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벽
1961년 5월 16일 새벽 세 시. 한강대교에서 총성이 울렸다.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해병대와 공수단 약 삼천칠백 명이 한강을 건넜다.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보낸 헌병 한 개 중대가 다리 위에서 잠시 막아섰지만, 길지 않았다. 쿠데타군은 서울 시내로 들어와 중앙청, 육군본부, 국방부, 중앙방송국, 시청을 차례로 점령했다.
새벽 다섯 시,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당직 아나운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원고를 읽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 미명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입법·사법의 삼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뒤이어 혁명공약 여섯 항목이 낭독됐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겠다는 것, 유엔헌장을 준수하겠다는 것, 부패를 일소하겠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항목 — 민정 이양의 시점이 오면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겠다는 약속. 이 마지막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다.
오전 아홉 시, 군사혁명위원회 명의로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옥내외 집회 금지. 언론 사전검열. 야간 통행금지. 오후에는 국회와 지방의회가 해산됐고,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의 활동이 금지됐다. 4·19 혁명으로 출범한 장면 내각은 출범 9개월 만에 사라졌다. 시민들이 손에 쥐고 있던 민주주의의 짧은 봄 — 4월의 함성으로 쟁취하고 13개월 동안 누렸던 그 봄 — 이 하루 새벽에 끝났다.
어느 대위
표면적으로 쿠데타는 성공한 듯 보였다. 안쪽 사정은 달랐다.
동원된 병력은 사천 명을 넘지 않았다. 육십만 대군의 일 퍼센트도 안 되는 숫자였다. 1군 사령관 이한림은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과 그린 미국 대리대사는 공개적으로 반대 성명을 냈다. 윤보선 대통령은 하야 의사를 비쳤다가 다시 거두기 시작했다. 거리의 시민들은 박수를 치지도, 야유를 보내지도 않았다. 침묵은 가장 위험한 신호였다.
쿠데타에 가장 부족한 것은 무력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이 거사가 폭력이 아니라 환영이라는 그림. 야망이 아니라 정의라는 그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ROTC 교관실에서 라디오로 그 새벽 방송을 들은 한 대위가 있었다. 만 서른, 육사 11기. 군의 위계 속에서 그가 차지한 자리는 좁았다. 그의 위로는 일곱 계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라디오 너머의 그 소장을 알고 있었다. 일면식이 있었고, 한때 그 소장이 자기에게 부관 자리를 제안한 적도 있었다. 그 소장의 현 부관은 그의 육사 동기였다.
그 새벽, 그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라디오 너머의 그 사람에게 오늘 쓸모 있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무엇이 쓸모 있을지도 알았다. 그가 졸업한 학교, 태릉 육사. 깨끗한 회색 제복을 입은 사관생도 팔백 명. 그들이 거리에 줄지어 서서 거사를 지지한다고 외치는 장면 — 그것이 쿠데타에 부족한 그림을 채워줄 것이었다.
두 겹의 자물쇠
그러나 그가 동기들을 모아 태릉으로 향했을 때, 일은 이미 결판이 나 있었다.
같은 생각을 거사 우두머리들이 먼저 했다. 그들은 이미 육군사관학교 교장 강영훈 중장에게 요청했다. 그리고 강영훈은 이미 거절했다.
거절의 내용은 분명했다.
"생도들을 정치에 쓰지 마시오. 후배들에게도 민주주의를 하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겠소."
강영훈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그는 생도들 앞에서도 같은 입장을 밝혀두었다.
"너희 선배들이 정치에 가담하려고 한다. 그런 것은 쳐다도 보지 말고, 공부에 전력해서 국가의 간성이 되어야 한다."
거절이 두 방향으로 못박혀 있었다. 위로는 거사 우두머리들에게, 아래로는 팔백 명의 생도들에게. 학교에는 금족령이 내려졌고, 장교들과 생도들은 영내에 묶여 있었다. 대위가 끼어들 자리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이름
대위는 정공법을 쓰지 않았다. 강영훈이 한 일을 부정하는 대신, 그 일의 성격을 바꿔서 보고했다.
강영훈이 그 자리에 없는 동안, 그는 거사의 강경파 박창암·박치옥 대령에게 다가가 말했다.
"교장이 금족령을 내려 혁명 지지시위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강영훈은 실제로 금족령을 내렸고, 그 결과 생도들은 영내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한 이유는 정치적 동원을 막아야 한다는 원칙이었지, 거사를 방해하려는 공작이 아니었다. 대위는 그 이유를 빼고 결과만 옮겼다. 같은 행위가 원칙에서 방해로 바뀌었다.
박창암이 강영훈과 대위를 대질시키자고 했다. 그러나 별 셋과 대위를 같은 테이블에 앉히지는 못했다. 그 사이에 안에서 면담을 끝낸 박정희가 나왔다. 그는 양쪽 보고가 다르다는 말을 듣고, 짧게 말했다.
"강 교장의 얘기가 이 대위 말과 달라요. 강 교장을 조치하시오."
강영훈은 그날 밤 구금되었다. 그가 한 일은 자기 직무를 자기 신념대로 수행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직무 수행이 방해로 명명되는 순간, 그는 거사 우두머리가 보기에 더 이상 선배 군인이 아니라 반혁명 혐의자가 되어 있었다. 9월 25일, 그는 육군 중장으로 강제 예편당한다.
거사 완결의 날
강영훈이 사라지자 두 자물쇠가 풀렸다. 위쪽 거절은 구금 명령서 한 장으로 끝났다. 아래쪽 거절 — 생도들에 대한 훈시 — 는 교장의 부재로 권위를 잃었다. 어제의 훈시는 더 이상 학교의 입장이 아니었다. 대리 교장이 임명됐고, 금족령은 해제됐다.
5월 18일 오전 아홉 시, 팔백 명의 사관생도가 교문을 나섰다. 회색 제복, 흰 장갑, 직각으로 꺾이는 팔. 동대문에서 남대문을 거쳐 소공동을 지나 시청 앞 광장까지 행진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시민들이 박수를 보냈다. 사관생도 대표가 광장에서 5·16 지지 선서문을 낭독했다. 다음 날 신문 1면에 그 사진이 실렸다.
거사의 2인자 김종필은 이날을 "거사 완결의 날"이라고 불렀다. 쿠데타가 혁명이 된 날이었다.
🎖️ 대위가 별을 짓누른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 대위는 십구 년 뒤, 대한민국 최고의 권력을 총으로 빼앗고 민주주의를 피로 물들이게 된다.
그저 평범했던 육군 대위 전두환의, 화려한 정치군인으로서의 등장 순간이었다.
참고 서적 : 남산의 부장들 - 김충식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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