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숙집
메리 서랫은 워싱턴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던 과부였다. 남편을 잃고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방을 세놓아 생계를 이었다.
그 집에는 아들 존의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젊은 남자들이 아들을 찾아와 방에 모이곤 했다. 어머니는 이따금 그들의 부탁으로 심부름을 했다. 한 번은 아들의 친구가 건넨 꾸러미를 시골 여관에 전해 주었다. 배우라는 그 친구의 이름은 존 윌크스 부스였다.
그녀는 몰랐다. 아들의 손님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 나라를 뒤집은 밤
1865년 4월 14일 밤,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포드 극장에서 부스가 링컨 대통령의 뒤통수를 쏘았다. 그날 밤의 표적은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다른 공모자가 국무장관 수어드의 집에 침입해 그의 목을 칼로 찔렀다. 부통령마저 노려졌다. 연방 정부의 지휘부를 하룻밤에 쓸어버리려는 음모였다.
아들의 손님들은, 평범한 손님이 아니었다.
🚪 모른다고 말했다
이틀 뒤 밤, 수사관들이 하숙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이 메리 서랫을 체포하려던 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곡괭이를 든 남자가 인부 차림으로 서 있었다. 배수로를 파러 왔다고 했다. 그는 이틀 전 밤 수어드의 목을 칼로 찌른 바로 그 공모자, 루이스 파월이었다.
수사관이 물었다. 이 사람을 아느냐고.
겁에 질린 여주인은 답했다. "하느님 앞에 맹세코, 저는 이 사람을 모릅니다. 본 적도 없습니다."
그 한마디가 그녀의 목을 조였다. 암살범 중 하나가 하필 그녀의 문 앞에 나타났고, 그녀는 그를 모른다고 했다. 수사관들에게 그것은 거짓말로 보였다.
⚖️ 군사재판
메리 서랫은 민간 법원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섰다. 그를 옭아맨 증거는 대부분 정황이었다.
검찰의 결정적 증인은 존 로이드였다. 그는 메리가 워싱턴 인근에 소유한 선술집을 빌려 운영하던 사람으로, 암살 당일 존 부스 일당이 그곳에 들러 미리 숨겨둔 총과 물품을 챙겨 달아났다고 증언했다. 메리가 그날 낮 그 술집에 들러 "물건을 준비해 두라"는 말을 전했다는 것이 검찰 논리의 핵심 고리였다. 그러나 로이드는 이름난 애주가였고, 체포될 당시에도 술에 취해 있었으며, 증언한 내용 역시 술기운 속에서 오간 대화라는 점이 변호인 측에서 거듭 지적되었다. 목숨이 걸린 증언의 신빙성이 그만큼 흔들렸던 것이다.
함께 처형될 파월은 처형대에서 "메리 서랫은 무죄"라고 말했다. 진짜 가담자 중 하나가 그녀의 무고를 증언한 것이다.
재판부의 판사 아홉 중 다섯이 그녀의 나이와 성별을 이유로 감형을 청원했다. 그러나 그 청원은 처형 이틀 전에야 대통령에게 전해졌고, 존슨 대통령은 사형에는 서명하고 감형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 7월 7일
1865년 7월 7일 오늘 오후, 네 명이 교수대에 올랐다. 그중 하나가 메리 서랫이었다.
교수대에서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제발 저를 떨어뜨리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그녀는 미국 연방 정부가 처형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오래 없던 일이었다.
🚪 그리고 아들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아들 존 서랫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암살 직후 캐나다로, 다시 유럽으로 달아났다. 어머니가 붙잡혀 재판을 받고 교수대에 오르는 동안, 그는 이집트에 숨어 있었다. 이듬해 붙잡혔지만, 그는 군사법정이 아니라 민간 법정에서 재판받았다. 배심원단의 의견은 갈렸고, 그는 풀려났다. 다시 기소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죽고, 아들은 살았다.
링컨의 죽음으로 두 여인이 남았다. 남편을 잃고 슬픔 속에 여생을 보낸 영부인 메리 토드 링컨, 그리고 교수대에 오른 하숙집 과부 메리 서랫. 두 사람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