미성을 항복시키며 적장의 목숨을 약속했다. 노부나가는 그 약속을 무시하고 적장을 죽였다. 보복으로, 적진에 인질로 가 있던 미쓰히데의 어머니가 죽었다.

이에야스 접대를 맡겨놓고는 생선 냄새가 난다며 그 자리에서 내쳤다. 미쓰히데가 차린 음식은 해자에 버려졌다.

단바의 영지를 거두고, 아직 정복하지도 못한 땅을 대신 주었다.

⚔️ 적은 혼노지에 있다

1582년 6월, 노부나가는 미쓰히데에게 서쪽 전선 지원을 명했다. 미쓰히데는 일만 삼천을 이끌고 길을 나섰다.

그는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 군사를 교토로 돌렸다.

노부나가는 교토에 있었다. 부하들을 모두 전선으로 보낸 터라 곁에는 백오십 명뿐이었다. 늘 묵던 절 혼노지에 무방비로 머물렀다.

6월 21일 오늘 새벽, 일만 삼천이 혼노지를 에워쌌다. 함성을 듣고서야 반란임을 알았다.

🩸 불 속에서

절에 불이 붙었다. 노부나가는 안으로 물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마지막으로 한 일은 시신을 감추는 것이었다. 제 머리가 미쓰히데의 손에 들어가 효수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시신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 십삼 일

미쓰히데가 교토를 쥐었다.

어느 가문도 그의 편에 서지 않았다. 사위의 집안마저 등을 돌렸다. 서쪽의 히데요시가 적과 급히 화친하고 이백 킬로미터를 돌아왔다. 열사흘째, 미쓰히데는 야마자키에서 패했다.

패주하던 그날, 농민의 손에 죽었다. 죽창에 찔렸다고 전한다.

그의 천하는 열사흘이었다.

🕯️ 남은 것

배신은 주인을 불 속에서 죽였고, 배신자는 열사흘 만에 들판에서 죽었다. 둘 다 시신은 온전하지 못했다.

천하는 히데요시에게 굴러갔다. 함부로 대한 자도, 칼을 든 자도, 끝내 천하를 보지 못했다.

2026년 6월 28일 일요일

6월 20일, 아우슈비츠 탈옥 성공, 1942년

⛓️ 끌려오다

카지미에시 피에호프스키는 폴란드의 보이스카우트였다. 나치는 보이스카우트를 저항의 씨앗으로 보아 잡아들였다. 그는 프랑스로 달아나려 헝가리 국경을 넘다 붙잡혔다. 여러 감옥을 거쳐 1940년 6월 20일, 아우슈비츠에 끌려왔다. 수인 번호 918번이었다.

🤝 처형 명단

그는 수용소에서 처형 명단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명단에서 친구 에우게니우시 벤데라의 이름을 보았다. 곧 죽을 친구였다.

두 사람은 탈출을 모의했다. 여기에 두 사람이 더 합류했다. 신부 유제프 렘파르트, 그리고 폴란드 국내군 장교 스타니스와프 야스테르. 네 사람의 일이 저마다 달랐고, 그 다른 일들이 합쳐져 하나의 계획이 되었다. 독일어가 가장 능숙한 피에호프스키가 지휘를 맡았다.

🔧 임무

벤데라는 정비공이었다. 차고에서 차를 빼내는 일을 맡았다. 피에호프스키와 나머지는 제복과 무기가 있는 창고를 맡았다.

준비는 미리 이루어졌다. 피에호프스키는 자신이 석탄을 채우던 투입구의 빗장을 손봐, 닫혀도 잠기지 않게 해두었다. 창고 문을 열 가짜 열쇠도 만들어두었다.

🎖️ 제복과 차

1942년 6월 20일 오후, 일과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네 사람은 짐수레를 끄는 작업조로 위장했다.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고 둘러댔다. 경비병은 별 주의 없이 그들을 적어두고 통과시켰다.

그들은 석탄 투입구로 창고 지하에 들어갔다. 가짜 열쇠로 문을 열었고, 잠긴 무기고는 쇠지레로 부쉈다. SS 제복으로 갈아입고 소총과 권총, 수류탄을 챙겼다. 피에호프스키는 바느질에 능해, 제복에 계급장을 직접 달았다.

벤데라는 차고로 가, 수용소에서 가장 빠른 차를 골랐다. 슈타이어 220. SS 장교의 차였다. 그는 그 차를 몰고 나와, SS 제복을 입은 세 사람이 기다리는 곳에 댔다.

🚗 정문

차는 정문으로 향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그 글자 아래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차가 멈췄다. 경비병이 다가왔다.

피에호프스키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SS 장교의 계급장을 보이며 독일어로 소리쳤다. 잠자느냐, 이놈들아. 문 열어라.

경비병이 황급히 차단기를 올렸다. 차는 정문을 빠져나갔다. 총성은 없었다. 경비병이 자세히 보았다면, 그 장교들의 얼굴이 식은땀에 젖어 창백한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탈출한 그날은, 그가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지 꼭 2년 되는 날이었다.

🩸 남은 자들의 대가

네 사람은 흩어졌고, 살아남았다. 아우슈비츠는 탈출할 수 없다던 말이 그날 깨졌다.

그러나 대가는 떠난 자가 아니라 남은 자들이 치렀다. 나치는 보복으로 피에호프스키와 야스테르의 부모, 렘파르트의 어머니를 아우슈비츠로 끌고 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었다. 차고를 관리하던 카포 쿠르트 파할라는 탈출을 도왔다는 의심을 받아 고문당한 뒤, 11블록의 좁은 감방에 갇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었다.

자유를 얻은 네 사람의 몫을, 얼굴도 모르는 부모와 카포가 대신 갚은 셈이었다.

탈출은 SS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들은 다시는 같은 일이 없도록 했다. 이 탈출 뒤, 아우슈비츠는 모든 수감자의 팔에 번호를 문신으로 새기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신분을 속이고 정문을 빠져나간 일이, 수십만 명의 살갗에 지워지지 않는 번호로 남았다.

🕯️ 또 하나의 감옥

피에호프스키는 끝내 나치에게 다시 잡히지 않았다. 그는 폴란드 국내군에 들어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그러나 그의 감옥은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에 들어선 공산 정권은, 그를 반공 저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다시 가두었다. 나치의 수용소를 제 손으로 빠져나온 사람이, 같은 조국의 다른 정권 아래 7년을 갇혔다.

그는 2017년, 아흔여덟에 눈을 감았다. 정문으로 걸어 나온 그날로부터 일흔다섯 해가 흐른 뒤였다.

2026년 6월 27일 토요일

⛓️ 6월 19일,준틴스(Juneteenth)

 

📜 합친 말

준틴스(Juneteenth)는 6월(June)과 19일(nineteenth)을 합친 말로, 1865년 6월 19일을 기린다. 이날 북군의 고든 그레인저 소장이 약 2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텍사스 갤버스턴에 들어와 일반명령 제3호를 발표했다. 그 첫 문장은 이렇다. 텍사스의 주민들에게 알린다. 합중국 행정부의 선언에 따라, 모든 노예는 자유다.

⏳ 2년 6개월 늦은 자유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한 것은 1863년 1월 1일이었다. 그러나 텍사스의 노예 약 25만 명에게 자유는 2년 반을 더 미뤄졌다. 이를 집행할 북군 병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남부연합의 가장 외진 곳이던 텍사스는, 선언이 종이 위에만 있고 노예제가 그대로 작동하던 마지막 지역이었다.

법으로는 2년 반 전에 자유가 된 사람들이, 그 사실도 모른 채 2년 반을 더 노예로 살았다. 준틴스가 기리는 것은 그 뒤늦게 도착한 자유다.

⛓️ 자유에 담긴 단서

명령문에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 자유를 선언하면서도, 해방된 이들에게 지금 있는 집에 조용히 머물며 임금을 받고 일하라고 권고했다. 군 주둔지에 모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어디서든 게으름은 용납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자유를 주면서, 그 자유의 형태를 함께 정한 것이다. 일부 노예주는 발표를 미루거나 무시하며 몇 주, 몇 달을 더 노예 노동을 부렸다.

🌑 또 다른 억압

준틴스는 해방에서 태어났으나, 그 기념은 새로운 억압 아래 자랐다. 노예제가 끝나자 흑인 단속법과 죄수 임대제, 짐 크로의 제도적 인종차별이 뒤따랐다. 남부 여러 주에서 준틴스 기념은 공공장소에서 밀려났다. 그래서 흑인들은 직접 땅을 사들여 자기들만의 자리를 만들었다. 휴스턴의 '해방 공원'이 그렇게 생겼다. 준틴스는 기억과 교육, 저항의 날이 되었다.

🏛️ 156년

준틴스는 1866년 텍사스에서 처음 기념되어, 가장 오래된 노예해방 기념일이 되었다. 1980년 텍사스가 처음으로 주 공휴일로 지정했다. 2021년 6월 17일, 바이든 대통령이 법안에 서명해 연방 공휴일이 되었다. 갤버스턴에서 첫 명령이 낭독된 지 156년 만이었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그날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시위가 절정을 이루었던 그날,
임기 말의 전두환은 직선제 개헌을 거부했다. 국민의 손으로 대통령을 뽑겠다는 요구를, 정권 유지를 위해 끝내 외면했다.
성난 부산시민들이 서면로터리 경찰 저지선을 무너뜨리고 범내골까지 진출했다.
해운대의 거센 파도 같았다.
'한열이를! 살려내라!'
'독재타도! 호헌철폐!'
이태춘은 구호를 외치며 촛불을 들고 행진했다.
1986년 동아대를 졸업한 스물일곱의 회사원이었다. 그는 태광고무에서 일했다.
경찰이 난사한 최루탄에 직격으로 맞고 다리 밑으로 추락했다.
"얼굴에 이마부터 최루탄 가스가 하얗게 뽀얗게 덮어씌어" 있었다.
"우리는 못 살았으니까 그런 거 하지 마라, 그런 거 하면 취직도 안 되고 하지 마라, 이렇게 해도 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호헌철폐 이런 게 제일 우리 목적이요' 이렇게 말하는 거야. 집에 와서."
어머니는 오열했다. 엿새 만에 숨졌다.

1987년 6월 18일 오늘, 그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진 날은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그날, 최루탄이 다 떨어져 경찰이 더는 시위를 진압할 수도 없었다.
노무현이 그의 영정을 들었다.

출처: 운명이다, 노무현

🌑 6월 17일, 침묵의 봄, 그리고 마지막 새

 

🌑 1962년 6월 16일, 경고가 울리다

1962년 6월 16일, 잡지 《뉴요커》에 한 편의 글이 실렸다. 해양생물학자 레이철 카슨이 쓴 《침묵의 봄》의 첫 연재였다. 사람들은 그날을 미국 환경운동이 시작된 날로 기억한다.

카슨은 한 우화로 글을 열었다. 미국 어딘가의 평범한 마을. 봄이 왔으나 새가 울지 않았다. 닭이 알을 품어도 깨어나지 않았고, 사과나무에 꽃이 피어도 벌이 오지 않아 열매가 맺히지 않았다. 아이들이 들에서 쓰러졌다. 마을은 죽음의 침묵에 잠겼다. 그 침묵을 부른 것은 역병도, 마법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제 손으로 뿌린 농약이었다.

카슨은 그것이 우화가 아니라 곧 닥칠 현실이라고 했다. DDT. 2차 세계대전이 낳은 강력한 살충제. 단 한 번 뿌려도 수백 종의 벌레를 죽였고, 비에 씻겨도 흙과 물에 남아 먹이사슬을 타고 올라갔다. 벌레를 먹은 새의 알껍데기가 얇아졌고, 새가 사라진 봄은 고요했다. 그는 인간이 자연을 향해 벌이는 전쟁이 결국 인간 자신을 향한 전쟁이라고 적었다.

화학업계는 분노했다. 한 농무장관은 아이도 없는 노처녀가 왜 유전 문제에 그리 매달리느냐 물으며, 그가 공산주의자일 것이라 했다. 카슨은 연재가 끝나고 채 2년이 지나기 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쉰여섯이었다.

☠️ 그 사이, 한 섬에서

카슨이 경고하던 그 무렵, 플로리다의 한 섬에서는 그의 우화가 천천히 현실이 되고 있었다.

메릿섬. 대서양에 면한 염습지였고, 검은 깃털을 가진 작은 참새가 그곳에만 살았다. 검은등바다참새. 다른 바다참새보다 짙은 빛깔에, 그 섬에서만 들리는 고유한 노래를 가진 새였다.

1957년, 소련이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자 미국은 우주센터를 지을 땅을 찾았다. 메릿섬이 낙점되었다. 문제는 모기였다. 모기를 없애려 사람들은 그 습지에 DDT를 뿌렸고, 늪을 물에 잠그고 둑으로 막았다. 카슨이 책에서 가리킨 바로 그 농약이, 카슨이 일하던 분야의 한복판에서 뿌려지고 있었다.

살충제는 새의 알을 갉았고, 침수는 둥지를 지웠다. 고속도로가 습지를 갈랐고, 사탕수수밭과 유전이 남은 땅을 먹었다. 새가 살 곳의 십분의 구가 사라졌다. 수천 마리가 수백으로, 수백이 수십으로 줄었다.

🪶 여섯 마리, 그리고 하나

1975년을 끝으로, 암컷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1980년, 지구에 남은 검은등바다참새는 여섯 마리뿐이었다. 모두 수컷이었다. 사람들은 그 여섯에게 다리에 채운 띠의 색으로 이름을 붙였다. 파랑, 초록, 주황, 빨강, 하양, 노랑. 암컷이 없으니, 순종 새는 다시 태어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마지막 새들을 붙잡아 다른 아종 암컷과 교배시켰다. 잡종이라도 남기려는 안간힘이었다.

마지막 새들이 옮겨진 곳은 뜻밖에도 디즈니월드의 한 섬이었다. 멸종을 앞둔 새가, 사람들의 놀이동산 한쪽 보호구역에서 마지막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1986년 봄, 그 가운데 한 마리만 남았다. 주황 띠를 단 수컷, 오렌지밴드. 한쪽 눈이 멀어 있었다.

🌑 1987년 6월 17일, 침묵

오렌지밴드는 오래 버텼다. 참새로서는 드물게, 여덟 해를 넘게 살았다. 한쪽 눈으로 세상을 보며, 제 종족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본 마지막 새였다.

1987년 6월 17일 오늘, 오렌지밴드가 죽은 채 발견되었다.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한 마리의 죽음으로, 한 종족 전체가 지구에서 영영 사라졌다. 그 섬에서만 울리던 노래도 함께 사라졌다. 다시는 누구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다.

사람들은 언젠가 되살릴 수 있을까 하여 그의 심장과 간을 얼려 두었다. 몸은 박물관의 알코올 병 속에 담겼다. 그러나 암컷이 없으니, 그 냉동된 심장이 다시 뛸 날은 오지 않는다.

🕯️ 우화가 현실이 되었을 때

카슨이 경고한 지 꼭 스물다섯 해였다.

그는 1962년 6월의 그 글에서, 새가 울지 않는 침묵의 봄을 우화로 그렸다. 사람들은 그것을 지나친 상상이라 비웃었다. 그러나 1987년 6월, 그 우화는 한 마리 새에게 글자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검은 참새가 사라진 메릿섬의 봄은, 이제 정말로 그 새의 노래 없이 고요하다.

카슨은 인간이 자연과 벌이는 전쟁이 곧 자신과의 전쟁이라 했다. 오렌지밴드의 침묵은 그 말의 증거다. 우리가 모기를 없애려, 우주로 나가려, 길을 내려 한 일들이, 한 종족의 노래를 영원히 지웠다.

가장 두려운 것은 이것이다. 그 침묵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카슨의 우화는 여전히, 지금도, 어느 습지에서 조용히 되풀이되고 있다.


검은등바다참새. 다른 바다참새보다 짙은 검은 깃털을 지녔고, 염습지의 풀줄기에 둥지를 틀고 곤충과 거미를 먹었다. 수컷은 풀 끝에 앉아 특유의 거친 노래를 불렀다. 서식지 파괴와 DDT로 수가 줄어, 1987년 6월 마지막 새 '오렌지밴드'의 죽음과 함께 영영 사라졌다.

2026년 6월 24일 수요일

✡️ 6월 16일, 진실을 사랑한 사람 — 마르크 블로크

📖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1886년 리옹의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자이기 전에 군인이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해 두 차례 부상당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39년 전쟁이 다시 터지자, 쉰셋의 나이에 또 한 번 군에 복귀했다.

그러나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군복이 아니라 그가 바꿔놓은 역사학 그 자체였다.

🌾 누구의 역사인가

블로크 이전의 역사는 왕과 영웅의 역사였다. 누가 즉위했고 누가 전쟁에 이겼으며 어떤 법전이 반포되었는가. 역사는 권력자의 말과 조약과 연대표로 쓰였다. 들에서 밭을 갈고 빵을 굽고 세금을 내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기록 어디에도 없었다.

블로크는 그 시선을 뒤집었다. 1929년 그는 동료 뤼시앵 페브르와 함께 학술지 《아날(Annales)》을 창간하고, 새로운 역사학의 길을 열었다. 사건과 인물의 나열이 아니라, 사회와 경제가 흘러가는 긴 구조를 보려 했다. 그는 지리와 사회학과 경제학을 역사에 끌어들였고, 중세의 경작지 형태와 화폐, 농민의 삶과 믿음을 사료로 삼았다.

그의 대표작이 그 방향을 보여준다. 《프랑스 농촌사》는 왕조의 흥망이 아니라 땅과 농민의 천 년을 다뤘고, 《봉건사회》는 제도의 조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관계와 감정을 그렸다. 왕과 법전의 역사에서, 이름 없이 살다 간 다수의 역사로. 블로크가 연 이 길 위에서 20세기 역사학 전체가 다시 쓰였다. 그가 '아날학파'의 창시자로 불리는 까닭이다.

✡️ 이방인이 된 프랑스인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너졌다. 비시 정권의 반유대법이 그의 삶을 갈랐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는 소르본의 자리를 잃었고, 클레르몽페랑으로, 다시 몽펠리에로 밀려났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나, 프랑스인으로 죽는다.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레지스탕스로 들어갔다. 블랑샤르, 아르파종, 나르본 같은 가명을 쓰며, 리옹 지역 저항 조직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몽뤼크 감옥

1944년 3월 8일, 블로크는 리옹에서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몽뤼크 감옥에 갇혀 고문당했으나, 저항 조직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그는 역사학자였다. 함께 갇힌 젊은 저항자들에게 프랑스 역사를 가르쳤고, 한 사람은 봉건 시대 경작지 형태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고문을 견딘 쉰여덟의 그는 둥근 안경을 쓴 채, 갇힌 자의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1944년 6월 16일

노르망디 상륙이 시작되자 독일군은 후퇴를 준비하며 흔적을 지우려 했다. 1944년 6월 16일 저녁, 게슈타포는 몽뤼크 감옥에서 스물여덟 명의 저항자를 끌어냈다. 손이 묶인 채 트럭에 실린 이들은 생디디에드포르망 인근의 빈 들판으로 끌려갔다. 가는 길에 한 독일 장교는 전쟁은 아직 이긴다고, 곧 런던이 무너진다고 떠벌렸다.

들판에서 그들은 네 명씩 끌려 나가 총을 맞았다. 블로크의 곁에는 열여섯 살 소년이 떨고 있었다. 총알이 아플까 두려워하는 소년에게, 블로크는 말했다. 아니란다, 얘야, 아프지 않아. 그는 "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가장 먼저 쓰러졌다.

이튿날 아침, 생디디에드포르망의 학교 교사가 들판에서 시신들을 발견했다. 한참 동안 블로크의 죽음은 '어두운 소문'으로만 떠돌았고, 뒤늦게야 페브르에게 확인되었다.

📚 미완의 유작

블로크는 두 권의 책을 끝맺지 못하고 떠났다.

하나는 《이상한 패배》였다. 1940년 프랑스가 왜 그토록 빠르게 무너졌는지, 군 지도부와 사회의 실패를 냉정하게 파고든 책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를 위한 변명》이었다. 역사가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사색한 글로, 나치의 총살로 집필이 멈춘 채 남았다. 두 책 모두 그가 죽은 뒤 출간되어 고전이 되었다.

1941년 그가 쓴 유언에는 평생의 원칙이 담겼다. 나는 언제나 생각과 표현에서 완전한 진실하기를 힘써 왔다. 크뢰즈 지방의 그의 묘비에는 그가 바란 대로 한 줄이 새겨졌다. "딜렉시트 베리타템(Dilexit Veritatem)"은 라틴어로 "그는 진실을 사랑했다"는 뜻이다.

🕯️ 잊혔다가, 되살아나다

처형 현장에는 1946년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날 함께 총살된 저항자들의 이름과 나란히 그의 이름도 새겨졌다. 그러나 한동안 블로크의 죽음은 학계 바깥에서 잊혔다.

그가 다시 발견된 것은 1980~90년대였다. 학술 모임과 연구서가 그의 삶을 재조명했고, 스트라스부르의 학교와 대학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그를 가둔 몽뤼크 감옥은 국가 기억의 장소로 보존되었다. 잊혔던 역사학자가 천천히 프랑스의 기억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2024년 11월, 마크롱 대통령이 스트라스부르 해방 80주년을 맞아 발표했다. 그의 저작과 가르침과 용기를 기려, 마르크 블로크를 팡테옹에 모신다고. 그 자리에는 그의 후손들이 함께했다.

⚖️ 두 개의 프랑스를 끌어안다

블로크는 《이상한 패배》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프랑스 역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두 부류의 프랑스인이 있다고. 랭스 대관식의 기억에 가슴 떨리기를 거부하는 자들, 그리고 연맹 축제의 이야기를 감동 없이 읽는 자들.

랭스 대관식은 왕정과 가톨릭의 프랑스를 상징한다. 역대 국왕이 기름 부음을 받고 즉위하던 자리다. 연맹 축제는 그 반대편, 혁명과 공화국의 프랑스를 상징한다. 1790년, 시민들이 새로운 질서에 충성을 맹세하던 자리다. 프랑스 근현대사는 이 두 기억이 서로를 부정하며 충돌해 온 역사였다. 왕정의 프랑스를 사랑하는 자와 혁명의 프랑스를 사랑하는 자가, 서로를 진짜 프랑스인이 아니라 여겼다.

블로크는 그 둘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가슴 떨릴 수 있어야 프랑스를 이해한다고 했다. 천 년에 걸쳐 쌓인 모든 프랑스를 끌어안는 시각이었다. 그에게 프랑스인은 혈통이나 땅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으로 느끼면 누구나 프랑스인이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오염되었다. 2015년, 극우 정치인 마리옹 마레샬이 이를 비틀어 말했다. 랭스 대관식과 연맹 축제에 가슴 떨리지 않는 자는 진정한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포용의 문장이 배제의 잣대로 뒤집힌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극우는 블로크를 끊임없이 끌어다 인용했다. 유대인이자 좌파 지식인이며 나치에 맞서 죽은, 그러면서도 프랑스를 깊이 사유한 그 이름이 탐났던 것이다. 그의 증손자는 말했다. 극우의 강령은 블로크와 완전히 배치되는데도 그를 인용하는 것이 모순이며, 깊이 불쾌하다고.

블로크의 글은 그 전유를 스스로 반박한다. 그는 적었다. 나는 프랑스인이고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으며, 내 마음에서 그 무엇도 프랑스를 뽑아낼 수 없다고. 뿌리가 흙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땅과 혈통을 앞세우는 모든 논리와 정반대편에 섰다.

🏛️ 2026년 6월 23일, 팡테옹

순국 82년 뒤, 프랑스는 그를 국가의 전당으로 불러들였다. 2026년 6월 23일, 마르크 블로크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정치와 문화, 과학의 위인에게만 허락되는 그 자리에 든 최초의 역사학자였다.

다만 그 관은 비어 있었다. 그의 유해는 유족의 뜻에 따라 크뢰즈의 시골 묘지에 그대로 두었고, 팡테옹의 관에는 훈장과 사진, 편지가 담겼다.

함께 운구된 아내 시몬은 남편이 처형되기 전에 떠났다. 남편이 체포되자 신분을 감춘 채 병으로 입원했고, 그의 생사를 끝내 알지 못한 채 1944년 7월 2일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역사를 쓰던 사람이 역사가 되어 돌아왔다. 진실을 사랑한다고 적었던 한 학자가, 그 진실을 위해 죽은 지 82년 만의 일이었다.



Marc Bloch, his wife Simonne Vidal, and their two youngest children 
(circa 1932 [based on the children's ages])


2026년 6월 23일 화요일

✊ 6월 15일, 일어나소서 주여 - 엑수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


🧈 버터 허가증

중세 가톨릭교회법은 사순절 동안 육식과 함께 우유, 버터, 치즈 같은 유제품도 금했다. 올리브유가 풍부한 남유럽과 달리, 올리브가 자라지 않는 독일에선 버터가 중요한 지방 섭취원이었다. 독일 사람들은 버터를 먹기 위해 로마 교황청에 돈을 내고 '버터 허가증(Butterbrief)'을 사야 했다.

마르틴 루터는 이 제도를 비난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좋은 버터를 먹기 위해 왜 로마에 돈을 내야 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돈벌이 수단으로 삼지 마라."

그의 논리는 독일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 1520년 6월 15일, 칙서

루터의 비판은 면벌부와 교황의 권위로 향했다. 1517년 그가 비텐베르크 성당 문에 내건 95개조는 인쇄기를 타고 유럽 전역에 퍼졌다.

1520년 6월 15일, 교황 레오 10세가 칙서 '엑수르게 도미네(Exsurge Domine, 일어나소서 주여)'를 반포했다. 칙서는 루터의 글에서 추린 41개 주장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60일 안에 철회하지 않으면 파문하겠다고 통보했다. 루터의 책은 불태워졌고, 그 책을 지닌 자도 파문 대상이었다.

✊ 1520년 12월 10일, 칙서를 불태우다

루터는 철회하지 않았다. 60일째 되던 1520년 12월 10일, 그는 비텐베르크 엘스터 문 앞에서 교회법 책들과 함께 그 칙서를 불태웠다. 이로써 루터와 로마의 결별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 1521년 1월 3일, 파문

1521년 1월 3일,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이자 교수, 수도원 지구장이던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최종 파문당했다.

넉 달 뒤 보름스 제국의회에서도 그는 철회를 거부했다.

💍 결혼

그로부터 4년 뒤인 1525년, 루터는 자신이 수녀원에서 탈출시킨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했다. 성직자의 독신을 명한 교회법을 거스른 혼인이었다.

🌾 6월 14일,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길쌈하던 그 시절에, 대체 누가 귀족이었느냐

 

🌾 누가 귀족이었던가

한 떠돌이 설교자가 물었다. 아담이 밭을 갈고 이브가 길쌈하던 그 시절에, 대체 누가 귀족이었느냐고.

존 볼이라는 이름의 그 사내는 들판에서든 장터에서든 같은 말을 외쳤다. 신이 사람을 빚을 때 영주와 농노를 따로 두지 않았으며, 모두가 같은 흙에서 와서 같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14세기 잉글랜드에서 그런 말은 곧 위험을 뜻했다. 그를 위험하게 여긴 캔터베리 대주교 사이먼 서드베리는, 봉기가 터지기 직전인 그해 봄 볼을 메이드스톤 감옥에 가두어버렸다.

그 무렵 땅에는 분노가 두텁게 쌓여 있었다. 흑사병이 인구의 셋 중 하나를 쓸어간 뒤로 살아남은 자들의 노동에는 비로소 값이 매겨졌지만, 영주들은 법을 만들어 그 값을 흑사병 이전으로 묶어버렸다. 거기에 프랑스와의 기나긴 전쟁 비용을 대느라 거둔 인두세가 가난한 이들의 등을 휘게 했으니, 빈자도 부자와 똑같은 액수를 내야 하는 가혹한 세금이었다. 1381년 봄, 그 체납을 추궁하러 징수관들이 마을마다 들이닥쳤을 때, 마침내 잔이 넘쳤다.

🔥 6월 13일, 불타는 궁전

봉기는 에식스와 켄트에서 거의 동시에 일었고, 켄트에서는 와트 타일러라는 사내가 앞에 나섰다.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 그는 지붕에 기와를 잇던 평범한 기와장이였으나, 1381년 이전의 삶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이름 없는 직공이 수만의 머리 위로 떠오른 셈이었다. 농민과 장인과 하급 사제들이 그의 뒤로 모여들었고, 무리는 켄트를 거치며 메이드스톤 감옥을 부수어 그 안에 갇혀 있던 존 볼을 풀어냈다. 옥에서 나온 설교자는 블랙히스의 들판에서 다시 외쳤다. 아담이 밭을 갈 때, 누가 귀족이었던가.

그렇게 불어난 무리가 6월 13일 런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사보이 궁전을 불태웠다. 그곳은 어린 왕의 삼촌이자 백성이 가장 미워한 실권자, 곤트의 존이 사는 호화로운 저택이었다. 불길 속에서 금붙이를 몰래 챙긴 자는 도둑으로 몰려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으니, 그들은 약탈하러 온 것이 아니라 불의 자체를 태우러 온 사람들이었다.

👑 6월 14일, 마일엔드의 약속

당시 왕은 겨우 열네 살의 리처드 2세였다. 런던탑에 몸을 숨기고 있던 그는, 마침내 마일엔드로 나아가 반란군을 직접 마주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어린 왕은 그들의 요구에 고개를 끄덕였다. 농노제를 없애고 부역을 풀며, 자유로이 사고팔게 하고 그 누구의 죄도 묻지 않겠노라 약속한 것이다. 왕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온 그 말에, 일부 군중은 마음을 놓고 고향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바로 그 약속이 오가던 같은 시각, 더 성난 무리는 텅 빈 런던탑으로 거침없이 걸어 들어갔다. 그들은 그 안에 숨어 있던 두 사람, 곧 인두세와 실정의 얼굴로 지목된 대주교 사이먼 서드베리와 재무관 로버트 헤일스를 끌어냈다. 일찍이 존 볼을 옥에 가두었던 바로 그 서드베리였다. 두 사람의 머리가 타워힐에서 떨어져 장대에 꽂힌 채 거리를 돌았고, 마일엔드의 약속 위로 피가 덮였다. 한쪽에서 왕이 자유를 약속하는 동안, 다른 쪽에서는 그 자유를 가로막던 자의 목이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 6월 15일, 스미스필드

이튿날 왕과 타일러는 스미스필드에서 다시 마주 앉았으나, 협상은 이내 어그러졌다. 오가는 말이 거칠어지던 순간, 런던 시장 윌리엄 월워스가 칼을 빼 타일러를 찔렀고, 지도자는 말에서 굴러떨어진 뒤 끌려 나가 목이 잘렸다.

지도자가 눈앞에서 쓰러지자 군중이 술렁였고, 활시위가 막 당겨지려던 그때, 열네 살의 왕이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내가 너희의 지도자이니 나를 따르라. 갈 곳을 잃은 군중은 그 말에 이끌려 흩어졌고, 그것으로 봉기는 사실상 끝이 났다.

마일엔드에서 한 약속은 바로 그날로 거두어졌다. 주모자들이 하나둘 색출되어 처형됐고, 옥에서 풀려나 자유를 외치던 존 볼 역시 다시 붙잡혀 그해 7월 교수대에 올랐다. 왕은 차갑게 말했다. 너희는 농노였고, 앞으로도 농노로 남을 것이라고.

🕊️ 흙에 남은 불씨

반란은 끝내 패배했다. 약속은 거짓으로 드러났고, 외침은 피로 덮였다.

그러나 권력은 그날을 잊지 못했다. 정부는 두 번 다시 그 인두세를 꺼내 들지 못했고, 농노를 억지로 땅에 묶어두려던 손아귀도 조금씩 느슨해졌다. 흑사병이 뒤바꿔놓은 노동의 무게와 맞물리면서, 잉글랜드의 농노제는 그 뒤 한 세기에 걸쳐 천천히 스러져갔다. 당장은 이기지 못한 봉기가, 긴 시간을 두고 제 몫을 받아낸 셈이다.

그리고 한 물음만은 끝까지 남았다. 아담이 밭을 갈던 그때, 대체 누가 귀족이었던가. 진압된 것은 사람이었을 뿐, 그 물음마저 진압되지는 않았다. 그것은 흙 속에 묻힌 불씨처럼 남아, 훗날 평등을 외치는 모든 입에서 거듭거듭 되살아났다.

2026년 6월 22일 월요일

📂 6월 13일, 펜타곤 페이퍼스

 📷 1968년 3월, 어느 아침

베트남 꽝응아이성의 작은 마을 미라이에 미군 한 중대가 들어섰다. 그날 아침 네 시간 동안 주민 수백 명이 죽었다. 노인과 여자와 아이였다. 무장한 사람은 없었다. 군은 이 일을 작전의 성공으로 보고했고, 일 년 넘게 묻어 두었다. 진실이 알려진 것은 1969년 11월, 한 기자가 그것을 캐낸 뒤였다.

이것이 그 무렵 전쟁이 도달한 자리였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 거리로 나온 사람들

저항은 강의실에서 시작되었다. 1965년 봄, 대학마다 교수와 학생이 모여 밤새 전쟁을 토론하는 자리가 열렸다. 그 목소리는 곧 거리로 나왔다.

1965년 11월 27일, 워싱턴 기념탑 앞에 이만 오천 명이 모였다.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폭이 연단에 섰다. 미국에서 그의 육아서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마틴 루서 킹의 아내 코레타 스콧 킹이 그 곁에서 연설했다. 포크 가수 조앤 바에즈와 필 오크스가 노래했다. 백악관 앞을 돌아 의회로 행진이 이어졌다.

해가 갈수록 사람은 늘었다. 시위는 한 도시의 일이 아니라 전국의 일이 되었다.

🕵️ 정해진 답

정부는 답을 미리 정해 두었다. 존슨은 이 많은 사람의 뒤에 외국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스크바나 베이징이 시위에 돈을 댄다는 증거를 그는 CIA에 요구했다. 찾아내라기보다 입증하라는 명령에 가까웠다. 그렇게 1967년 가을, 자국민을 감시하는 비밀 작전이 시작되었다. CIA가 해외에만 손을 대도록 정한 헌장을 어긴 일이었다.

요원들은 대학에 잠입했다. 반전 인사의 이름이 수십만 건의 색인으로 쌓였다. FBI도 같은 일을 했다. 군도 민간인 십만 명의 파일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외국의 손은 나오지 않았다. CIA는 백악관에 보고했다. 공산주의의 자금도, 지휘도, 증거가 없다고. 존슨은 그 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닉슨이 자리를 이어받아 같은 보고서를 다시 청했다. 답은 같았다.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같았다. 사찰만 1974년까지 이어졌다. 헬름스는 뒷날 털어놓았다. 그 광범위한 감시는 외국의 손이 없음을 대통령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답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 권력이 그 답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 금고 속의 기록

같은 시기, 다른 한 사람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였다. 그는 늦어도 1965년에는 이 전쟁을 이길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 판단을 밖으로 내지 않았다.

1967년 6월, 그는 비밀리에 연구를 발주했다. 미국이 어떻게 이 전쟁에 이르렀는지를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대통령 존슨에게도, 국무장관 러스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현직 국방장관이 자기 정부 몰래, 자기 정부가 치르는 전쟁의 실패를 해부한 것이다.

분석가 서른여섯 명이 열여덟 달에 걸쳐 작업했다. 결과는 마흔일곱 권, 칠천 쪽이었다. 1969년 초 완성되었으나 아무도 읽지 않았다. 뒷날 「펜타곤 페이퍼스」라 불릴 그 기록은 몇몇 관료의 금고 속에 잠겼다.

⛓️ 감옥을 택한 청년

연구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대니얼 엘즈버그가 있었다. 그는 보고서 전체를 읽은 극소수였다. 한때 미국의 개입을 지지한 매파였다.

1969년 8월, 그는 한 모임에서 징집을 거부한 청년 랜디 케일러의 연설을 들었다. 케일러는 곧 감옥에 들어간다고 담담히 말했다. 친구들이 그곳에 있어 기쁘다고 했다. 엘즈버그는 강당을 나와 빈 화장실에 주저앉아 한 시간 넘게 울었다. 그를 바꾼 것은 말이 아니라 그 삶이었다.

그해 가을, 엘즈버그는 동료 앤서니 루소와 함께 문서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회를 택했다. 풀브라이트와 맥거번 같은 상원의원에게 문서를 건넸으나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1971년 3월 2일, 그는 마흔일곱 권 가운데 마흔세 권을 《뉴욕타임스》 기자 닐 시핸에게 넘겼다.

📰 1971년 6월 13일

일요일 아침, 《뉴욕타임스》 1면에 두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하나는 닉슨의 딸 트리샤의 결혼식 사진이었다. 다른 하나는 펜타곤 페이퍼스의 첫 보도였다. 닉슨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거기 적힌 거짓말은 전임자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 거짓 위의 전쟁

문서가 드러낸 것은 두 겹이었다. 첫째, 이 전쟁은 거짓 위에 세워졌다. 둘째, 정부는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병사를 계속 보냈다.

미국은 작전을 은밀히 넓혀 왔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폭격했고, 북베트남 연안을 기습했다. 어느 것도 보도되지 않았다. 문서는 북베트남 폭격이 적의 전의를 꺾지 못한다는 정부 자신의 판단을 담고 있었다.

미국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도 적혀 있었다. 1965년 국방차관보 존 맥노턴의 메모가 그 목표를 숫자로 남겼다. 칠십 퍼센트는 굴욕적인 패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십 퍼센트는 남베트남을 중국의 손에서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베트남 국민을 위해서는 십 퍼센트뿐이었다. 동맹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 네 대통령의 거짓

거짓의 주인은 네 명이었다.

트루먼은 시작을 숨겼다. 1950년부터 미국은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에 군사 원조를 댔다. 개입은 알려진 것보다 일렀다.

아이젠하워는 약속을 깼다. 1954년 제네바 협정은 이 년 뒤 통일 선거를 정했다. 그 선거가 열리면 호찌민이 이길 것이 분명했다. 미국은 선거가 열리지 못하게 했다. 입으로는 자결을 말하고 손으로는 그것을 막았다.

케네디는 동맹의 죽음을 미리 알았다. 1963년 11월, 미국이 세운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이 쿠데타로 무너지고 살해되었다. 문서는 케네디 행정부가 그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존슨의 거짓이 가장 또렷했다. 1964년 유세에서 그는 「우리는 더 넓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다. 「아시아의 청년들이 할 일을 시키려고 미국의 아들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폭격을 원하는 쪽은 상대 후보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북베트남 폭격 계획은 선거 한참 전에 마련되어 있었다. 통킹만 결의안의 초안조차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작성되어 구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막으려는 손

정부는 막아야 했다. 보도 다음 날, 법무장관 존 미첼이 중단을 요구했다. 《뉴욕타임스》가 응하지 않자 가처분을 받아냈고, 세 번째 기사를 끝으로 보도가 멈췄다. 연방정부가 안보를 이유로 신문을 사전에 막은 첫 사례였다.

그러나 엘즈버그는 이미 사본을 여러 곳에 나눠 둔 뒤였다. 6월 18일 《워싱턴포스트》가 받아 이었다. 정부가 막으면 다른 신문이 터뜨렸다. 결국 열아홉 개 신문이 이 문서를 들고 있었다. 한 곳을 막는 일은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사건은 빠르게 대법원에 닿았다. 1971년 6월 30일, 대법원은 여섯 대 셋으로 정부에 패소를 안겼다. 사전 검열을 정당화할 입증 책임을 정부가 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휴고 블랙은 적었다. 언론의 자유는 통치자가 아니라 피치자를 위해 보호되며, 권력을 가진 자는 거북한 언론을 견뎌야 한다고.

법으로 막는 데 실패하자, 정부는 방식을 바꿨다. 백악관은 비밀 공작반을 꾸렸다. 누수를 막는다 하여 「배관공」이라 불렸다. 이들은 엘즈버그의 약점을 캐려고 그의 정신과 의사 사무실에 침입했다. 같은 자들이 뒤에 워터게이트 빌딩에 들어갔다. 닉슨이 그 일을 승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74년 8월, 그는 사임했다. 막으려던 손이 막으려던 자를 무너뜨렸다.

🌫️ 그 후

발주자와 폭로자의 길은 갈렸다.

맥나마라는 오래 침묵했다. 1968년 국방부를 떠나 세계은행으로 갔다. 자신이 발주한 문서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틀렸다, 끔찍하게 틀렸다」고 적은 것은 1995년의 일이었다.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엘즈버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그의 혐의는 정부의 불법을 이유로 1973년 기각되었다. 그는 평생을 반전과 내부고발의 편에 섰다. 뒷날의 고발자들을 옹호했다. 2023년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은 진실을 묻었고, 한 사람은 진실을 꺼냈다. 같은 칠천 쪽이 두 삶에 정반대의 무게로 얹혔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 올리버 스톤, 피터 코즈닉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 앨런 브링클리

잿더미의 유산 - 팀 와이너

2026년 6월 20일 토요일

🕊️ 6월 12일, 백만이 멈춰 선 날 — 1982년, 센트럴파크

 

🚀 군비의 시대

1981년, 레이건이 백악관에 들어섰다. 그는 군비 증강에 매달렸다. 이듬해 국방 예산을 13퍼센트 늘렸고, 다섯 해에 걸쳐 3,560억 달러를 더 쏟기로 했다. 한 손으로 세금을 깎고 복지를 줄이면서, 다른 손으로는 새 핵무기를 사들였다. B-1 폭격기, MX 미사일, 트라이던트 잠수함. 냉전이 다시 뜨거워졌다.

여왕도, 황제도 없는 시대였다. 그러나 머리 위에는 수만 발의 핵탄두가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그 무게를 견디다 못해 거리로 나왔다.

✊ 흩어진 불씨들

저항은 여러 갈래에서 타올랐다.

2천여 명의 여성이 워싱턴의 국방부를 둘러쌌다. 손을 맞잡고 정문을 막아섰고, 140여 명이 끌려갔다. 그들은 핵을 만드는 권력의 심장부 앞에서 노래했다.

원자폭탄을 만들었던 과학자들도 돌아섰다. 자신의 손으로 빚은 불을 끄려고, 그들은 핵의 공포를 증언했다.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의사들의 모임'을 다시 일으킨 헬렌 칼디콧은 핵이 인체에 무슨 짓을 하는지 알렸다.

지하철 벽에 몰래 분필로 그림을 그리던 한 청년도 합류했다. 키스 해링. 그는 자기 손으로 포스터 2만 장을 찍어 거리에서 공짜로 나눠주었다.

🌃 1982년 6월 12일, 센트럴파크

그리고 그날이 왔다.

1982년 6월 12일 오늘, 사람들이 센트럴파크로 모여들었다. 새벽부터 전국에서 버스가 도착했다. 잔디밭의 풀 한 포기까지 사람으로 덮였다. 그들은 유엔까지 행진했다. 유엔 제2차 군축특별총회가 열리던 때였다.

100만 명이었다. 가톨릭 사제가 랍비와 어깨를 맞댔고, 노조원이 시인과 나란히 걸었다. 히로시마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피켓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핵 대피소가 아니라 집을." "군비를 사람에게로."

미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정치 시위로 기록되었다. 그날 단 한 건의 소요도, 연행도 없었다. 해 질 무렵 군중이 흩어진 뒤에도, 많은 이가 공원에 남아 밤을 새웠다.

🕊️ 그 후

그날의 함성이 곧장 핵을 없애지는 못했다. 그러나 헛되지도 않았다.

5년 뒤, 미국과 소련이 중거리핵전력조약(INF)에 서명했다. 두 초강대국이 핵무기를 처음으로 줄이기로 한 날이었다. 백만 명이 풀밭에 앉아 외쳤던 그 단순한 요구가, 끝내 협상 테이블 위에 올랐다.

힘없는 사람들에게 무기란 모이는 일뿐이었다. 그들은 그 하나로 세계에서 가장 큰 무기를 멈춰 세우려 했다. 1982년 6월 12일, 백만 개의 몸이 센트럴파크에 멈춰 섰던 그 하루가, 그 증거로 남았다.

그날 연단에 섰던 의사 헬렌 칼디콧은 평생 핵을 경고했다. 30년 뒤, 후쿠시마 앞에서도 그의 말은 같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결코 통제되지 않는다."



2026년 6월 19일 금요일

🔥 6월 11일, 불타는 승려, 그리고 두 형제의 최후 — 1963년 사이공

🔥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의 교차로

1963년 6월 11일 아침, 사이공의 번잡한 거리에 300여 명의 승려가 행진했다. 그중 한 노승이 앞으로 나섰다. 틱꽝득. 그는 길 한복판 방석 위에 가부좌로 앉았다. 다른 승려들이 5갤런들이 휘발유 통을 그의 몸에 부었다. 틱꽝득은 직접 성냥을 그어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불길이 그를 삼켰다. 그는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곁에 있던 승려들이 소방차를 막아섰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10분 만에 노승은 뒤로 쓰러졌다.

AP 통신 기자 맬컴 브라운이 그 장면을 찍었다. 사진은 이튿날 전 세계 신문 1면에 실렸다. 그날 이전까지 '베트남'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미국인들이, 그날 이후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조간을 펼친 케네디가 탄식했다. "맙소사."

⛪ 가톨릭 형제의 나라

틱꽝득은 무엇에 항의해 몸을 태웠나. 그 답은 한 가문에 있었다.

응오딘지엠은 1955년 부정선거로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이 됐다. 미국은 그를 공산주의에 맞서는 보루로 떠받쳤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가족 통치였다. 동생 응오딘뉴가 비밀경찰과 특수부대를 쥔 실세였고, 또 다른 동생 응오딘껀은 중부를 봉건 영주처럼 다스렸으며, 형 응오딘툭은 대주교로 종교적 권위를 보탰다.

지엠은 독실한 가톨릭이었다. 다수인 불교도는 군 진급에서, 공직에서, 토지에서 차별받았다. 프랑스 식민기부터 이어진 가톨릭 우대 구조를 정권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도화선은 1963년 5월 8일이었다. 후에에서 정부가 석가탄신일의 불교기 게양을 금지하자 시위가 일었고, 정부군이 발포해 비무장 민간인 9명이 죽었다. 며칠 전 가톨릭 행사에서는 종교기 게양이 허용됐던 터였다. 분노가 전국으로 번졌다. 6월 11일의 불길은 그 한 달간 쌓인 위기의 정점이었다.

💋 바비큐를 말한 여자

정권에는 또 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마담 뉴.

본명은 쩐레쑤언, '봄의 아름다움'이라는 뜻이었다. 응오딘뉴의 아내이자 지엠의 제수였다. 지엠이 평생 독신이었기에, 한 궁에 함께 살던 그가 사실상 영부인이었다. 귀족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결혼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한 여자. 프랑스어와 영어는 유창했으나 베트남어는 서툴렀다. 벌집처럼 틀어 올린 머리와 몸에 붙는 아오자이. 서방은 그를 '드래건 레이디'라 불렀다.

틱꽝득이 불탄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승려들의 분신을 "바비큐"라 불렀다. 불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쳤다고 했다. 분신하려는 승려가 더 있다면 성냥을 대주겠다고 했다. 그 말이 전 세계의 공분을 샀다.

9월, 그는 유럽과 미국 순방에 나섰다. 케네디 주변 인사들을 "핑크"라 불렀고, 미국 자유주의자가 공산주의자보다 나쁘다고 했다. 그 오만한 언사가 워싱턴의 인내심을 끊었다. 케네디는 쿠데타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 11월 2일, 장갑차 안

8월, 정권은 전국 사찰을 습격해 승려 수천 명을 잡아들였다. 미국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묵인의 신호가 사이공의 장군들에게 전해졌다.

11월 1일, 즈엉반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충성파는 허를 찔려 줄줄이 붙잡혔다. 반란군이 대통령궁에 들이닥쳤을 때, 형제는 이미 없었다. 지하 터널로 빠져나가 쩌런의 한 성당에 숨은 뒤였다. 가톨릭 형제가 마지막으로 몸을 숨긴 곳이 성당이었다. 그들은 직통선으로 반란군을 속이며 시간을 끌었다.

이튿날 아침, 형제는 항복했다. 안전한 망명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약속은 거짓이었다. 군 사령부로 돌아가는 장갑차 뒤칸에서, 두 사람은 손이 뒤로 묶인 채 근거리에서 총을 맞았다. 방아쇠를 당긴 자는 즈엉반민의 경호원 응우옌반늉. 부검은 처형식 총상을 드러냈다.

쿠데타 세력은 형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다음 날 흘러나온 사진이 거짓을 뒤집었다.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이 손이 묶인 채 장갑차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9년의 가족 정권이 그렇게 끝났다.

🕯️ 남은 자들

마담 뉴는 그때 미국에 있었다. 남편과 시아주버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가 말했다. 내 가족이 미국의 축복 아래 배신당해 죽었다면, 베트남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라고.

그는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탈리아로, 다시 프랑스로 망명해 반세기를 더 살았다. 1967년 맏딸이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스물둘에 죽었다. 그의 부모는 일찍이 사위의 정권에 등을 돌리고 불교 탄압에 항의해 대사직을 던졌다. 가족은 정치로 갈라졌다.

마담 뉴는 2011년 로마에서 여든여섯에 눈을 감았다.

틱꽝득이 성냥을 그은 지 다섯 달 만에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그의 예언도, 마담 뉴의 예언도 같은 곳을 가리켰다. 베트남의 이야기는 그제야 시작이었다. 지엠이 사라진 자리에 쿠데타가 잇따랐고, 미국은 점점 더 깊이 그 수렁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노승이 불 속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그 아침이, 긴 전쟁의 문을 연 셈이었다.

🪷 타지 않은 심장

세월이 흘렀다. 한때 정권에 부담이던 그 불길은, 통일된 베트남에서 다른 이름으로 남았다.

화장한 그의 몸에서 심장만은 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리라 불렀다. 심장은 사리사에 모셔졌다가 베트남국사로, 다시 은행으로 옮겨졌고, 1991년부터는 국가은행 금고에서 특별 보안 아래 보관됐다. 자비의 상징이자 베트남 불교의 성물이었다.

34년이 지난 2025년, 심장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왔다. 유엔 베삭 축제 기간, 사리를 친견하려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어떤 날은 6만 명이 다녀갔다. 그해 12월, 심장은 영구한 안식처를 얻었다. 1963년의 비폭력 투쟁을 기리려 세운 63미터 높이 다바오탑에, 심장이 봉안됐다.

그의 이름 앞엔 이제 '보살'이 붙는다. 그가 몸을 태운 교차로는 기념 공간이 됐고, 매년 6월 11일이면 그곳과 사찰에서 소신공양 추모식이 열린다. 정치적 항거의 인물이 종교의 성인으로 남은 것이다.

불 속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노승은 갔다. 그러나 타지 않은 심장 하나가, 60년이 지나도록 그 아침을 증언하고 있다.


틱꽝득의 분신 (1963년 6월 11일, 사이공). 촬영: 맬컴 브라운 / AP.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 퍼블릭 도메인.

🏴 6월 10일, 같은 날, 두 개의 함성 — 1926 그리고 1987

 

📅 61년의 간격

한국 현대사에서 6월 10일은 우연이라 부르기엔 너무 또렷한 날이다. 1926년 이날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꼭 61년 뒤인 1987년 이날 시민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한 번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함성이었고, 한 번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함성이었다. 날짜 하나가 두 시대의 저항을 꿰뚫었다.

🏴 1926, 상여 뒤의 만세

발단은 한 황제의 죽음이었다.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권오설과 김단야는 본래 5월 1일 메이데이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순종 승하 소식을 듣고, 이들은 방향을 틀었다. 장례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준비는 치밀했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학생 단체가 연합전선을 이뤘다. 권오설을 중심으로 '6·10 투쟁특별위원회'가 꾸려졌고, 10만 장에 달하는 격문이 인쇄됐다. 격문에는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같은 구호가 담겼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다. 거사는 사전에 발각됐고, 권오설은 시위 며칠 전 체포됐다. 경성에만 7천여 명의 육·해군이 깔렸다.

그럼에도 6월 10일 아침, 함성은 터졌다. 순종의 인산일, 2만 4천여 명의 학생이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했다. 오전 8시 30분경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뿌렸다. 인산 행렬이 지나는 길마다 민중이 합세했다. 시위는 계획만큼 번지지 못했고 전국에서 천여 명이 붙잡혔지만, 침체됐던 민족운동에 다시 불씨를 댕겼다.

6·10 만세운동은 홀로 선 사건이 아니었다.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사이를 잇는 다리였고, 1927년 신간회 결성의 발판이 됐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한 깃발 아래 손잡은 민족통일전선의 실험이기도 했다.

✊ 1987, 광장의 함성

61년 뒤, 같은 날짜에 또 하나의 항쟁이 시작됐다. 이번엔 식민 권력이 아니라 군사정권이 상대였다.

도화선은 여러 죽음과 거짓이었다. 1987년 1월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고, 당국은 이를 축소·은폐했다.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6월 9일엔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

6월 10일, 항쟁이 본격화됐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 이 구호가 거리를 뒤덮었다. 시위는 6월 29일까지 전국으로 번졌다. 학생만이 아니라 넥타이를 맨 직장인까지 거리로 나섰다.

결국 정권이 물러섰다. 6월 29일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수습안을 발표했다. 그해 12월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 다리를 놓은 날짜

두 사건은 시대도 적도 달랐다. 한쪽은 제국주의에, 한쪽은 독재에 맞섰다. 그러나 닮은 골격이 있었다. 둘 다 학생과 청년이 앞장섰고, 둘 다 한 사람의 죽음(순종, 박종철·이한열)이 기폭제가 됐으며, 둘 다 흩어져 있던 힘을 하나로 묶어낸 연대의 순간이었다.

1926년의 만세가 곧장 독립을 가져오지 못했듯, 그것이 헛된 것도 아니었다. 그 불씨가 다음 저항으로 이어졌다. 1987년의 함성도 마찬가지로, 앞선 4·19와 그 이전의 모든 외침 위에 서 있었다. 6월 10일은 그 계보를 한 줄에 꿰는 날짜로 남았다.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이, 시대를 건너 같은 날 거리에 섰다.

🏠 7월 7일, 메리 서랫 하숙집의 과부, 865년

🏠 하숙집 메리 서랫은 워싱턴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던 과부였다. 남편을 잃고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방을 세놓아 생계를 이었다. 그 집에는 아들 존의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젊은 남자들이 아들을 찾아와 방에 모이곤 했다. 어머니는 이따금 그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