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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8월 19일 수요일

💣 6월 26일, 1907년 티플리스 은행 강도

 💣 예레반 광장

1907년 6월 26일 오늘, 오전 10시 30분, 티플리스(지금의 트빌리시) 예레반 광장에 현금 마차가 들어왔다. 마부, 출납원, 회계원, 경비, 무장 군인, 코사크 기병이 호위했다.

신호가 떨어졌다. 수류탄이 날아들었다. 총성이 울렸다. 혼란 속에 기병 대위 복장을 한 사내가 돈 보따리를 마차에 던져 넣고 사라졌다.

40명이 죽었다. 50명이 다쳤다. 강도단에서 죽은 사람은 없었다. 탈취한 돈은 24만 1천 루블이었다. 현 시세로는 약 500만 달러에 해당한다.

당국은 군대를 동원해 광장을 포위했다. 돈도 범인도 이미 없었다.

전 세계 신문이 떠들썩했다. 런던 타임스는 "티플리스 폭탄 만행", 뉴욕 타임스는 "폭탄으로 다수 사망, 17만 달러 탈취"라고 전했다.

범인들의 이름이 뒤늦게 알려졌다. 현장 지휘자는 카모였다. 자금 세탁을 맡은 자는 리트비노프였다. 폭탄을 만든 자는 크라신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기획한 자는 코바였다.

🔍 배후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 단순해 보이던 강도 사건의 배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탈취한 돈은 볼셰비키 당으로 흘러들어갔다. 코바와 카모는 1905년 혁명 실패 이후 자금이 바닥난 볼셰비키를 위해 이 강도를 기획했다. 그리고 그 계획의 승인을 내린 사람은 런던과 베를린에서 망명 중이던 레닌이었다.

아이러니가 있었다. 강도가 일어나기 불과 몇 주 전, 런던에서 열린 당 대회는 폭력적 수탈을 공식 금지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레닌은 그 결의에 서명했다. 그리고 베를린으로 건너가 코바, 크라신, 리트비노프를 만나 티플리스 강도를 논의했다.

당의 결의는 종이 위에만 있었다.

💸 돈을 쓸 수 없었다

그러나 강도는 성공했으나 돈을 쓸 수 없었다.

500루블짜리 대형 지폐들의 일련번호가 경찰에 알려져 있었다. 레닌은 유럽 전역에서 동시에 환전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표시된 지폐들이 유럽 은행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국제 경찰 공조가 시작됐다.

1908년 1월, 파리에서 리트비노프가 표시된 지폐 열두 장을 갖고 있다가 체포됐다. 베를린에서는 카모가 체포됐다. 그는 가혹한 심문에서 정신이상을 연기해 정신병원으로 옮겨진 뒤 탈출했다. 1917년 혁명 이후에야 석방됐다.

주요 공모자 가운데 재판에 넘겨진 사람은 없었다.

🚬 코바

이 강도를 기획한 코바는 가명이었다.

본명은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주가시빌리. 조지아 고리 출신의 전직 신학생이었다. 1904년부터 강도와 수탈 계획에 관여해 왔으며, 스스로를 "코카서스의 산적"이라 불렀다.

훗날 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스탈린.

그는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됐다. 수천만 명이 그의 통치 아래 죽었다. 당일 그의 행적에 대해 트로츠키는 훗날 이렇게 썼다. "다른 사람들이 싸웠고, 스탈린은 멀리서 감독했다." 트로츠키는 나중에 스탈린의 명령으로 암살당했다.

예레반 광장은 지금 자유광장이라 불린다. 40명의 피가 흘렀던 그 광장에, 자유라는 이름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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