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개봉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은 미국의 총기 문화를 정면으로 겨냥한 문제작이었다. 제목은 사건 당일 아침, 두 범인이 학교 볼링 수업에 참석했다고 알려진 데서 따왔다. 무어는 물었다. 왜 유독 미국에서만 이토록 많은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가. 캐나다도 총은 많다. 독일도, 프랑스도 폭력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년에 총기 관련 사망자가 미국은 1만 1천 명을 넘기고, 독일은 400명이 되지 않는다. 같은 총을 쥐고 왜 결과는 이토록 다른가.
무어의 답은 '공포'였다.
미디어는 매일 범죄와 위협을 쏟아내 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고, 그 불안은 총을 사게 만든다. 총이 많아질수록 사고는 늘고, 공포는 다시 커진다. 그는 NRA(전미총기협회)의 로비, 월마트와 K-Mart에서 아이들도 살 수 있는 값싼 탄약, 록히드 마틴 같은 군수산업이 자리 잡은 소도시의 풍경을 나란히 보여주며, 총기 폭력이 단순히 '미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미국 사회 전체가 빚어낸 구조의 문제임을 폭로했다.
영화는 아카데미 장편 다큐멘터리상을 받았고, 칸 영화제에서는 20분간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역대 가장 많이 본 다큐멘터리 중 하나가 되었다. 다큐멘터리란 것이 책상 위의 자료가 아니라 세상을 움직이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한 작품이었다. 특히 한 장면은 관객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무어는 콜럼바인 생존자 두 명을 K-Mart 본사로 데려갔다. 두 청년의 몸속에는 사건 당일 박힌 총알이 아직 남아 있었다. K-Mart에서 17센트에 팔린 그 총알이었다. 이 총알을 환불해달라고. 내 몸에 박힌 이 총알을. 기업의 홍보 담당자가 우물거리는 동안 카메라는 돌아갔다. 며칠 뒤 K-Mart는 전국 2천여 매장에서 권총 탄약 판매를 단계적으로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영화가 현실을 바꾼 드문 사례로 기록됐다.
그러나 영화가 받은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논란이 된 것은 NRA 회장 찰턴 헤스턴과의 인터뷰였다. 무어는 콜럼바인 참사 직후의 장면과 헤스턴이 총을 치켜들며 외친 "내 차가운 죽은 손에서부터"라는 장면을 연이어 붙였다. 관객은 헤스턴이 슬픔에 잠긴 도시에 뛰어들어 뻔뻔하게 총기 집회를 연 것처럼 느끼게 됐다. 그러나 그 연설은 사건 1년 뒤, 수백 마일 떨어진 다른 도시에서 한 것이었다. 덴버 NRA 회의 역시 주법상 취소가 불가능한 행사였고, 부속 행사는 대부분 취소된 상태였다. 무어는 이런 맥락을 지우고 자신이 원하는 결론에 도달했다. 다큐멘터리가 허용하는 '각색'의 선은 어디까지인가. 정당한 분노는 사실의 재배열을 면제해주는가. 영화가 20년 넘게 논쟁의 대상인 이유다.
1999년 4월 20일 오늘, 미국 콜로라도주 리틀턴의 콜럼바인 고등학교. 열여덟 살 에릭 해리스와 열일곱 살 딜런 클리볼드가 학교에 들어섰다. 두 사람은 학생 12명과 교사 1명을 살해했고, 20여 명에게 총상을 입힌 뒤 도서관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딜런의 어머니 수 클리볼드는 그 후 27년을 아들의 그림자와 함께 살아왔다.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내 아들이 그랬을 리 없다. 아들이 남긴 비디오를 보고서야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회고록 '어머니의 회계'를 썼고, 그 인세 전액을 자살 예방과 정신건강 연구에 기부했다. 2017년의 TED 강연 '내 아들은 콜럼바인 총격범이었습니다'는 조회수 2,600만 회를 넘겼다. 그녀는 말한다. 사랑이 보호막이 된다고 믿고 싶지만, 나는 몰랐다고. 아들의 고통을, 그리고 아들이 준비하고 있던 일을.
K-Mart는 2022년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NRA 역시 재정난과 소송에 시달린다. 찰턴 헤스턴은 2008년 알츠하이머로 세상을 떠났다.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둘 무대에서 퇴장했다.
그러나 총은 여전히 팔린다.
콜럼바인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학교 총기 난사만 70건이 넘는다. 샌디 훅 초등학교에서 스무 명의 아이들이 죽었다. 파크랜드 고등학교에서 열일곱 명이 죽었다. 유밸디 초등학교에서 다시 열아홉 명의 아이들이 죽었다. 학자들은 이 연쇄를 '콜럼바인 효과'라 부른다. 범인들의 이름을 기억하고, 그 방식을 모방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콜럼바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볼링 포 콜럼바인"은 그 시작을 가장 먼저, 가장 큰 목소리로 고발한 기록이었다. 영화는 답을 주지 못했다. 27년이 지난 지금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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