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평안북도 용천의 부잣집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의주 일대에 이름난 대지주였다. 아이는 부족함 없이 자랐고, 신의주상업학교를 마친 뒤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다. 메이지대학에서 공부한, 그 시절엔 흔치 않은 인텔리였다.
해방이 왔다. 그러나 그가 돌아온 고향에는 새 질서가 서고 있었다. 토지개혁으로 지주였던 집안은 무너졌다. 가진 것을 잃은 그는 1947년 홀로 삼팔선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왔다. 남쪽에서 그는 월남한 청년들의 반공 단체에 몸담아 간부를 지냈고, 정보기관과 우익 조직의 언저리에서 움직였다. 1948년에는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이듬해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당시 대통령 이승만과 정면으로 맞서던 정당, 한국독립당에 입당했다. 당 조직부장의 추천이었고, 입당은 곧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는 그 당의 당수에게 면담을 청했다.
1949년 6월 26일, 면담을 하기로 한 날. 당수를 마주한 자리에서 그는 네 발의 총을 쐈다. 당수는 그 자리에서 숨졌다. 그는 곧 체포되었다.
법정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러나 형은 곧 15년으로 줄었고, 이듬해 전쟁이 터지자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감옥에 있은 것은 한 해 남짓이었다. 그는 군으로 돌아가 복무했고, 1953년 소령으로 예편했다.
예편한 그는 강원도 양구로 갔다. 1956년, 군에 식료품을 대는 군납공장 신의 기업사를 차렸다. 두부와 콩나물을 만들어 부대에 넘겼다. 사업은 군이 알선해 주었다. 공장은 십 년 가까이 돌아갔고, 그는 큰돈을 벌었다. 훗날 그의 근황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한때 그가 강원도에서 세금을 가장 많이 낸 사람 축에 들었다는 사실도 함께 드러났다. 도내 납세액 3위였다.
양구에서 그는 왕처럼 살았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교장이 교문까지 마중을 나왔다. 그를 벌하려는 손이 여러 번 뻗어 왔지만, 그를 지켜 주는 힘은 늘 그보다 컸다.
그가 암살한 이는, 한독당 당수 백범 김구였다. 백범은 1949년 6월 26일 정오, 그 자리에서 암살됐다. 향년 74세.
이 암살범 안두희는 훗날 한 시민의 손에 맞아 죽었다. 1996년의 일이었다.
배후는 끝내 밝혀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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