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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0일 나폴레옹의 이혼

      "나의 사촌들, 대신들, 그리고 귀족들이여. 지난 15년 동안 나의 삶을 아름답게 해주었던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지기로 한 나의 결정은 오직 프랑스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우리 사이에 후계자를 얻을 희망이 사라졌기에, 나는 개인적인 감정을 희생하고 국가의 이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황후의 지위와 명예를 영원히 유지할 것이며, 무엇보다 그녀는 나의 가장 친밀한 친구로 남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나를 위해 치른 이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1810년 1월 10일 나폴레옹 Napoléon.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자 황제이신 분의 허락을 얻어 선언합니다. 프랑스의 안녕과 정책을 위해, 그리고 제국의 앞날을 위해 후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저는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제 제 생애 가장 커다란 희생을 기꺼이 바치고자 합니다. 저는 이제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하지만 제가 황제의 곁에서 보낸 지난 세월의 명예와 사랑은 영원히 제 가슴속에 남을 것입니다. 저의 남편이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분께 저의 모든 충성과 사랑을 남겨둔 채 저는 떠납니다." 1810년 1월 10일 조세핀 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     황후의 싸인은 심하게 흔들렸으며 2014년 경매에서 43만 5천유로(6억원 이상)에 낙찰됐다. 나폴레옹의 사인이 든 이혼 서류는 프랑스 당국이 보관중이다. 

1월 9일 그래도 보고싶다 내 아들

      1940년생인 배은심은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녀는 광주에 살았다. 1980년에도 아이들은 무사히 커 주었다. 자랑스런 아들은 서울로 유학갔다. 1987년 6월 9일 그 아들이 최루탄에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겁지겁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혼수상태, 그리고 27일간을 그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최루탄에 맞아 피흘리는 아들의 사진이 전 세계 신문에 게재됐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군부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민주화 열기는 들불이 됐다. 결국 전두환, 노태우는 손을 들고 직선제를 선언했다. 아들은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7월 5일 어머니 배은심의 아들은 열사가 되어 숨을 거뒀다. 배은심은 아들의 뒤를 이어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녀는 초등학교만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더욱 단단하고 현실적이었다.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아들을 죽인 책임을 묻기로 했다. 서대문 경찰서장, 중대장, 소대장, 그리고 최루탄을 쏜 전투경찰 1인을 살인죄로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기각했다. 국가를 상대로한 민사소송도 이어졌다. 1억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아들의 핏값"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돈을 받지 않으면 국가에 귀속된다는 규정에 따라 수령했다.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다. 작은 집을 샀다. 그리고 "이한열 기념관" 현판을 달았다. 훈장도 달갑지 않았다. 그저 국가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명예를 되찾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함께 위로했다. “맘 단단히 먹소. 앞으로 더 기막힌 일이 많을 것이네.” [출처] “보고 싶다 내 아들, 이한열.” ‘이한열 어머니’ 배은심 친필 메모 | 작성자 여성동아     두 번 쓰러졌다. 2022년 1월 9일 오늘 새벽 또 쓰러졌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꾹꾹 눌러 쓴 작은 메모 하나 남겼다. "그래도 그립다 보고 싶다. 내아들, 이한열," 

1월 8일 그래도 지구는 돈다

      파도바 대학의 한 교수는 턱없이 부족한 교수 월급을 보충하기 위해 과학 기구를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망원경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통을 준비하고 그 양끝에 두 개의 유리 렌즈를 부착했다. 하나는 볼록이고 다른 하나는 오목했다. 그것으로 본 물체는 9배나 커보였다. 다시 60배의 성능으로, 또 1,000배로 확대해 볼 수 있는 뛰어난 성능의 망원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지상의 물체를 관찰할 때, 그는 천체를 관찰했다. 달을 관찰했다. 일반 대중은 당시 완전한 구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랬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망원경을 통해 달에도 지구처럼 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610년 1월 7일 어제, 더 개량된 망원경으로 목성 주위를 도는 4개의 위성을 발견했다.     1642년 1월 8일 오늘, 플로렌스 근교 아르체트리의 격리된 집에서 감금생활을 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사망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나직히 읊조렸다. 듣는 이는 없었다. 오늘은 상식이 됐다. 출처 : 지식의 원전 존 캐리 저, 바다 출판사 

1월 7일 백만번의 키스를 보내며

     "사랑하는 누나에게," 지금 밀라노에서는 오페라 공연이 한창이야. 그런데 누나, 공연하는 여가수가 얼마나 우스운지 몰라. 목소리는 너무 높아서 꼭 찔리는 소리 같고, 연기는 어찌나 어색한지!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차시지만, 나는 웃음이 나와서 혼났어. 누나, 누나의 이탈리아어 공부는 잘 되어가고 있니? 나중에 내가 돌아가면 꼭 이탈리아어로 대화해 보자. 이곳 사람들은 말끝마다 손을 흔드는데 참 재미있어. 우리가 내일 어디로 떠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하지만 어디에 있든 나는 누나를 생각할 거야. 누나의 손에 백만 번의 키스 를 보내며.     누나의 영원한 동생 - 볼프강 Wolfgang으로부터     1770년 1월 7일 

1월 6일 송아지의 아버지 탄생

      6.25 전쟁, 아내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군복무를 위해 남하한 남편을 찾아 피난길에 올랐다. 가산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아내의 재봉틀이 전부였다. 피난 도중 어린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재봉틀을 팔아 쌀을 장만했다. 어린 장남이 그 쌀자루를 맡았다. 그 와중에 아내와 아들이 헤어졌다. 아들은 쌀자루를 어느 청년이 들어 준다는 말에 내어 주었다. 청년의 발걸음은 빨랐다. 따라갈 수가 없었다. 따라가자니 뒤 따라 오는 어머니와 동생들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있자니 쌀을 놓칠 것 같았다. 아들은 어머니를 선택했다. 허겁지겁 뛰어온 아내는 울고 있는 아들과 그의 빈손을 보았다. "내 아들이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며 아들의 머리를 껴안았다. 아내와 아들은 아버지를 대구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1915년 1월 6일 오늘, 그 아내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시인 '박목월'이 탄생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상봉 이후의 역사는 3월 24일의 역사에서 

1월 5일 12,000프랑의 통조림

      나폴레옹에게 있어 군인이 상한 음식을 먹고 죽어 나가는 것은 전쟁 승패의 가장 큰 관건이라 여겼다. 냉장고가 나오려면 40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나폴레옹은 거액의 공모전을 기획했다. 병사들을 위한 안전한 음식의 저장방법에 대하여. 프랑스 요리사 '니콜라 아페르 Nicolas Appet'가 이 문제에 정답을 제시했다. 유리병에 음식을 넣어 가열한 후 밀봉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경이의 대상이었다, 재료를 수확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보존해 준다고 감탄했다.     1810년 1월 5일 오늘, '통조림의 아버지' 니콜라 아페르'가 나폴레옹의 공모전 상금 12,000프랑을 획득했다. 현재가치로 2억이 조금 안되는 금액이었다. 출처 : 음식과 요리 헤럴드 맥기 

1월 4일 점자의 탄생

     프랑스, 한 소년이 아버지의 공방에서 송곳에 눈이 찔렸다. 감염은 양쪽 눈의 시력을 모두 앗아갔다. 세 살 때였다. 소년은 지적능력이 뛰어났다. 교과서를 볼 수 없어 완전히 외워 버렸다. 소년은 군대의 야간 문자에서 힌트를 얻어 바늘로 종이를 찍어 자신만의 암호를 만들었다. 식재료통과 양념통에 새긴 표시를 손가락으로 읽어 설탕과 소금통을 정확히 구별했다. 1809년 1월 4일 오늘, 이렇게 점자를 창시한 '루이 브라이유 Louis Braille'가 태어났다.     '브라이유 Braille'는 '점자'를 뜻하는 일반 명사가 됐다. 

1월 3일 파문과 혼인

     중세, 가톨릭교회법은 사순절(Lent)기간에 육식은 물론 우유, 버터, 치즈등의 유제품 섭취도 금지했다. 올리브 오일이 풍부한 남유럽과 달리, 올리브가 자라지 않는 독일에선 버터가 필수적인 지방 섭취원이었다. 독일 사람들이 버터를 먹기 위해선 로마 교황청에 돈을 지불하고 '버터 섭취 허가증 Butterbrief'를 사야 했다.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이 시스템을 강력히 비난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좋은 버터를 먹기 위해 왜 로마에 돈을 내야 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돈벌이 수단으로 삼지 마라." 그의 논리는 독일 민중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1521년 1월 3일 오늘,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이자, 교수, 수도원 지구장인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최종 파문 당했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는 그가 수녀원에서 탈출시킨 수녀와 결혼했다. 

1월 2일 알함브라 Alhambra' 궁전의 추억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의 사비카 언덕의 흙은 붉은 빛을 띤다. 그 위에 '알 함라 Al-Hamra (붉은 것)'란 뜻의 궁전이 지어졌다. '알함브라 Alhambra' 궁전이다. 이슬람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궁전의 주인이 되기 위한 이슬람 왕조의 내전으로 국력은 분산, 약화됐다. 기독교 세력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사작전으로 도시와 궁전 주변의 농경지를 파괴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시민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궁전의 마지막 왕인 '보압딜'은 시민들의 안전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협약을 체결했다.     1492년 1월 2일 오늘, 보압딜은 알함브라 궁전의 열쇠를 기독교 왕에게 넘겨주며 항복했다. 그는 700년간 이어왔던 왕국과 아름다운 궁전을 뒤돌아보며 '한탄의 언덕'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쏘아 붙였다. "사내답게 지키지 못한 궁전을 위해 여자처럼 울지마라." 물론 항복의 조건인 시민의 안전은 지켜지지 않았다. 

1월 1일의 의지

  매년 1월 1일은 자신과의 약속의 날이였다. 의지의 날이였다. 누군가는 금연을, 누군가는 금주를, 누군가는 다이어트를, 누군가는 근육 만들기를, 누군가는 재테크를, 누군가는 책읽기를, .... 누군가는 또 다른 의지를 스스로 다짐했다. 비록 끝까지는 가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자신의 의지를 지키려 노력했다. 오늘이 그 날이다. 그리고 그 작은 의지는 스스로에겐 역사이기도 하다. 모두의 1월 1일 오늘, 그날 그날 알려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기억하며 알아가는 하루가 되고, 또 자신의 역사를 엮어 갈 수 있는 역사의 다이어리를 편찬한다. 자신만의 역사는 또 다른 거대한 역사가 된다. - 서문을 대신하여 1월 1일의 의지에 대하여 

1월 30일 처형 그리고 복수

  기타 기능 163cm의 단신에 심한 말더듬이 였던 찰스 1세는 왕권신수설과 교회의 예배의식을 의회에 강요했다. 그는 의회의 통제없이 세금을 걷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기사 서임에 수수료를 징수하고, 국왕이 헐값에 물건을 사들일 수 있는 강제매입권을 사용했으며, 작위를 마구 수여했다. 특히 이 시기에 관직 매매가 국왕의 주된 수입원이기도 했다. 이러한 수단들의 남용은 모든 계급의 반발만 불러 일으켰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의 귀족계급에 까지 영국국교회를 강요함으로써 종교적인 대반란의 불을 지폈다. 스코틀랜드 대귀족과 지주들은 소작인들의 무장과 도시민들의 자금 덕분에 강력한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정의 군사력은 그에 비할 바가 못되었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 의회와 동맹을 체결했고 그 중심엔 혜성처럼 나타난 '올리버 크롬웰'이 있었다. 이 잉글랜드 내전에서 참패한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도망쳐 투항했으나 스코틀랜드의 반군 세력은 돈을 받고 그를 크롬웰에게 인계한 후 잉글랜드에서 철수했다. ​ 1649년 1월 30일 오늘, 찰스 1세가 반란죄로 사형선고 후 처형됐다. 영국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처형 국왕이 됐다. 올리버 크롬웰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연방의 호국경이 되어 연방 최고 통치자가 됐다. 9년 후인 1658년 호국경 크롬웰이 사망하고 얼마 뒤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가 옹립되면서 왕정이 복고됐다. ​ 1661년 1월 30일 오늘, 찰스 2세는 자신의 아버지를 사형시킨 크롬웰의 시신을 무덤에서 파내어 목을 잘랐다. 찰스 2세는 일부러 오늘을 택했다. 크롬웰의 목은 웨스트민스터 홀 지붕위에 매달렸다. 20년 넘게 그곳에 있었다. 그리고 299년후에 땅에 묻혔다. ​ 출처 :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페리 앤더슨저

1월 31일 사회주의 국가의 맥도날드 햄버거

맥도날드 빅맥의 가격 3.75루블. 소련 노동자의 한 달 급여 약 150루블의 2.5%나 됐다. 한 달 버스 이용권이 3루블이었다. ​ 1990년 1월 31일 오늘, 소련 모스크바 푸시킨 광장에 소련 맥도날드 1호점이 문을 열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맥도날드 매장이었다. 30,000여명의 모스크바 시민이 첫 빅맥을 먹기 위해 수 킬로미터의 줄을 섰다. 첫번째 손님은 고아원의 아이들로 무료 햄버거를 제공 받았다. 소련은 오늘부터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약 2년 후 해체됐다. ​ 그리고 32년 후... ​ 2022년 3월 14일, 맥도날드의 상징인 노란색 M자 골든 아치가 철거됐다. 30,000여명의 모스크바 시민이 마지막 빅맥을 먹기 위해 수 킬로미터의 줄을 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