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렌(Irène)》: 사랑과 의무의 파멸적 충돌
볼테르의 마지막 비극 《이렌》은 11세기 비잔티움 제국을 배경으로 가공된 권력과 도덕의 사슬을 그린다. 주인공 이렌은 원치 않는 황제 니세포르와 결혼했으나, 마음속에는 옛 연인 알렉시 장군을 품고 있었다. 황제가 질투 끝에 알렉시를 제거하려다 도리어 목숨을 잃고 알렉시가 권력을 잡자, 이렌은 거대한 딜레마에 직면한다.
자신을 억압하던 남편일지라도 그를 죽인 자와 결합할 수 없다는 종교적·도덕적 책무, 그리고 수녀원 입성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아버지가 그녀를 압박한다. 결국 이렌은 인간적 열망과 경직된 사회적 의무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한다.
💡 연극의 탈을 쓴 계몽주의 고발장
이 신파적 비극의 이면에는 볼테르가 평생을 바쳐 싸운 계몽사상이 관통하고 있다. 볼테르는 이렌의 자살을 통해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복과 자유를 억압하는 교조적인 종교 도덕률의 잔인함을 폭로한다.
자신의 이성이 아닌 관습과 제도의 노예가 된 인물들, 딸의 안위보다 가문의 명예를 중시하는 가부장적 인물은 당대 프랑스 구체제(Ancien Régime)의 모순을 그대로 투영한다. 즉, 《이렌》은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파멸로 몰고 가는 불합리한 권위와 광신주의를 향한 우회적이고도 매서운 비판이다.
🕯️ 거인의 마지막 불꽃과 5월 30일의 영면
인간 볼테르의 말년은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드라마였다. 권력의 탄압을 피해 28년간 망명길을 떠돌던 이 여든셋의 노학자는 생애 마지막 해에 고향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 시민들은 그를 단순한 문학가가 아닌, 지성의 해방을 이끈 거인으로 추앙하며 열광했다. 자신의 작품 《이렌》의 공연장에서 쏟아진 폭발적인 기립박수는 그의 생애 가장 찬란한 정점이었다.
그러나 노구에 가해진 과도한 흥분과 격정은 영혼을 갉아먹었다. 가톨릭교회의 부패를 끊임없이 난타했던 그였기에, 임종이 다가와도 교회의 권위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결국 1778년 5월 30일, 볼테르는 이성의 횃불을 든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교회의 거부로 파리 땅에 묻히지 못하고 밤을 틈타 외곽의 수도원에 비밀리 안장되어야 했던 그의 마지막은 군주들의 권력보다 매서웠던 한 지식인의 투쟁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가 뿌린 자유와 평등의 씨앗은 불과 10여 년 뒤 프랑스 혁명이라는 거대한 불꽃으로 피어올랐고, 그의 유해는 끝내 국가적 영웅들의 안식처인 판테온에 엄숙히 안치되었다. 신의 독점물이었던 세상을 인간의 이성으로 되돌려놓은 거인, 그의 삶은 5월의 마지막 날 그렇게 역사이자 불멸이 되었다.
볼테르가 타계한 이듬해인 1779년 파리에서 출간된 비극 《이렌(Irène)》의 역사적인 초판본 속표지입니다. 표지에는 작품의 제목과 저자인 볼테르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 파리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던 1778년 3월 16일의 첫 상연 기록과 당시 책 가격이었던 '36솔(Sols)'이 고스란히 적혀 있습니다. 중앙에 새겨진 고풍스러운 아기 천사 판화와 거친 수제 종이의 질감은 신의 독점물이었던 세상을 인간의 이성으로 돌려놓고자 했던 거인의 마지막 숨결을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전해줍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