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섬의 비극은 800년 전에 시작되었다. 1169년 노르만이 아일랜드에 상륙한 이래, 잉글랜드는 점차 이 섬을 자신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결정적인 균열이 생긴 것은 16세기였다. 헨리 8세가 로마 교회와 결별하고 잉글랜드 국교회를 세웠을 때, 아일랜드인들은 가톨릭 신앙을 고수했다. 이때부터 종교는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정복자와 피정복자를 가르는 표지가 되었다.
17세기 초, 영국 왕실은 아일랜드 북부 얼스터 지방에 대규모 식민 사업을 벌였다.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건너온 개신교도들이 토착 가톨릭 주민들의 땅을 차지하고 정착했다. 이것이 오늘날 북아일랜드 개신교 공동체의 뿌리다. 1649년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피로 물들였고, 1690년 보인 전투에서 개신교 세력은 가톨릭 왕에 맞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가톨릭은 토지도, 권력도, 교육도 빼앗긴 채 19세기까지 살아갔다.
1845년 시작된 감자 대기근은 이 적개심에 결정적인 무게를 더했다. 🥔 100만 명이 굶어 죽고 100만 명이 섬을 떠나는 동안, 영국은 아일랜드의 곡물을 계속 수출했다. 살아남은 자들과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들의 자손들은 영국에 대한 분노를 잊지 않았다.
20세기 초, 영국 정부가 아일랜드 자치를 추진하자 얼스터의 개신교도들이 들고일어났다. 가톨릭이 다수인 더블린 의회의 지배를 받느니 무장 저항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1912년 결성된 얼스터 의용군(UVF)이 그 상징이었다. 양측의 긴장은 결국 1916년 부활절 봉기와 독립전쟁으로 폭발했고, 1921년 영국은 타협안을 내놓았다. 아일랜드 섬을 둘로 나누되, 개신교 다수가 보장되는 북부 6개 주는 영국령으로 남기는 것이었다. 이렇게 북아일랜드가 탄생했다.
분단된 북아일랜드는 평등한 사회가 아니었다. 인구의 3분의 1이 넘는 가톨릭은 투표에서, 주거에서, 일자리에서 체계적으로 배제되었다. 1960년대 후반 미국 흑인 민권운동에 영감을 받은 가톨릭 청년들이 거리로 나섰고, 그들을 맞이한 것은 경찰의 곤봉이었다. 1969년 폭동이 번지자 영국군이 들어왔고, 1972년 피의 일요일에 비무장 시민 열네 명이 공수부대의 총에 쓰러지면서 사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분쟁(The Troubles)이라 불린 이 무력 충돌은 30년간 3,500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974년 5월 17일 오늘 금요일 오후, 아일랜드 공화국의 수도 더블린은 평범한 퇴근길이었다. 💥 5시 30분, 시내 세 곳에서 거의 동시에 자동차 폭탄이 터졌다. 26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한 시간 뒤, 국경 도시 모나한의 술집 앞에서 네 번째 폭탄이 터져 7명이 더 죽었다.
사망자는 모두 33명, 거기에 막달에 가까웠던 한 여성의 뱃속 아이까지 합하면 34명이었다. 부상자는 300명에 달했다. 분쟁 전 기간을 통틀어 단 하루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날이었다.
범인은 곧 충성파 무장조직 UVF로 좁혀졌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차량 네 대를 같은 시각에 정확히 터뜨리는 정교한 작전을 UVF가 단독으로 수행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뒤였다. 북아일랜드 경찰은 용의자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아일랜드 경찰에 정보를 거의 주지 않았고, 명백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체포되지 않았다. 수사는 그해 안에 사실상 종결되었다. 이 사건으로 형사 처벌을 받은 사람은 50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없다.
세월이 흐르면서 무엇이 있었는지 조금씩 드러났다. 🔍 UVF에는 글레난 갱이라 불리는 한 무리가 있었는데, 그 안에는 현역 영국군 군인과 북아일랜드 경찰관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분쟁 기간 동안 100건이 넘는 살인에 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2003년 아일랜드의 헨리 바론 판사가 작성한 보고서는 영국 보안기관이 사건에 개입했을 강력한 정황 증거를 제시했고, 2006년 미국 변호사가 작성한 별도 보고서도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영국 정보기관이 충성파 조직 내부에 정보원을 운용하면서 그들의 범죄를 알고도 묵인했다는 사실은 다른 사건들에 대한 조사를 통해서도 거듭 확인되었다. 2012년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다른 사건과 관련해 "충격적인 수준의 국가 공모"를 공식 인정하고 사과한 바 있다.
그러나 더블린·모나한 사건에 대해서는 영국이 입을 닫고 있다. 🔒 아일랜드 의회는 2008년, 2011년, 2016년 세 차례나 만장일치로 영국에 관련 문서를 공개하라고 요구했지만, 노동당이든 보수당이든 영국 정부는 "국가 안보"를 이유로 거부해 왔다. 2023년 영국이 제정한 분쟁 유산법은 아예 분쟁 시기 사건에 대한 추가 수사 자체를 차단했고, 아일랜드 정부는 이 법을 유럽인권재판소에 제소했다.
피해자 가족들은 1996년 "잊혀진 자들을 위한 정의(Justice for the Forgotten)"라는 단체를 만들어 진상 규명을 요구해 왔다. 아일랜드 정부는 제한적으로나마 보상금을 지급했지만, 영국 정부의 공식 사과나 보상은 지금까지 없다. 사건 발생 50년이 지난 2024년 5월, 더블린 탤벗 거리의 추모비 앞에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 그러나 그 자리에 직접 피해를 입었던 이들 중 살아 있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아일랜드 정부는 그날도 영국에 문서 공개를 요구했지만, 돌아온 답은 없었다.
분쟁은 1998년 벨파스트 협정으로 공식적으로 끝났다. 🕊️ 무기는 폐기되었고, 가톨릭과 개신교는 권력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2022년 인구조사에서는 처음으로 북아일랜드의 가톨릭 인구가 개신교 인구를 넘어섰고, 신페인이 제1당이 되었다. 그러나 1974년 5월의 그 금요일 오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은 아직 답을 얻지 못한 채 남아 있다. 영국의 문서고 어딘가에 그 답이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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