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 전부터 시작된 일
1933년, 나치 정권이 들어선 그날부터 한 가지 이미지가 독일인들의 머릿속에 천천히 주입되기 시작했다. 슬라브인은 "운터멘쉬(Untermensch)" — 인간 이하의 존재. 소련군은 "아시아적 야수 무리". 볼셰비키-유대인 동맹이 게르만 민족을 절멸시키려 한다는 서사.
이는 단발성 선전이 아니었다. 학교 교과서, 영화관, 신문, 라디오, 거리의 포스터. 매일같이, 작은 양으로, 12년에 걸쳐 부어졌다. 빅터 클렘페러가 「제3제국의 언어」에서 분석한 그대로 — 언어가 사고를 천천히 오염시키는 과정이었다.
네메르스도르프, 1944년 가을
1944년 10월, 동프로이센의 작은 마을 네메르스도르프(Nemmersdorf)에 소련군이 잠시 진입했다. 민간인 학살이 실제로 일어났다. 비극은 분명히 실재했다.
괴벨스는 이 사건을 거대한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로 재구성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여자들, 강간당한 여덟 살 소녀, 훼손된 시신들. 일부는 사실, 일부는 연출, 일부는 과장이었다. 영화는 전국 영화관에서 강제 상영되었다.
관객들은 영화관을 나오며 울었다. 그 이미지는 평생 사라지지 않았다.
베르볼프 방송, 1945년 봄
1945년 3월부터 비밀 라디오 베르볼프(Werwolf)가 송출되기 시작했다. 청취가 금지되었지만 사람들은 들었다. 메시지는 노골적이었다.
"항복하느니 죽음을. 적에게 잡히느니 가족과 함께 죽음을."
나치 이데올로기에는 "패전 후 평범한 삶"이라는 카테고리가 없었다. 승리하면 천년제국, 패배하면 절멸. 그 사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
또 다른 차원이 있었다.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무엇을 했는지, 시민들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민간인 학살, 마을 소각, 굶겨 죽이기, 유대인 절멸. 전선에서 편지가 돌아왔고, 휴가 나온 군인들이 술자리에서 떠벌렸으며, 라디오는 "동방의 정복"을 자랑스럽게 보도했다.
소련군이 다가온다는 것은 단순히 "야만인이 온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우리가 그들에게 한 일이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의미였다. 이 무의식적 인지가 공포를 증폭시켰다.
사흘간의 도미노
4월 28일. 무솔리니가 코모 호숫가에서 처형되었다. 시신은 밀라노 로레토 광장에 거꾸로 매달렸다. 군중이 침을 뱉고 발길질을 했다. 독일 라디오와 신문이 이 장면을 보도했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 적의 손에 들어가면 이렇게 된다.
4월 30일. 히틀러가 베를린 벙커에서 자살했다. 무솔리니의 최후를 듣고 그는 자신의 시신을 완전히 태워 없애라고 명령했다. 두체로서 자신을 본받았던 자가 맞은 결말 — 그는 그것을 무엇보다 두려워했다.
5월 1일. 괴벨스 부부가 자녀 여섯 명을 청산가리로 독살한 뒤 자살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데민의 어머니들이 강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데민, 5월 1일
데민(Demmin)은 페네, 톨렌제, 트레벨 — 세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놓인 인구 1만 5천 명의 한자동맹 도시였다. 4월 30일, 후퇴하던 독일 국방군이 페네 강의 다리들을 모두 폭파했다. 도시는 강에 둘러싸인 채 갇혔다. 빠져나갈 길이 없었다.
도시에는 동프로이센과 포메른에서 피난 온 수천 명의 난민이 몰려 있었다. 노인, 여자,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이미 몇 달간 끔찍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도망쳐 온 사람들이었다. 머릿속에는 네메르스도르프의 이미지가 새겨져 있었다.
5월 1일 오후, 소련 적군 제65군이 진입했다. 일부 부대의 약탈, 방화, 강간이 시작되었다. 보드카 창고가 털렸고, 만취한 군인들이 거리를 휩쓸었다. 도시 중심부 상당 부분이 불탔다. 강간 피해자의 연령은 8세에서 80세까지였다.
폭력은 실재했다. 그러나 자살자 다수는 폭력을 직접 겪기 전에 죽음을 택했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실제 경험한 폭력이 아니라, 12년간 머릿속에 이미 완성되어 있던 이미지였다.
강물 속으로
처음에는 한두 가족이었다. 그러다 전염처럼 번져갔다.
어머니들은 아이들의 외투 주머니에 돌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손을 잡고 페네 강으로, 톨렌제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떤 이들은 아이들을 먼저 익사시킨 뒤 자신도 뒤따랐다. 다락방에 모여 목을 맨 가족들. 권총으로 가족을 모두 쏜 뒤 자신을 쏜 아버지들. 독약, 면도칼, 손목 절단, 목 매달기. 가능한 모든 방법이 동원되었다.
어부들은 며칠 동안 강에서 시신을 건져 올렸다. 어머니가 아이를 끌어안은 채 떠오른 시신들. 가족 단위로 줄지어 있던 시신들.
숫자
가장 보수적인 추산은 약 700-1,000명. 일부 연구자들은 2,500명 이상으로 본다. 인구 1만 5천 명 남짓의 도시에서 며칠 사이 일어난 일이다. 인구의 5-15%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단일 도시에서 일어난 근현대 유럽 최대 규모의 집단 자살이었다.
침묵
전후 동독 시절 데민의 비극은 입에 올릴 수 없는 주제였다. "소련 적군은 해방자"라는 공식 서사를 거스를 수 없었다. 자살자들은 추모받지 못했고, 사건은 가족들 사이에서 속삭임으로만 전해졌다.
1990년 통일 이후에야 데민은 자신의 과거를 마주하기 시작했다. 2005년부터 매년 5월 1일, 도시에서는 추모식이 열린다.
🕯️ 마지막 작동
선전의 진정한 무서움은 그것이 결국 선전가 자신마저 삼킨다는 점이다. 괴벨스는 자신이 평생 만든 공포의 메커니즘을, 마지막에 자기 자녀들에게 적용했다.
데민의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의 결정으로 그 일을 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은 12년 전부터 누군가가 그들의 머릿속에 천천히 채워 넣은 결정이었다.
이데올로기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도록 그들의 상상력을 식민화한다.
페네 강은 지금도 데민을 가로질러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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