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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11일 월요일

🌋 🔥5월 8일, 생피에르의 펠레 화산 폭발

 

🏛️ 생피에르는 19세기 후반 카리브해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였다. 마르티니크섬 북서부 해안에 자리잡은 이 도시는 인구 약 28,000명을 보유했고, 식민지 마르티니크의 경제 중심지 역할을 했다. 사탕수수와 럼주 무역이 도시 경제의 기반이었으며, 항구에는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잇는 상선이 끊이지 않았다.

도시는 돌로 포장된 도로, 가스등, 전차 노선을 갖추고 있었다. 1786년에 건립된 극장은 800석 규모로, 파리에서 건너온 오페라단이 정기적으로 공연했다. 식물원, 군사 병원, 도서관, 신학교가 있었고, 시내에는 신문사 두 곳이 운영되었다. 도시의 건축물 다수는 석조 2층 또는 3층 구조였으며, 발코니와 안뜰을 갖춘 프랑스풍 양식이 주를 이루었다. 당시 외국인 방문객들은 이 도시를 "서인도제도의 파리"라고 불렀다.

도시 북쪽 약 7km 지점에 펠레 화산이 있었다. 해발 1,397m의 이 산은 1792년과 1851년에 소규모 분출 기록이 있었으나, 두 경우 모두 인명 피해는 없었다. 주민들은 산을 위협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1902년 4월 23일, 펠레 화산에서 작은 진동과 분기공 활동이 관측되었다. 산 정상 부근에서 유황 가스가 분출되었고, 이틀 뒤인 4월 25일에는 화산재가 도시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4월 말까지 화산재는 도시의 거리, 지붕, 농지를 회색으로 덮었다. 산기슭의 강물 온도가 상승했으며, 일부 지류에서는 물이 끓는 현상이 보고되었다.

5월 초가 되자 산기슭 농촌 지역에서 동물들의 이상 행동이 나타났다. 살무사를 포함한 다수의 뱀이 산에서 내려와 인근 마을로 진입했다. 5월 5일경 프레셰르 마을에서는 뱀에 물려 가축 약 50마리와 어린이 여러 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시기 라이비에르 블랑슈에서 발생한 이류(泥流)로 사탕수수 공장 노동자 23명이 사망했다.

산기슭 마을의 주민들은 이 시점부터 생피에르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도시가 산에서 더 멀고, 인구가 많고, 행정 시설이 갖춰져 있어 안전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인구는 평소보다 수천 명 더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시기, 식민지 의회 선거가 5월 11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마르티니크 총독 루이 무테는 선거를 정상적으로 진행하려 했다. 생피에르는 그의 정치적 지지 기반의 핵심 지역이었다. 5월 7일, 총독은 과학자, 의사, 약사로 구성된 위원회를 소집했다. 위원회는 화산 활동을 검토한 후 도시는 즉각적인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고 결론지었다. 이 결론은 지역 신문 『레 콜로니』 5월 7일자에 게재되었다. 무테 총독은 자신의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 부인과 함께 5월 7일 저녁 생피에르에 입성했고, 시내 호텔에 숙박했다. 도시 외곽 도로에는 이주를 원하는 주민들의 이동을 통제하기 위해 군 병력이 배치되었다.

같은 날 저녁, 부두 노동자 루이-오귀스트 시파리스가 폭행 혐의로 시립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가 갇힌 독방은 감옥 부지 내 반지하 구조의 단독 감방으로, 두꺼운 석벽과 작은 환기구 하나만을 가진 형태였다.

5월 8일 오전 7시 50분경, 펠레 화산 분화구 부근에서 분출 활동이 시작되었다. 

약 8시 2분, 산의 남서쪽 측면에서 대규모 측방 분출이 발생했다. 분출물은 고온의 가스, 화산재, 화산암 파편의 혼합물로, 지표면을 따라 빠르게 흘러내렸다. 이 현상은 이후 화쇄류(pyroclastic flow)로 분류되었다. 분출물의 온도는 약 1,000°C, 이동 속도는 시속 약 670km로 추정된다.

화쇄류는 분출 후 약 1~2분 만에 생피에르에 도달했다. 도시 전체가 거의 동시에 화염과 가스에 노출되었다. 석조 건물의 벽이 무너졌고, 항구에 정박한 선박 18척 중 대부분이 화재를 입거나 침몰했다. 영국 선적 화물선 로담호 한 척만이 심하게 손상된 상태로 항구를 빠져나가 세인트루시아에 도착했다.

도시 내 사망자 수는 약 28,000명으로 추산된다. 무테 총독과 그의 부인을 포함한 행정 관료, 종교인, 상인, 노동자, 어린이가 모두 포함되었다. 사망 원인은 대부분 고온 가스 흡입에 의한 즉사로 판단되었다. 시신 다수는 사망 당시의 자세를 유지한 채 발견되었다.

생피에르 시내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두 명으로 공식 기록되었다.

루이-오귀스트 시파리스는 지하 독방에서 화상을 입은 채 발견되었다. 그는 분출 당시 환기구로 들어온 뜨거운 가스를 옷으로 막고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고 진술했다. 발견 시점은 분출 후 약 4일이 지난 5월 12일경이었으며, 그는 생피에르 외곽으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등과 다리에 심한 화상 흉터가 남았다.

레옹 콩페르-레앙드르는 도시 남쪽 변두리에 거주하던 28세의 구두 수선공이었다. 분출 당시 그는 자택 현관에 있었으며, 화쇄류의 영향이 상대적으로 약한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화상을 입은 상태로 약 6km를 이동해 인근 마을에 도달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직접 진술하여 기록을 남겼고, 1936년에 사망했다.

이외에 항구의 선박에 있던 선원과 승객 중 일부가 중상을 입은 채 구조되었으며, 도시 외곽 지역에서도 부상자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들 중 다수는 며칠에서 몇 주 안에 화상과 호흡기 손상으로 사망했다.

시파리스는 사면을 받은 후 미국 흥행사 바넘 앤 베일리 서커스단과 계약했다. 1903년부터 그는 미국 전역을 순회하며 전시 공연에 출연했다. 무대 위에는 그가 갇혔던 감방을 재현한 모형이 설치되었고, 시파리스는 화상 흔적이 남은 몸을 관객에게 보여주었다. 그의 출연은 약 10년간 이어졌으며, 이후 그는 공연 활동에서 물러났다. 1929년경 파나마에서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 일자와 장소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생피에르는 분출 이후 도시 기능을 회복하지 못했다. 식민지 행정 중심은 1902년 이후 포르드프랑스로 이전되었다. 현재의 생피에르는 인구 약 4,000명의 작은 마을이며, 1902년 분출의 잔해 일부가 사적지로 보존되어 있다. 시파리스가 갇혔던 감방의 석조 구조물은 현존하며, 마르티니크의 주요 관광지 중 하나로 운영되고 있다.

펠레 화산의 1902년 분출은 화산학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다. 프랑스 지질학자 알프레드 라크루아가 분출 직후 현장 조사를 수행했고, 그의 연구는 1904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 연구를 통해 화쇄류 현상이 체계적으로 정의되었으며, 이러한 형태의 분출은 이후 "펠레형 분출"로 분류되었다. 펠레 화산은 1929년부터 1932년까지 다시 분출 활동을 보였으나, 그 이후로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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