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 찰스 린드버그
무명의 우편 비행사
1927년 봄, 찰스 린드버그는 세계가 주목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25살의 그는 미국 중서부 상공에서 우편물을 나르는 비행사였다. 비와 안개 속에서 편지 자루를 싣고 날았고, 몇 번이나 비상 탈출을 해야 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위험하고 외로운 직업이었다.
그 무렵 항공계에는 거대한 상금이 걸려 있었다. 뉴욕과 파리를 무착륙으로 잇는 첫 비행에 2만 5천 달러. 이 상금을 노린 사람들은 화려했다. 다발 엔진 비행기, 여러 명의 숙련된 승무원, 부유한 후원자들. 그들 옆에서 린드버그는 누가 봐도 가망 없는 다크호스였다. 단발 엔진, 단독 비행, 그리고 거의 아무도 모르는 이름.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린드버그의 비행기에는 이름이 있었다.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Spirit of St. Louis)' — '세인트루이스의 정신'. 이 이름에는 사연이 있었다. 가난한 우편 비행사였던 린드버그에게는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다. 그는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사업가들을 찾아다니며 후원을 구했고, 몇몇 사람들이 그의 무모해 보이는 꿈에 돈을 댔다. 그 도시 사람들의 신뢰에 대한 보답으로, 린드버그는 자기 비행기에 그 도시의 이름을 새겼다. 비행기 이름 자체가 그를 믿어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던 것이다.
그가 가진 돈은 경쟁자들과 비교하면 거의 농담에 가까웠다. 북극 탐험가 리처드 버드(Richard Byrd)의 준비 비용은 보수적으로 잡아도 약 50만 달러로 추정되었다. 다른 경쟁자들도 거대한 자본과 후원을 등에 업고 있었다. 그에 비해 린드버그의 총비용은 — 비행기, 연료, 식량, 숙박까지 모든 것을 합쳐 — 단 13,500달러였다. 경쟁자 한 명의 준비 비용의 약 37분의 1로, 그는 같은 바다에 도전한 것이다.
린드버그의 전략은 단 하나, 무게를 줄이는 것이었다. 그는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에서 살아남는 데 필수가 아닌 모든 것을 없앴다. 낙하산도, 무전기도, 연료 게이지도 버렸다. 심지어 앞을 보는 정면 창문조차 없앴다. 연료 탱크를 조종석 앞에 배치했기 때문이다. 그는 옆 창문과 잠망경으로만 앞을 봐야 했다.
식량은 샌드위치 다섯 개가 전부였다. 그리고 마실 물은 0.95리터를 준비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고 서늘했다. 파리에 도착하면 더 먹을 수 있고, 도착하지 못하면 더 필요 없다.
경쟁자들이 거대한 비행기에 모든 것을 싣는 동안, 린드버그는 거의 모든 것을 버렸다. 그것이 그의 도박이었다.
5월 20일 오늘, 오전 7시 52분
1927년 5월 20일 오늘 오전 7시 52분. 뉴욕 롱아일랜드의 루스벨트 비행장. 비에 젖어 무거워진 활주로 위에서, 연료를 가득 채운 작은 비행기가 천천히 속도를 올렸다.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는 활주로 끝의 전선을 간신히 넘어 떠올랐다.
그리고 33시간 30분의 외로움이 시작되었다.
가장 큰 적은 잠이었다. 린드버그는 이륙 전날 밤에도 거의 자지 못했고, 이제 33시간을 깨어 있어야 했다. 비행 후반, 그는 환각을 보기 시작했다. 비행기 안에 유령 같은 형체들이 나타나 그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졸음을 쫓으려 창문을 열어 찬 공기를 맞았고, 비행기를 일부러 바다 가까이 낮게 몰아 물보라가 얼굴에 튀게 했다. 깨어 있기 위한 사투였다.
🌊 대서양은 끝이 없어 보였다. 안개와 폭풍, 그리고 어둠. 그러나 그는 계속 동쪽으로 날았다.
1927년 5월 21일 밤 10시 22분, '스피릿 오브 세인트루이스'가 파리 르부르제 공항에 내렸다. 약 15만 명의 인파가 어둠 속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명의 우편 비행사는 활주로에 발을 딛는 순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인류 최초의 단독 무착륙 대서양 횡단이 완성된 것이다.
5월 20일에 떠난 한 사람이, 5월 21일에 전설이 되어 착륙했다.
🛩️ 2부 — 아멜리아 에어하트
짐짝이 되기를 거부한 여성
린드버그가 전설이 된 그 순간을, 한 여성이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이미 대서양을 건넌 적이 있었다. 1928년, 린드버그의 비행 다음 해였다. 그러나 그때 그녀는 조종사가 아니었다. 두 명의 남성이 비행기를 몰았고, 그녀는 그저 타고만 있었다. 승객이었다.
그런데도 언론은 그녀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신문은 그녀에게 '레이디 린드버그'라는 별명을 붙였다. 린드버그를 닮았다는 이유였다. 에어하트는 이 모든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자기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영웅 대접을 받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별명으로 얻는 것.
그녀는 자기 그 비행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짐짝, 감자 한 자루 같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언젠가 혼자 해보겠다."
'작은 빨간 버스'
에어하트의 비행기에도 이름이 있었다. 그녀의 비행기는 록히드 베가 5B였다. 그녀는 이 빨간색 비행기를 '리틀 레드 버스(Little Red Bus)' — '작은 빨간 버스' — 라고 불렀다.
두 비행기의 이름을 나란히 놓으면 두 비행사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난다. 린드버그의 '세인트루이스의 정신'은 장엄하다. 도시의 신뢰, 후원자들의 믿음, 한 도시의 자존심이 담긴 무거운 이름이다. 에어하트의 '작은 빨간 버스'는 소박하고 정답다. 그녀는 자기 비행기를 영웅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매일 타고 다니는 친근한 탈것처럼 불렀다. 한쪽은 정신(Spirit)이었고, 다른 한쪽은 버스(Bus)였다. 한쪽은 도시의 무게를 짊어졌고, 다른 한쪽은 일상의 친근함을 입었다.
그러나 '작은 빨간 버스'는 이름처럼 작거나 평범하지 않았다. 에어하트는 1930년 이 베가를 산 후, 추가 연료 탱크를 넣기 위해 동체를 통째로 교체하고 보강했다. 세 종류의 나침반과 표류 측정기, 더 강력한 엔진을 달았다. 소박한 이름 뒤에는 대양을 건너기 위한 치밀한 준비가 있었다.
같은 날짜를 고르다
에어하트의 도전에는 린드버그에게 없던 무게가 있었다. 린드버그는 인류가 아직 하지 못한 일을 했다. 한 번이면 충분한 기록이었다. 그러나 에어하트가 단독 대서양 횡단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인류 최초'가 아니었다. 린드버그가 이미 5년 전에 그 기록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 그녀가 건너야 할 것은 대서양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세상이 이미 끝났다고 여기는 일을,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기 손으로 다시 증명해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날짜를 골랐다. 1932년 5월 20일. 정확히 린드버그가 떠난 그 날이었다. 이것은 단순한 오마주가 아니었다. "당신이 한 일을 나도 한다, 그리고 혼자 한다"는 선언이었다.
5월 20일, 그리고 고장난 고도계
1932년 5월 20일 오늘 저녁, 34살의 에어하트가 캐나다 뉴펀들랜드 하버 그레이스에서 '작은 빨간 버스'를 타고 이륙했다.
시련은 빨리 찾아왔다. 이륙 몇 시간 만에 고도계가 고장났다. 자기가 얼마나 높이 떠 있는지 모르는 채 비행해야 했다. 그녀의 모든 비행 경험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 다음 폭풍을 만났다. 날개에 얼음이 얼기 시작했다. 무거워진 비행기가 통제를 잃고 약 900미터를 바다를 향해 급강하했다. 검은 수면이 빠르게 다가왔다. '작은 빨간 버스'가 파도에 거의 닿을 만큼 내려간 후에야, 낮은 고도의 따뜻한 공기에 얼음이 녹아 그녀는 간신히 다시 솟아올랐다. 엔진 배기관에는 금이 가서 불꽃이 옆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약 15시간의 비행 끝에, 에어하트는 비행기를 내렸다. 목적지는 파리였지만 악천후와 기계 고장으로 더 갈 수 없었다. 그녀가 내린 곳은 북아일랜드 컬모어의 한 목초지였다.
린드버그를 맞이한 15만 명의 인파는 없었다. 놀란 농부 한 명이 비행기로 달려왔을 뿐이다. 농부가 물었다. "어디서 오셨소?" 에어하트는 짧게 답했다. "아메리카에서요."
15만 명의 환호와 농부 한 명의 질문. 같은 도전의 성공이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한 성공이었다. 그녀는 여성 최초로, 그리고 린드버그 이후 두 번째 사람으로 단독 무착륙 대서양 횡단을 해냈다. 미국 의회는 민간인이라 자격이 없는 그녀에게 특별히 수훈 비행 십자장을 수여했다. 이 십자장을 받은 첫 여성이었다.
그녀는 자기 업적을 이렇게 요약했다. "나는 그저 재미로 이것을 했다."
3부 — 두 개의 비극
두 사람은 같은 바다를 건넜고, 같은 날짜를 골랐고, 각자 이름 붙인 비행기로 같은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그 명성에 가장 비싼 대가를 치렀다.
린드버그의 비극은 그가 너무 유명했기 때문에 찾아왔다. 1932년 — 에어하트가 단독 비행을 한 바로 그 해 — 린드버그의 20개월 된 첫 아들이 자택에서 유괴되었다. 아이는 끝내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언론은 이를 '세기의 범죄'라 불렀다.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으로 만든 그 명성이, 그의 아기를 표적으로 만든 것이다. 린드버그는 하늘에서 모든 것을 얻었고, 그 대가로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
에어하트의 비극은 그녀를 영원한 미스터리로 만들었다. 1932년의 단독 비행으로부터 5년 후, 다시 5월에, 그녀는 세계 일주 비행에 도전했다. 이번에는 '작은 빨간 버스'가 아니라 더 큰 쌍발기 록히드 일렉트라였다. 그리고 그 비행기와 함께 태평양 상공에서 사라졌다. 시신도, 비행기도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가 어디서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짐짝이 되기를 거부했던" 여성은, 결국 하늘이 삼킨 채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다.
두 사람의 평행한 항적은 마지막에 이렇게 만난다. 하늘이 두 사람에게 명성을 주었고, 그 명성이 한 사람에게서는 아들을, 다른 사람에게서는 자기 자신을 가져갔다.
⭐ 5월 20일의 하늘에는 그래서 두 개의 항적이 남아 있다. 5년의 간격을 두고 같은 날 같은 바다 위에 그어진 두 개의 선. '세인트루이스의 정신'과 '작은 빨간 버스'. 한 사람은 거리를 건넜고, 다른 사람은 거리와 함께 시대의 편견을 건넜다. 두 항적은 영원히 만나지 않지만, 영원히 서로를 비춘다.
참고자료
- 빌 브라이슨(Bill Bryson), 『One Summer: America 1927』
- 스미스소니언 국립항공우주박물관(Smithsonian 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 아멜리아 에어하트의 록히드 베가 5B(NR7952) '리틀 레드 버스' 관련 기록 및 1932년 비행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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