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생인 배은심은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녀는 광주에 살았다. 1980년에도 아이들은 무사히 커 주었다. 자랑스런 아들은 서울로 유학갔다.
1987년 6월 9일 그 아들이 최루탄에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겁지겁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혼수상태, 그리고 27일간을 그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최루탄에 맞아 피흘리는 아들의 사진이 전 세계 신문에 게재됐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군부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민주화 열기는 들불이 됐다.
결국 전두환, 노태우는 손을 들고 직선제를 선언했다.
아들은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7월 5일 어머니 배은심의 아들은 열사가 되어 숨을 거뒀다.
배은심은 아들의 뒤를 이어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녀는 초등학교만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더욱 단단하고 현실적이었다.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아들을 죽인 책임을 묻기로 했다. 서대문 경찰서장, 중대장, 소대장, 그리고 최루탄을 쏜 전투경찰 1인을 살인죄로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기각했다.
국가를 상대로한 민사소송도 이어졌다. 1억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아들의 핏값"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돈을 받지 않으면 국가에 귀속된다는 규정에 따라 수령했다.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다.
작은 집을 샀다. 그리고 "이한열 기념관" 현판을 달았다. 훈장도 달갑지 않았다.
그저 국가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명예를 되찾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함께 위로했다.
“맘 단단히 먹소. 앞으로 더 기막힌 일이 많을 것이네.”
[출처] “보고 싶다 내 아들, 이한열.” ‘이한열 어머니’ 배은심 친필 메모|작성자 여성동아
두 번 쓰러졌다. 2022년 1월 9일 오늘 새벽 또 쓰러졌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꾹꾹 눌러 쓴 작은 메모 하나 남겼다.
"그래도 그립다
보고 싶다.
내아들, 이한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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