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8년 5월 14일 자정, 영국 위임통치가 공식 종료되었다. 하이파 항구에서 마지막 영국군 함선이 출항했고, 예루살렘에서는 영국 고등판무관 앨런 커닝햄이 떠났다. 그 순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라는 법적 실체가 사라졌다.
같은 시각 텔아비브에서는 몇 시간 전 선포된 신생 국가가 첫 밤을 맞고 있었다. 그러나 자정을 넘긴 그 땅의 다수 주민에게 같은 시간은 다른 의미였다. 자신들이 살아온 마을과 도시가 새로운 국가의 영토 안에 편입되거나, 곧 닥칠 전쟁의 진로 위에 놓이게 된 시각이었다.
다섯 나라의 침공
5월 15일 새벽, 이집트·요르단·시리아·레바논·이라크 다섯 나라의 정규군이 국경을 넘었다. 제1차 중동전쟁의 시작이었다.
각국의 명분은 "팔레스타인 아랍인 보호"였지만 실제 동기는 달랐다. 요르단의 압둘라 1세는 영국이 훈련시킨 아랍 군단을 이끌고 동예루살렘과 서안을 노렸다. 이집트의 파루크 1세는 압둘라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려 했다. 시리아·레바논·이라크는 각자의 영향력을 주장했다. 통합 사령부는 없었고, 작전 조율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병력은 합산 약 2만 5천에서 3만 5천 명으로, 이스라엘이 동원한 약 3만 명과 큰 차이가 없었다. 초기 며칠 동안 전선이 위태로웠지만, 6월의 첫 휴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제 무기가 대량 도착하면서 균형이 기울기 시작했다.
"나크바"의 의미
아랍어 **나크바(al-Nakba)**는 "재앙"을 뜻한다. 시리아 역사가 콘스탄틴 주레이크가 1948년 8월 출간한 책 『재앙의 의미(Ma'na al-Nakba)』에서 이 용어를 정착시켰다.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한 사회의 해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나크바는 5월 15일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1947년 11월 분할안 통과 직후의 내전 단계에서 이미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정규군 침공과 함께 그 규모가 결정적으로 커졌고, 5월 15일은 이후 팔레스타인인들의 집단 기억에서 그 모든 과정을 상징하는 날이 되었다.
약 70만 명의 실향
1947년 말부터 1949년 휴전까지 약 1년 반 동안,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이 고향을 떠났다. 당시 팔레스타인 아랍 인구의 절반을 넘는 숫자였다.
떠난 경위는 균일하지 않았다. 전투를 피해 일시적으로 피난한 경우, 마을 지도자나 주변 아랍 국가의 권유로 떠난 경우, 그리고 이스라엘군의 직접적 추방으로 떠난 경우가 모두 있었다. 1980년대 이후 이스라엘 국립문서고가 일부 공개되면서, 이스라엘 역사학자 베니 모리스 등이 추방·강제 이주의 비중이 과거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컸음을 문서로 입증했다. 이들은 "신역사학자"로 불린다.
대표적 사건은 1948년 4월 9일 데이르 야신이었다. 예루살렘 인근 아랍 마을을 이르군·레히 무장조직이 공격해 약 100여 명의 주민이 살해되었다. 이 소식은 라디오를 통해 빠르게 퍼졌고, 이후 다른 지역 주민들의 피난 결정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5월에서 7월 사이에는 리다(Lydda)와 람라(Ramla) 사건이 있었다. 이스라엘군이 두 도시를 점령하면서 약 5만~7만 명의 주민이 며칠 만에 동쪽으로 추방되었다. 작전을 지휘한 사람은 이츠하크 라빈이었고, 추방 명령에는 벤구리온의 손짓 한 번이 결정적이었다고 라빈은 회고록에 적었다.
사라진 마을들
전쟁 기간 동안 약 400~500개의 팔레스타인 아랍 마을이 파괴되거나 인구가 교체되었다. 일부는 폭파되었고, 일부는 새로운 유대인 정착촌으로 재편되었으며, 일부는 숲으로 덮였다. 유대민족기금이 식수한 소나무 숲들 아래에 사라진 마을의 잔해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지명도 바뀌었다. 아랍어 이름들이 히브리어 이름으로 대체되었다. 사파드 인근의 아인 자이툰은 사라졌고, 자파 항구도시는 텔아비브에 흡수되었다. 한 사회의 지리적 흔적이 빠르게 지워졌다.
휴전과 그린 라인
전쟁은 1949년 초까지 이어졌고, 유엔 중재 아래 이집트(2월), 레바논(3월), 요르단(4월), 시리아(7월)와 각각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선은 녹색 잉크로 지도에 그려져 **그린 라인(Green Line)**이라 불렸다.
이스라엘은 유엔 분할안에서 할당받은 영토보다 훨씬 넓은 지역을 확보했다. 분할안의 약 55%에서 휴전선의 약 78%로 늘어났다. 남은 22%는 두 부분으로 나뉘었다. **서안(West Bank)**은 요르단이 병합했고, 가자 지구는 이집트의 군정 아래 놓였다. 둘 다 팔레스타인인의 국가가 되지 못했다.
예루살렘은 분할되었다.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이 통제했고, 두 구역 사이에 콘크리트 벽과 철조망이 세워졌다. 유엔이 결의했던 "국제 관리지역"은 실현되지 못했다.
난민의 영구화
전쟁이 끝났을 때 약 70만 명의 팔레스타인 아랍인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태였다. 1948년 12월 유엔 총회는 결의안 194호로 귀환권을 명시했지만, 이행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안보 위협과 인구 균형을 이유로 귀환을 거부했고, 주변 아랍 국가들도 정치적 이유로 난민의 시민권 부여를 거부했다(요르단은 예외).
1949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난민 구제 기구 UNRWA를 설립했다. "임시" 기구였다. 76년이 지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다.
난민 캠프는 요르단·레바논·시리아·서안·가자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천막이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콘크리트로 바뀌었다. 그러나 법적 지위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등록된 70만 명은 3대, 4대를 거치며 약 600만 명으로 늘었다. 모두 공식적으로 "난민"이다.
잊혀진 지도자, 부재한 사령부
5월 15일의 아랍 측에는 단일한 지도자가 없었다. 명목상 대표였던 예루살렘 무프티 하지 아민 알 후세이니는 카이로에 망명 중이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협력 이력으로 국제사회의 신뢰를 잃은 상태였다. 1936~39년 아랍 대봉기 진압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자체 군사력은 이미 소진되어 있었다. 야전 지휘관 압드 알 카디르 알 후세이니는 5월 침공 한 달 전인 4월 8일 카스텔 전투에서 전사했다.
실제 군사력은 다섯 외국 정부가 보유했고, 각자의 이해관계로 움직였다. 팔레스타인 주민 자신을 위해 싸우는 통합 사령부는 존재하지 않았다. 한쪽에는 28년간 준비된 그림자 국가와 단일 지도자가 있었고, 다른 쪽에는 분열된 사회와 부재한 지도자가 있었다. 1948년의 결과는 그 비대칭 위에서 결정되었다.
두 개의 5월
이스라엘인에게 5월 14일은 요움 하아츠마우트(Yom Ha'atzmaut), 독립기념일이다. 2,000년 만의 귀환을 축하하는 날이다.
팔레스타인인에게 5월 15일은 요움 알 나크바(Yawm al-Nakba), 재앙의 날이다. 1998년 야세르 아라파트가 이날을 공식 기념일로 지정했다. 같은 24시간이 두 민족에게 정반대의 기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끝나지 않은 24시간
나크바는 1948년에 끝난 사건이 아니었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추가 30만 명이 실향했다. 그 이후 정착촌 확장, 강제 철거, 거주권 박탈로 새로운 실향민이 계속 발생해 왔다. 가자 지구는 그 구조가 가장 응축된 곳이다. 면적 365㎢에 약 230만 명이 거주하는데, 이 중 약 70%가 1948년 나크바 난민과 그 후손이다.
5월 15일의 24시간은 1949년 휴전선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형태를 바꿔가며 78년째 이어지고 있다. 한 민족의 귀환이 다른 민족의 추방을 동반했고, 그 추방이 영구화된 구조 위에서 두 민족 모두가 지금까지 살아가고 있다.
벤구리온이 5월 14일 일기에 적은 문장은 그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 — "우리의 운명은 군인들 손에 있다." 그러나 그 다음 날부터 시작된 24시간은 다른 민족의 운명도 함께 결정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고서적 : 유대인은 왜? - 르몽드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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