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의회가 끊은 자금
1979년, 산디니스타 민족해방전선(FSLN)이 소모사 독재를 무너뜨리고 니카라과의 정권을 잡았다. 미국은 이에 맞서는 반정부 무장단체 콘트라를 지원했다. 미 의회는 1982년부터 1984년까지 볼런드 수정안(Boland Amendment)을 잇달아 통과시켜, 니카라과 정부 전복을 목적으로 한 콘트라 지원에 연방 예산을 쓰는 것을 금지했다. 1984년 10월 서명된 수정안은 군사·준군사 활동 자금을 전면 차단했다. 그럼에도 미 중앙정보국(CIA)은 1984년 초 니카라과 항구 세 곳에 기뢰를 부설했다.
⚖️ 작은 나라가 제기한 소송
1984년 4월 9일, 니카라과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미국을 제소했다. 미국이 콘트라를 지원하고 니카라과 항구에 기뢰를 부설했다는 것이 소송의 내용이었다. 니카라과는 소송과 동시에 잠정조치를 요청했다.
🚪 재판을 떠난 피고
1984년 11월 26일, 재판소는 관할권이 있으며 니카라과의 소송이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미국은 1985년 1월 18일, 더 이상 이 사건의 절차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후 심리는 피고인 미국이 불참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 1986년 6월 27일의 판결
재판소는 미국이 무력 사용 금지, 타국 내정 불간섭, 타국 주권 존중, 평화적 해상 통상 방해 금지라는 관습국제법상의 의무를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콘트라 지원과 항구 기뢰 부설이 그 근거였다. 재판소는 미국이 주장한 집단적 자위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소는 미국이 모든 위반 행위를 즉시 중지하고, 니카라과에 배상할 의무가 있다고 결정했다.
✈️ 격추된 보급기
판결로 콘트라 지원이 국제법 위반으로 확인된 뒤에도, 콘트라에 무기를 나르는 비밀 비행은 계속되었다. 1986년 10월 5일, 코스타리카 국경에 가까운 니카라과 남부 상공에서 열아홉 살의 산디니스타 병사가 어깨에 멘 지대공 미사일로 미국의 C-123 수송기 한 대를 격추했다. 기내에는 AK-47 소총과 탄약, RPG 유탄발사기 등 콘트라에 전달할 무기가 실려 있었다. 조종사 등 세 명이 사망하고, 화물을 밀어 내리는 일을 하던 유진 헤이즌퍼스 한 명만이 낙하산으로 탈출해 살아남았다. 그는 하루 만에 붙잡혔고, 자신이 CIA와 계약을 맺고 이 보급 임무를 수행해 왔다고 진술했다. 미국 정부는 그와의 연관을 부인했다.
🛑 거부권
니카라과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판결 이행을 요청했다. 1986년 7월 31일, 완전한 이행을 촉구하는 결의안은 표결에서 11 대 1로 지지를 받았으나, 상임이사국인 미국의 거부권 행사로 부결되었다. 10월 28일 제출된 두 번째 결의안(S/18428) 역시 미국의 거부권으로 부결되었다.
🗳️ 총회로 간 판결
안보리에서 길이 막히자 니카라과는 유엔 총회로 향했다. 1986년 11월 3일, 총회는 결의안 41/31을 채택했다. 판결의 완전하고 즉각적인 이행을 촉구하는 내용이었으며, 찬성 94, 반대 3, 기권 47로 가결되었다. 반대표를 던진 세 나라는 미국, 이스라엘, 영국이었다. 총회는 이후 회기에서도 같은 취지의 결의를 반복해 채택했다.
🔚 판결 뒤에 남은 것
미국은 배상 협상에 응하지 않았고, 판결은 이행되지 않았다. 니카라과는 배상액 산정을 위한 준비서면을 1988년 3월 29일 제출했다.
유엔 헌장 제94조는 재판소 판결을 이행하지 않는 당사국이 있을 경우 상대국이 안전보장이사회에 호소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었다. 판결을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절차는 안전보장이사회를 거치는 것이었고, 그 이사회에서 미국은 거부권을 쥐고 있었다.
1990년 대선에서 비올레타 차모로가 이끄는 국민야당연합이 승리해 산디니스타 정권이 물러났다. 1991년 9월, 니카라과는 소송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겠다고 재판소에 통보했다. 미국은 이를 환영했다. 1991년 9월 26일, 사건은 재판소의 목록에서 삭제되었다. 니카라과는 배상을 받지 못했다. 세계 최고 법원의 판결은 끝내 이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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