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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27일 목요일

🌍 6월 30일, 콩고 독립 선언식에서의 연설

🌍 배경 — 레오폴드의 콩고

콩고는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식민 지배를 받은 곳 중 하나였다. 

1885년부터 1908년까지,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소유지였다. 나라가 아니라 왕 한 사람의 재산이었다. 레오폴드는 고무를 원했다. 고무 채취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콩고인의 손목은 잘려 나갔다. 

콩고 원주민 인구가 이 시기에 절반으로 줄었다는 추산이 있다. 

1908년 국제 여론의 압박으로 레오폴드가 콩고를 벨기에 정부에 넘겼고, 이후 1960년까지 벨기에의 식민지가 됐다.

📮 루뭄바 — 우체국 직원에서 총리까지

파트리스 루뭄바는 1925년생으로, 우체국 직원이자 맥주 회사 영업 사원이었다. 

1958년 콩고민족운동(MNC)을 창설해 독립 운동을 이끌었다. 

1959년 반식민 봉기를 선동했다는 혐의로 체포돼 감옥에 갔으나, 오히려 감옥에서 더 유명해졌다. 1960년 5월 콩고 최초의 의회 선거에서 그의 당이 의석 과반을 차지했고, 루뭄바가 콩고 최초의 민선 총리가 됐다. 서른다섯이었다.

🎙️ 세 개의 연설

1960년 6월 30일 오늘, 독립 선언식이 열렸다.

먼저 벨기에 왕 보두앵이 연설했다. 그는 레오폴드 2세가 "천재적인 구상으로 시작한 문명화 사업의 결실"이 콩고 독립이라고 했다. 손목을 자른 왕의 업적을 칭송한 것이었다.

다음은 대통령 카사부부가 예정된 온건한 연설을 했다.

그때 루뭄바가 일어섰다. 그의 연설은 예정에 없었다. 벨기에 왕과 외교관들 앞에서 그는 지난 75년을 말했다.

"우리는 새벽부터 밤까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받아온 조롱과 모욕과 구타를 잊지 않는다. 우리의 상처는 너무 깊고 아직 쓰라리다."

보두앵 왕이 자리를 떴다. 미국 대사관은 워싱턴에 보고서를 올렸다. 위험한 선동가.

훗날 분석가들은 말했다. 루뭄바의 죽음은 그날 연설에서 시작됐다.

🛢️ 24조 달러

콩고의 땅 아래에는 구리, 코발트, 우라늄,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광물 자원 가치가 24조 달러로 추산됐다.

독립 직후 벨기에의 지원을 받은 카탕가주가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광산이 밀집한 지역이었다. 루뭄바는 미국과 유엔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 순간 냉전의 논리가 작동했다. 워싱턴은 그를 "아프리카의 피델 카스트로"라 불렀다.

1960년 8월 26일, CIA 국장 앨런 덜레스가 콩고 현지 요원에게 전보를 보냈다. 루뭄바의 제거는 긴급하고 최우선적인 목표다.

🔫 6개월

1960년 9월, 루뭄바와 함께 일하던 군 총사령관 모부투가 CIA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켰다. 루뭄바는 총리직에서 쫓겨났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혔다.

공항에 도착하는 그의 모습이 카메라에 찍혔다. 손이 뒤로 묶인 채 군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사진이 전 세계에 퍼졌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현장에 있었으나 개입하지 않았다.

1961년 1월 17일, 루뭄바와 두 명의 동료가 카탕가주로 이송됐다. 비행기 안에서 내내 구타당했다. 도착 후 벨기에 장교들의 감독 아래 몇 시간을 더 맞았다. 그날 밤 총살됐다. 여전히 서른다섯이었다.

🦷 치아 하나

시신은 땅에 묻혔다가 파내어졌다. 벨기에 경찰관 제라르 소에테의 지휘 아래 황산에 녹여 없앴다. 소에테는 훗날 자랑스럽게 이 일을 증언했다. 루뭄바의 치아 두 개를 기념품으로 챙겼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 금관이 씌워진 치아 하나가 소에테의 딸에게서 벨기에 정부로 넘어갔다.

2022년, 벨기에 정부가 그 치아를 루뭄바의 가족에게 공식 반환했다. 처형된 지 61년 만이었다. 콩고에 돌아온 루뭄바의 흔적은 치아 하나뿐이였다.

🌑 지금

루뭄바를 제거한 모부투는 이후 32년간 콩고를 통치했다. 2001년 벨기에 의회 조사위원회가 루뭄바 암살에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고, 2002년 공식 사과했다. 형사 책임을 진 사람은 없었다.

2026년 현재, 벨기에 법원이 94세의 전직 외교관 에티엔 다비뇽을 루뭄바 불법 억류와 모욕에 관여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65년 만에 처음으로 관련자가 법정에 선다.

루뭄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공산주의자라 불렸다. 콩고의 부는 콩고에 남아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2026년 8월 19일 수요일

🔨 6월 29일, 복권 같은 사형 제도

 

⚖️ 복권 같은 사형

미국의 사형제도는 식민지 시절부터 이어졌다. 독립 이후에도 각 주가 독자적으로 운영했고, 1930년대 대공황 시기에 연간 150건 이상 집행되며 정점을 찍었다.

문제는 기준이 없다는 것이었다. 배심원단이 알아서 결정했다. 법에 "이런 경우엔 사형, 이런 경우엔 징역"이라는 기준이 없었다. 같은 살인 사건인데 피고가 백인이면 징역, 흑인이면 사형이었다. 같은 강간 사건인데 돈이 있으면 징역, 가난하면 사형이었다. 어떤 날 어떤 배심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목숨이 갈렸다.

강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의 90퍼센트가 흑인이었다. 살인 사건에서도 피고가 흑인이고 피해자가 백인일 때 사형 선고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대법관 스튜어트는 훗날 이렇게 썼다. 사형이 이 피고들에게 내려진 것은, 벼락을 맞는 것만큼이나 자의적이다.

🔨 1966~1972년

1960년대 들어 흑인 민권 운동이 고조되면서, NAACP(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 법률방어기금이 전국의 사형 집행을 법적으로 막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수백 건의 집행을 정지시키는 데 성공했고, 1966년부터 1972년까지 6년간 미국에서 단 한 건의 사형도 집행되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긴 사형 집행 공백기였다.

그리고 1972년 6월 29일이 왔다.

🔨 판결

미국 연방대법원이 5 대 4로 판결했다. 사형은 수정헌법 8조, 즉 잔혹하고 비정상적인 형벌을 금지하는 조항에 위반된다.

629명의 사형수 형량이 그날 모두 종신형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판결의 이유가 문제였다. 9명의 대법관이 모두 별도의 의견서를 썼다. 사형 자체가 위헌이라고 본 대법관은 둘뿐이었다. 나머지 세 명의 다수 의견은 사형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지금 방식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누가 죽고 누가 사는지가 복권처럼 결정되는 방식이 위헌이라는 것이었다. 제도를 고치면 된다는 여지를 남겼다.

🔄 37개 주의 반격

37개 주가 즉각 법을 고쳤다. 이번엔 기준을 명시했다. 배심원이 마음대로 결정하는 게 아니라, 가중 요소(잔인한 방법, 다수 피해자 등)와 감경 요소(초범, 정신장애 등)를 법에 적고 그것을 따라 결정하도록 했다. 자의적이지 않게 만든 것이다.

1976년, 대법원은 개정된 조지아 사형법을 7 대 2로 합헌이라 판단했다. 사형 집행이 재개됐다.

🌑 남은 것

사형을 막으려 한 판결이, 사형을 더 정교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현재 미국 27개 주와 연방정부가 사형제를 유지하고 있다. 2022년 기준 사형 대기 중인 사람은 2,414명이다. 미국은 서방 민주주의 국가 중 사형제를 유지하는 유일한 나라다.

629명이 살았던 그 4년은, 4년으로 끝났다.

🗳️ 6월 29일,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 체육관 선거

1972년 이후, 한국 대통령은 체육관에서 뽑혔다. 국민이 아니라 선거인단이 뽑았다. 1980년, 1981년, 1984년. 장충체육관에서 세 차례 치러진 대통령 선거를 국민은 구경만 했다.

1979년 박정희가 죽자 전두환이 12·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잡았다. 1980년 5월, 민주화를 요구하는 광주 시민들에게 군을 보냈다. 수백 명이 죽었다. 전두환은 그해 대통령이 됐다.

📋 4·13 호헌조치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은 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대통령 임기 내에 개헌은 없다. 현행 헌법대로 다음 대통령을 뽑겠다. 체육관 선거를 유지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그해 1월에는 서울대생 박종철이 경찰 물고문으로 죽었다. 경찰은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고 발표했다. 5월, 사건이 조작·은폐되었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분노가 끓었다.

🌊 6월

6월 10일, 전국 22개 도시에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한열이 최루탄에 쓰러졌다. 6월 18일, '최루탄 추방의 날', 부산에서 30만 명이 모였다. 이태춘이 최루탄에 맞아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6월 26일, 전국 37개 도시에서 150만 명이 행진했다.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내 손으로.

시민들이 원한 것은 단순했다. 내 손으로 대통령을 뽑는 것이었다.

🎙️ 1987년 6월 29일

열흘이 지나지 않아 정권은 무릎을 꿇었다.

경찰력으로는 막을 수 없었고, 군을 투입하면 광주가 반복될 것이었다. 6월 29일, 차기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한다. 정치범을 석방한다. 김대중을 사면·복권한다. 언론 자유를 보장한다. 8개 항이었다.

선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모든 공직을 사퇴하겠다고 했다. 전두환도 수용 담화를 발표했다. 1972년 유신 이후 15년 만에 직선제가 돌아왔다.

그리고 엿새 뒤, 27일간 의식불명이었던 이한열이 숨졌다. 7월 9일 장례식에 100만 명이 모였다. 그것으로 6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 아쉬운 결말

10월 27일 헌법 개정안이 국민투표로 확정됐다. 대통령 직선제, 5년 단임제.

12월 16일, 마침내 직선제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1972년 이후 15년 만의 직접선거였다. 야권의 김영삼과 김대중은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다. 노태우가 36.6%로 당선됐다.

직선제를 쟁취한 선거에서, 직선제를 선언한 후보가 이겼다. 거리를 메웠던 400만 명의 함성은 분열된 표 앞에서 흩어졌다. 체육관 선거는 끝났으나, 정권은 바뀌지 않았다.

🏳️‍🌈 6월 28일, 뉴욕 스톤월 — 1969년

 

🚨 새벽 2시

1969년 6월 28일 새벽 2시, 뉴욕 경찰이 그리니치빌리지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53번지 스톤월 인을 급습했다. 게이 바 단속은 한 달에 한 번 꼴로 있던 일이었다. 손님들은 순순히 나와 기다렸다.

그런데 경찰이 신분증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여장한 사람들을 화장실로 끌고 가 성별을 확인했다. 수갑이 너무 꽉 조인다고 항의하는 손님을 경찰이 거칠게 다루는 것을 군중이 목격했다. 동전이 날아들었다. 병이 날아들었다. 경찰차 타이어가 펑크났다.

기동대가 새벽 4시를 넘겨서야 진압했다.

🔥 엿새

다음 날 밤, 스톤월 인이 다시 문을 열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경찰이 다시 왔다. 구타와 최루 가스가 뒤따랐다. 그래도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았다. 이후 엿새 동안 크리스토퍼 스트리트는 비워지지 않았다.

스톤월 이전에도 게이 바 단속은 있었다. 스톤월이 달랐던 것은 처음으로 맞섰다는 것이었다.

당시 뉴욕에서 동성 간 성적 접촉은 불법이었다. 여장은 불법이었다. 술집이 동성애자에게 술을 파는 것도 불법이었다. 법이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었고, 경찰은 그 법을 집행했다.

🏳️‍🌈 1주년

1970년 6월 27일, 시카고에서 150명이 거리로 나왔다. 미국 최초의 프라이드 행진이었다. 다음 날 6월 28일, 뉴욕에서 수천 명이 스톤월 인에서 출발해 센트럴 파크까지 행진했다. 같은 날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행진이 열렸다.

공식 구호는 이랬다. "크게 말해라, 게이는 자랑스럽다."

이후 행진은 매년 6월 마지막 주로 자리를 잡았다.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프라이드 퍼레이드는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다. 그 시작은 스톤월이었고, 날짜는 6월 28일이었다.

🍺 지금의 스톤월 인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53번지, 스톤월 인은 아직 그 자리에 있다. 지금도 게이 바로 영업 중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은 오후 2시에 문을 열고 새벽 4시에 닫는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이 건물을 국가 기념물로 지정했다. 2024년 6월 28일, 55주년 기념일에 스톤월 국가 기념물 방문자 센터가 문을 열었다.

2026년 2월 9일, 트럼프 행정부의 지침에 따라 국립공원청이 기념물의 무지개 깃발을 내렸다. 사흘 뒤, 지역 주민들이 모여 깃발을 다시 올렸다. 깃발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1969년 경찰이 문을 닫으려 했다. 닫히지 않았다.


San francisco 프라이드 퍼레이드(2022년 6월 26일)


6월 27일, 세계 법정에 선 초강대국

 

🕳️ 의회가 끊은 자금

1979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소모사 독재를 무너뜨리고 니카라과의 정권을 잡았다. 미국은 이에 맞서는 반정부 무장단체 콘트라를 지원했다. 미 의회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볼런드 수정안(Boland Amendment)을 잇달아 통과시켜, 니카라과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한 콘트라 지원에 연방 예산을 쓰는 것을 금지했다. 1984년 10월 서명된 수정안은 군사·준군사 활동 자금을 전면 차단했다. 그럼에도 미 중앙정보국(CIA)은 1984년 초 니카라과 항구 세 곳에 기뢰를 부설했다.

⚖️ 작은 나라가 제기한 소송

1984년 4월 9일, 니카라과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미국을 제소했다. 미국이 콘트라를 지원하고 니카라과 항구에 기뢰를 부설했다는 것이 소송의 내용이었다. 니카라과는 소송과 동시에 잠정조치를 요청했다.

🚪 재판을 떠난 피고

1984년 11월 26일, 재판소는 관할권이 있으며 니카라과의 소송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미국은 1985년 1월 18일, 더 이상 이 사건의 절차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심리는 피고인 미국이 불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 1986년 6월 27일의 판결

재판소는 미국이 무력 사용 금지, 타국 내정 불간섭, 타국 주권 존중, 평화적 해상 통상 방해 금지라는 관습국제법상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콘트라 지원과 항구 기뢰 부설이 그 근거였다. 재판소는 미국이 주장한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소는 미국이 모든 위반 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니카라과에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했다.

✈️ 격추된 보급기

판결로 콘트라 지원이 국제법 위반으로 확인된 뒤에도, 콘트라에 무기를 나르는 비밀 비행은 계속되었다. 1986년 10월 5일, 코스타리카 국경에 가까운 니카라과 남부 상공에서 열아홉 살의 산디니스타 병사가 어깨에 멘 지대공 미사일로 미국의 C-123 수송기 한 대를 격추했다. 기내에는 AK-47 소총과 탄약, RPG 유탄발사기 등 콘트라에 전달할 무기가 실려 있었다. 조종사 등 세 명이 사망하고, 화물을 밀어 내리는 일을 하던 유진 헤이즌퍼스 한 명만이 낙하산으로 탈출해 살아남았다. 그는 하루 만에 붙잡혔고, 자신이 CIA와 계약을 맺고 이 보급 임무를 수행해 왔다고 진술했다. 미국 정부는 그와의 연관을 부인했다.

🛑 거부권

니카라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판결 이행을 요청했다. 1986년 7월 31일, 완전한 이행을 촉구하는 결의안은 표결에서 11 대 1로 지지를 받았으나, 상임이사국인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부결되었다. 10월 28일 제출된 두 번째 결의안(S/18428) 역시 미국의 거부권으로 부결되었다.

🗳️ 총회로 간 판결

안보리에서 길이 막히자 니카라과는 유엔 총회로 향했다. 1986년 11월 3일, 총회는 결의안 41/31을 채택했다. 판결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으며, 찬성 94, 반대 3, 기권 47로 가결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세 나라는 미국, 이스라엘, 영국이었다. 총회는 이후 회기에서도 같은 취지의 결의를 반복해 채택했다.

🔚 판결 뒤에 남은 것

미국은 배상 협상에 응하지 않았고, 판결은 이행되지 않았다. 니카라과는 배상액 산정을 위한 준비서면을 1988년 3월 29일 제출했다.

유엔 헌장 제94조는 재판소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당사국이 있을 경우 상대국이 안전보장이사회에 호소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었다. 판결을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절차는 안전보장이사회를 거치는 것이었고, 그 이사회에서 미국은 거부권을 쥐고 있었다.

1990년 대선에서 비올레타 차모로가 이끄는 국민야당연합이 승리해 산디니스타 정권이 물러났다. 1991년 9월, 니카라과는 소송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다고 재판소에 통보했다. 미국은 이를 환영했다. 1991년 9월 26일, 사건은 재판소의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니카라과는 배상을 받지 못했다. 세계 최고 법원의 판결은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 6월 26일, 1907년 티플리스 은행 강도

 💣 예레반 광장

1907년 6월 26일 오늘, 오전 10시 30분, 티플리스(지금의 트빌리시) 예레반 광장에 현금 마차가 들어왔다. 마부, 출납원, 회계원, 경비, 무장 군인, 코사크 기병이 호위했다.

신호가 떨어졌다.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총성이 울렸다. 혼란 속에 기병 대위 복장을 한 사내가 돈 보따리를 마차에 던져 넣고 사라졌다.

40명이 죽었다. 50명이 다쳤다. 강도단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 탈취한 돈은 24만 1천 루블이었다. 현 시세로는 약 500만 달러에 해당한다.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광장을 포위했다. 돈도 범인도 이미 없었다.

전 세계 신문이 떠들썩했다. 런던 타임스는 "티플리스 폭탄 만행", 뉴욕 타임스는 "폭탄으로 다수 사망, 17만 달러 탈취"라고 전했다.

범인들의 이름이 뒤늦게 알려졌다. 현장 지휘자는 카모였다. 자금 세탁을 맡은 자는 리트비노프였다. 폭탄을 만든 자는 크라신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자는 코바였다.

🔍 배후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 단순해 보이던 강도 사건의 배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탈취한 돈은 볼셰비키 당으로 흘러들어갔다. 코바와 카모는 1905년 혁명 실패 이후 자금이 바닥난 볼셰비키를 위해 이 강도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승인을 내린 사람은 런던과 베를린에서 망명 중이던 레닌이었다.

아이러니가 있었다. 강도가 일어나기 불과 몇 주 전, 런던에서 열린 당 대회는 폭력적 수탈을 공식 금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레닌은 그 결의에 서명했다. 그리고 베를린으로 건너가 코바, 크라신, 리트비노프를 만나 티플리스 강도를 논의했다.

당의 결의는 종이 위에만 있었다.

💸 돈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강도는 성공했으나 돈을 쓸 수 없었다.

500루블짜리 대형 지폐들의 일련번호가 경찰에 알려져 있었다. 레닌은 유럽 전역에서 동시에 환전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표시된 지폐들이 유럽 은행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국제 경찰 공조가 시작됐다.

1908년 1월, 파리에서 리트비노프가 표시된 지폐 열두 장을 갖고 있다가 체포됐다. 베를린에서는 카모가 체포됐다. 그는 가혹한 심문에서 정신이상을 연기해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뒤 탈출했다. 1917년 혁명 이후에야 석방됐다.

주요 공모자 가운데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없었다.

🚬 코바

이 강도를 기획한 코바는 가명이었다.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조지아 고리 출신의 전직 신학생이었다. 1904년부터 강도와 수탈 계획에 관여해 왔으며, 스스로를 "코카서스의 산적"이라 불렀다.

훗날 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스탈린.

그는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수천만 명이 그의 통치 아래 죽었다. 당일 그의 행적에 대해 트로츠키는 훗날 이렇게 썼다. "다른 사람들이 싸웠고, 스탈린은 멀리서 감독했다." 트로츠키는 나중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예레반 광장은 지금 자유광장이라 불린다. 40명의 피가 흘렀던 그 광장에, 자유라는 이름이 붙었다.

6월 26일, 세금을 가장 많이 낸 남자

 

    1917년, 평안북도 용천의 부잣집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의주 일대에 이름난 대지주였다. 아이는 부족함 없이 자랐고, 신의주상업학교를 마친 뒤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다.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한, 그 시절엔 흔치 않은 인텔리였다.

해방이 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고향에는 새 질서가 서고 있었다. 토지개혁으로 지주였던 집안은 무너졌다. 가진 것을 잃은 그는 1947년 홀로 삼팔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쪽에서 그는 월남한 청년들의 반공 단체에 몸담아 간부를 지냈고, 정보기관과 우익 조직의 언저리에서 움직였다. 1948년에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이듬해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정면으로 맞서던 정당,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당 조직부장의 추천이었고, 입당은 곧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 당의 당수에게 면담을 청했다.

1949년 6월 26일, 면담을 하기로 한 날. 당수를 마주한 자리에서 그는 네 발의 총을 쐈다. 당수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는 곧 체포되었다.

법정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형은 곧 15년으로 줄었고, 이듬해 전쟁이 터지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감옥에 있은 것은 한 해 남짓이었다. 그는 군으로 돌아가 복무했고, 1953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예편한 그는 강원도 양구로 갔다. 1956년, 군에 식료품을 대는 군납공장 신의 기업사를 차렸다. 두부와 콩나물을 만들어 부대에 넘겼다. 사업은 군이 알선해 주었다. 공장은 십 년 가까이 돌아갔고, 그는 큰돈을 벌었다. 훗날 그의 근황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한때 그가 강원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낸 사람 축에 들었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도내 납세액 3위였다.

양구에서 그는 왕처럼 살았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교장이 교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를 벌하려는 손이 여러 번 뻗어 왔지만, 그를 지켜 주는 힘은 늘 그보다 컸다.

그가 암살한 이는, 한독당 당수 백범 김구였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정오, 그 자리에서 암살됐다. 향년 74세.

이 암살범 안두희는 훗날 한 시민의 손에 맞아 죽었다. 1996년의 일이었다.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 6월 30일, 콩고 독립 선언식에서의 연설

🌍  배경 — 레오폴드의 콩고 콩고는 세계에서 가장 잔혹한 식민 지배를 받은 곳 중 하나였다.  1885년부터 1908년까지,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의 개인 소유지였다. 나라가 아니라 왕 한 사람의 재산이었다. 레오폴드는 고무를 원했다. 고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