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폭풍 전야
1967년의 서독은 표면만 보면 번영의 나라였다. 전후의 폐허에서 불과 이십여 년 만에 유럽 최강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선 서독을 세계는 기적이라고 불렀다. 독일어로 Wirtschaftswunder(비르트샤프츠분더), 말 그대로 '경제 기적'이었고, 한국에서 훗날 자국의 고도 성장을 빗대어 '라인강의 기적'이라 부를 때 그 원형으로 삼았던 바로 그 시대였다. 아데나워의 긴 보수 집권이 막을 내린 뒤 기민당과 사민당이 손을 잡고 대연정을 구성했으니 겉으로는 안정된 나라였지만, 야당이 사실상 사라진 의회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젊은이들은 그 질문을 품은 채 거리로 나오기 시작했다.
대학가의 공기는 달랐다. 베트남전의 참상이 매일 신문 1면을 채웠고, 강의실 안의 교수들 상당수는 나치 시절을 침묵으로 통과한 세대였다. 학생들은 서서히 알아가고 있었다. 이 사회가 과거를 청산한 것이 아니라 번영이라는 카펫 밑에 그냥 쓸어넣었다는 것을. 그 분노를 조직한 것이 SDS, 사회주의 독일학생연합이었다. 루디 두치케라는 청년이 "체제 안에서의 긴 행진"을 외치며 광장을 채웠지만, 1967년 봄, 그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6월이 왔다. 이란의 샤,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가 서독을 국빈 방문한다는 소식과 함께. 학생들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CIA의 지원으로 민선 총리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비밀경찰 사바크(SAVAK)로 반대파를 탄압해온 독재자가 서방 민주주의의 귀빈으로 대접받으러 온다는 사실이 그들을 거리로 끌어냈다.
🌆 2부. 6월 2일
베를린의 초여름 저녁은 길다. 오후 여섯 시가 넘어도 하늘이 아직 밝은 그 시간에, 도이체 오퍼 앞 광장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팔레비가 그날 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관람하러 이 극장에 들어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광장 반대편에 낯선 무리가 있었다. 정장 차림의 이란인들로, 손에는 왕실 부부의 초상화가 달린 깃발을 들고 있었다. 겉으로는 열렬한 지지자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연출된 모습이었다. 이란 비밀경찰 사바크가 서독으로 공수해 온 약 150명의 요원과 고용 깡패들이었다. 팔레비의 방문이 해외에서도 환영받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공작이었고, 그들의 코트 안에는 몽둥이와 쇠막대가 숨겨져 있었다. 나중에 주타루삭(Jubelperser), 환호하는 페르시아인들이라고 불리게 될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서베를린 경찰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거나 못 본 척하고 있었다.
그들이 먼저 달려들었다. 몽둥이가 학생들의 머리 위로 내리꽂히는 혼란 속에서 경찰은 제지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고, 베노 오네조르크도 달렸다. 스물여섯 살의 독문학 대학원생이었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내의 배 속에는 첫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날이 그의 생애 첫 번째 시위였다. 그는 오페라 극장 뒤편의 좁은 골목, 크룸메 슈트라세(Krumme Straße) 66번지 안마당으로 몸을 피했다.
그를 따라 그 골목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었다. 사복 차림에 코트를 걸친 남자였다. 총성은 한 번이었다. 오네조르크는 뒤통수에 총을 맞고 쓰러졌고,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그날 밤을 넘기지 못했다.
⚖️ 3부. 무죄
사복 차림의 남자는 카를-하인츠 쿠라스, 서베를린 경찰 형사였다. 그는 군중에게 위협을 느껴 불가피하게 총을 썼다고 주장했다. 재판이 열렸지만 내내 이상한 일들이 이어졌다. 쿠라스에게 불리한 목격자 진술들은 기록 과정에서 무게를 잃었고, 다른 경찰관들은 동료를 기억하는 방식으로만 그날을 기억했다. 부검을 담당한 의료진은 총상 보고서를 허위로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다. 피해자는 비무장이었고 등 뒤에서 총을 맞았지만, 1967년 11월 법원은 쿠라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항소하지 않았고, 경찰 내부 징계도 없었으며, 쿠라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로 복귀했다.
작가 귄터 그라스는 오네조르크의 죽음을 "연방공화국 최초의 정치적 살인"이라고 불렀다. 그 말은 국가 권력이 시민의 죽음을 덮고, 법원이 그것을 합리화하고, 검찰이 침묵하는 광경을 목격한 세대에게 살아 있는 현실의 언어였다.
✊ 4부. 봉기, 그리고 그 결과
오네조르크의 죽음과 무죄 판결은 학생운동의 성격 자체를 바꾸어놓았다. 체제를 비판하던 분노가 체제가 근본적으로 부패했다는 확신으로 굳어졌고, 시위대는 반파시즘의 기치를 내걸며 더 급진적인 언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굳을 대로 굳어버린 사회 구조를 쳐부수어야 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제도가 사실은 일상의 파시즘을 온존시키는 보루에 불과하다는 것, 가면을 쓴 기득권 엘리트를 계몽된 대항 엘리트로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학 강당과 거리를 채웠다.
오네조르크의 관이 서베를린에서 고향 하노버로 운구되던 날, 동독 검문소를 통과하는 그 여정에 1만 5천 명이 함께했다. 베를린에서 시작된 저항의 물결은 뮌헨,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로 번져나갔고, 1968년이 되자 세계가 동시에 들끓었다.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탱크에 짓밟혔고, 파리에서는 학생과 노동자가 함께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서독에서는 1968년 부활절 주간에 루디 두치케가 청년 네오나치에게 총격을 당했다. 세 발의 총을 맞고도 살아남았지만 후유증으로 끝내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분노한 시위대는 두치케를 악마화해온 슈프링어 계열 신문사들 앞으로 몰려들어 배달 차량을 막고 인쇄소를 봉쇄했다. 전후 서독 역사상 최대의 거리 저항이었다.
이 봉기는 혁명을 이루지는 못했다. 대연정은 흔들리지 않았고 비상사태법은 의회를 통과했으며, 일부 급진파들은 환멸 속에 지하로 내려가 훗날 적군파(RAF)의 씨앗이 되었다. 그러나 더 길게 바라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68운동은 서독 사회의 문화적 지형을 바꾸어놓았다. 나치 과거에 대한 본격적인 청산 논의가 시작됐고, 대학의 권위주의적 구조가 흔들렸으며, 이 세대 중 상당수는 두치케가 말했던 체제 안에서의 긴 행진을 실제로 걸어 훗날 교사, 언론인, 정치인이 되었다. 1969년 빌리 브란트의 사민당 집권과 동방정책도 그 거대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았다.
🔄 5부. 반전
냉전이 끝나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통일 독일은 슈타지가 남긴 방대한 문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2009년 봄, 슈타지 문서 보관소의 연구자들이 다른 프로젝트를 조사하던 중 우연히 한 파일을 발견했다. 암호명 "오토 볼(Otto Bohl)". 파일을 추적하자 실명이 나왔다. 카를-하인츠 쿠라스였다.
1955년, 젊은 서베를린 경찰관이었던 쿠라스는 스스로 동베를린의 동독 당국을 찾아가 동독으로 넘어가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슈타지는 그를 동독으로 데려가는 대신 서베를린 경찰 내에 남겨 스파이로 활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포섭된 쿠라스는 이후 수십 년간 암호명 "오토 볼"로 서베를린 경찰의 기밀 정보를 동독에 넘겼다. 슈타지 문서에는 그가 이념적 확신에서 협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그는 슈타지의 추천으로 동독 공산당(SED)의 비밀 당원이 되기까지 했다. 총격 사건 6일 후, 슈타지가 쿠라스에게 보낸 암호 전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사건을 유감스러운 불의의 사고로 간주한다."
폭로 이후 기자들이 그의 집 앞으로 몰려갔다. 당시 여든이 넘은 쿠라스는 문을 열어 슈타지 협력 사실을 인정했다. 동독 공산당원이었던 것도 부끄럽지 않다고 했다. 그러나 총격은 어디까지나 정당방위였으며 첩자 활동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말을 마친 그는 문을 닫았다. 슈타지 문서에도 총격과 첩자 활동을 연결하는 직접적인 지령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첩자가 하필 그날 밤, 그 좁은 골목에 총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역사가들이 지금도 떨쳐내지 못하는 질문으로 남아 있다.
🕰️ 6부. 공소시효
베를린 검찰은 오래된 파일을 다시 꺼냈지만, 1967년의 사건은 공소시효가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새로운 사실이 드러나도 법정에 다시 세울 법적 근거가 없었다. 불기소 결정이 내려졌다.
오네조르크의 아들은 그 결정을 들었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 아버지를 잃은 사람이었다. 법이 할 수 없다면 역사가 기억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쿠라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에필로그
카를-하인츠 쿠라스는 2014년 12월,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향년 87세였다. 사과도, 재판도, 법적 처벌도 없었다. 슈타지가 그에게 총격을 지시했다는 증거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없다는 것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슈타지는 문서 일부를 파쇄했고, 파쇄된 것은 읽을 수 없으니까.
크룸메 슈트라세 66번지 골목은 지금도 있다. 그 안마당을 오늘도 사람들이 지나친다. 1967년 6월 2일 저녁, 거기서 어떤 총성이 울렸는지, 그 한 발이 한 청년의 생명을 거두고 임신한 아내를 홀로 남겨두고 한 나라의 세대를 뒤흔들었는지, 총을 쥔 손이 누구의 의지를 따르고 있었는지를 모른 채.
베노 오네조르크, 1940–1967.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참고: 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 역사》(Kleine Deutsche Geschich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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