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About)

"안녕하세요" History Diary 365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를 매일 기록하는 공간입니다. 🏛️ 매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여, 그날의 강렬했던 기억과 교과서 밖 생생한 역사적 순간들을 조명합니다. ⏳ 모든 글은 직접 탐구한 문헌과 서적 등 객관적인 사실(Fact)을 바탕으로 작성되며 📜,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는 깊이 있는 시선을 지향합니다. 문의나 제안, 혹은 궁금한 역사가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 📧 Email: historydesign00@gmail.com

2026년 9월 28일 월요일

🏠 7월 7일, 메리 서랫 하숙집의 과부, 865년

🏠 하숙집

메리 서랫은 워싱턴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던 과부였다. 남편을 잃고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방을 세놓아 생계를 이었다.

그 집에는 아들 존의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젊은 남자들이 아들을 찾아와 방에 모이곤 했다. 어머니는 이따금 그들의 부탁으로 심부름을 했다. 한 번은 아들의 친구가 건넨 꾸러미를 시골 여관에 전해 주었다. 배우라는 그 친구의 이름은 존 윌크스 부스였다.

그녀는 몰랐다. 아들의 손님들이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 나라를 뒤집은 밤

1865년 4월 14일 밤, 나라 전체를 뒤흔드는 일이 벌어졌다.

포드 극장에서 부스가 링컨 대통령의 뒤통수를 쏘았다. 그날 밤의 표적은 대통령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각 다른 공모자가 국무장관 수어드의 집에 침입해 그의 목을 칼로 찔렀다. 부통령마저 노려졌다. 연방 정부의 지휘부를 하룻밤에 쓸어버리려는 음모였다.

아들의 손님들은, 평범한 손님이 아니었다.

🚪 모른다고 말했다

이틀 뒤 밤, 수사관들이 하숙집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이 메리 서랫을 체포하려던 바로 그때,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곡괭이를 든 남자가 인부 차림으로 서 있었다. 배수로를 파러 왔다고 했다. 그는 이틀 전 밤 수어드의 목을 칼로 찌른 바로 그 공모자, 루이스 파월이었다.

수사관이 물었다. 이 사람을 아느냐고.

겁에 질린 여주인은 답했다. "하느님 앞에 맹세코, 저는 이 사람을 모릅니다. 본 적도 없습니다."

그 한마디가 그녀의 목을 조였다. 암살범 중 하나가 하필 그녀의 문 앞에 나타났고, 그녀는 그를 모른다고 했다. 수사관들에게 그것은 거짓말로 보였다.

⚖️ 군사재판

메리 서랫은 민간 법원이 아니라 군사법정에 섰다. 그를 옭아맨 증거는 대부분 정황이었다.

검찰의 결정적 증인은 존 로이드였다. 그는 메리가 워싱턴 인근에 소유한 선술집을 빌려 운영하던 사람으로, 암살 당일 존 부스 일당이 그곳에 들러 미리 숨겨둔 총과 물품을 챙겨 달아났다고 증언했다. 메리가 그날 낮 그 술집에 들러 "물건을 준비해 두라"는 말을 전했다는 것이 검찰 논리의 핵심 고리였다. 그러나 로이드는 이름난 애주가였고, 체포될 당시에도 술에 취해 있었으며, 증언한 내용 역시 술기운 속에서 오간 대화라는 점이 변호인 측에서 거듭 지적되었다. 목숨이 걸린 증언의 신빙성이 그만큼 흔들렸던 것이다.

함께 처형될 파월은 처형대에서 "메리 서랫은 무죄"라고 말했다. 진짜 가담자 중 하나가 그녀의 무고를 증언한 것이다.

재판부의 판사 아홉 중 다섯이 그녀의 나이와 성별을 이유로 감형을 청원했다. 그러나 그 청원은 처형 이틀 전에야 대통령에게 전해졌고, 존슨 대통령은 사형에는 서명하고 감형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 7월 7일

1865년 7월 7일 오늘 오후, 네 명이 교수대에 올랐다. 그중 하나가 메리 서랫이었다.

교수대에서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은 이러했다. "제발 저를 떨어뜨리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그녀는 미국 연방 정부가 처형한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이전에도, 이후로도 오래 없던 일이었다.

🚪 그리고 아들은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아들 존 서랫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암살 직후 캐나다로, 다시 유럽으로 달아났다. 어머니가 붙잡혀 재판을 받고 교수대에 오르는 동안, 그는 이집트에 숨어 있었다. 이듬해 붙잡혔지만, 그는 군사법정이 아니라 민간 법정에서 재판받았다. 배심원단의 의견은 갈렸고, 그는 풀려났다. 다시 기소되지 않았다.

어머니는 죽고, 아들은 살았다.

링컨의 죽음으로 두 여인이 남았다. 남편을 잃고 슬픔 속에 여생을 보낸 영부인 메리 토드 링컨, 그리고 교수대에 오른 하숙집 과부 메리 서랫. 두 사람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같았다.

2026년 9월 25일 금요일

7월 6일, 저항의 시인 신석정

'이 밤이 너무 길지 않습니까.'

중략

어머니...

밤이 왔습니다.

그 검고 무서운 밤이 또 왔습니다.

...

태양이 가고

...

어둠은 아름다운 전설과 신화까지도 먹칠하였습니다.

어머니

...

옛이야기나 하나 들려 주세요.

이 밤이 너무나 길지 않습니까?


1907년 여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 시절, 일본인 교사가 수업료를 내지 못한 여학생을 학대하자, 아이는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동했다. 무기정학을 당했다.

일제에 맞선 첫 지조였다.

1931년 《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그의 일제에 대한 저항의 지조는 시로도 굽히지 않았다.


'방(房)'

세상이 뒤집어졌었다는 그리고 뒤집어지리라는 이야기는 모두 좁은 방에서 비롯했단다.

...

그 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어느 겨울날

새로운 세대가 오리라는

새로운 세대가 오리라는

그 막막한 이야기는 바다 같이 터져나올 듯한 울분을 짓씹는 젊은 '인사로푸'들이 껴안은 질화로 갓에서 동백꽃보다 붉게 피었다.

천년이 지나갔다.

좁은 방에서.

만년이 지나갔다.

좁은 방에서.


탄압은 거세졌다. 1939년 이 시 '방(房)'으로 강도 높은 조사를 받았다.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

난아,

푸른 대가 무성한 이 언덕에 앉아서

너는 노래를 불러도 좋고 새 같이 지줄대도 좋다.

지치도록 말이 없는 이 오랜 날을 지니고

벙어리처럼 목놓아 울 수도 없는 너의 아버지 나는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

내 심장을 삼으리라.


1940년 '문장'에 투고한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는 아예 검열로 삭제됐다. '문장'은 곧 폐간됐다.

일본어 원고 청탁에 단호히 거절하며 절필을 선언했다.

창씨개명을 거부했고, 경찰서의 출두명령엔 피신했다.

그렇게 광복을 맞았다.

발표 없이 쓰기만 했던 시들이 해방을 맞았다.


'슬픈구조'

...

나와

밤과

무수한 별뿐이로다.

...

흘러도 흘러도 검은 밤뿐이로다.

내 마음 둘 곳은 어느 밤하늘 별이더뇨.


광복 직후, 새나라 문학 건설을 도모했다. 교직 생활과 함께 해방 직후의 불안한 상황을 '서른 여섯 해'의 어둠으로 노래했다.


'꽃덤불'

...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야기하며 이야기하며

...

그러는 동안에 영영 잃어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멀리 떠나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몸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그러는 동안에 맘을 팔아버린 벗도 있다.

...

겨울의 달이 아직도 차거니

...

그 어느 언덕 꽃덤불에 아늑히 안겨 보리라.


광복 이후, 그는 독재 앞에서도 저항했다.

교사들이 '교원노조' 설립을 요구하며 국회 의사당 앞에서 단식농성을 벌였다. 그는 시로써 응원했다.


'단식의 노래'

-싸우는 교육동지들에게-

배고픈 사람들끼리
주저앉고 쓰러진 채
서로서로 얼굴을 본다
눈이 눈을 본다
마음이 마음을 본다

눈시울이 갑자기 뜨거워진다

...

우리들의 것을 찾기 위하여
이웃들의 것을 찾기 위하여
다시는 不義와 不正에 지지 않기 위하여

...

同志여! 그 거룩한 손을 잡고
울어도 좋다!
...
우리의 民主學園을 위해서…


그는 이 시를 썼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며칠의 취조 끝에 풀려났다.

그러나 그의 독재에 대한 저항은 굽히지 않았다.


'영구차의 역사'


강물 같은 밤을

잉태한 촛불 아래

분향焚香이 끝난

다음,

영구차靈柩車는 다락 같은 말에 이끌려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

목메어 우는 소녀를 보았다.

...

그것은 아버지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웃들의 영구차도 아니었다

...

그 어느 별을 지나갔을 나의 외로운 영구차였는지도 모른다.

촛불이 흔들리는 강물 같은 밤에……


남산 중앙정보부로 끌려갔다.

혹독한 취조를 받고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뒤 문학상 심사를 하던 도중에 쓰러졌다.

그리고 일어나지 못했다.


1974년 7월 6일 오늘, 세상을 떠났다. 향년 66세.


시인 신석정. 그의 이름은 잊히지 않았다. 

오랫동안 목가 시인으로만 읽히던 그를, 뒷사람들은 저항 시인으로 다시 불렀다.

2026년 9월 17일 목요일

⛓️ 7월 5일, 울산 무노조 왕국이 뚫린 날

✊ 6월, 그 뒤

1987년 6월, 시민들의 항쟁이 군사정권을 물러서게 했다. 6·29 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약속되었다. 그러나 6·29 이후의 정치 지형에서도 노동자와 농민의 생존권 요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민주화의 공간이 열리자, 그 요구를 자기 손으로 들고 나온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 병영 같은 공장

당시 공장은 군대처럼 통제되었다. 노동자들은 휴일도 없이 하루 12시간 넘게 일했다. 한 시간 일찍 나와 현장을 청소하고 군대식 체조를 했으며, 점심시간에도 일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까지 일일이 기록되었고, 물도 마음대로 마시지 못했다.

정문에서는 두발 검사를 받았다. 머리가 길면 그 자리에서 잘렸다. 관리자는 나이 많은 노동자에게도 반말을 했다. 반장 앞에서 담배를 피웠다는 이유로 정강이를 걷어차이는 일이 있었고, 고위 간부의 차가 지나갈 때 담배를 끄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 통보를 받는 일도 있었다. 인사 고과와 상여금은 차별의 수단이 되었다.

공장 밖에서 이들은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며 천대받았다.

🙏 소박한 요구

1987년 여름, 울산의 노동자들이 회사에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스물한 개 항목이었다. 그 첫째와 둘째는 이러했다. "머리를 기르게 해 달라." "출퇴근할 때만이라도 사복을 입게 해 달라." 공장 밖에서만이라도 천대받는 신분을 감추고,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노조를 만들 권리도, 파업할 권리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요구를 관철할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 그렇게 노조가 태어났다

현대에서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 자체가 금기였다. 창업주 정주영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는 안 된다"고 할 만큼 노조를 완강히 반대했고, 그전까지 노조를 세우려는 시도는 번번이 무산되었다. 회사는 스스로를 '무노조 왕국'이라 불렀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회사의 눈을 피해야 했다.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자들은 울산 옥교동의 한 디스코텍에 몰래 모여 노동조합 결성 대회를 열었다. 초대 위원장은 현대엔진의 노동자 권용목이었다.

'무노조 왕국'의 벽이 처음으로 뚫렸다. 그렇게 노동조합이 태어났다.

🔥 전국으로

소식은 빠르게 퍼졌다.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로 노조 결성이 이어졌다. 다급해진 현대는 계열사에 서둘러 어용노조를 만들어 민주노조 결성을 막으려 했다. 그럼에도 흐름은 울산을 넘어 부산, 마산, 창원, 거제로, 다시 전국으로 번졌다.

7월부터 9월까지 벌어진 노동쟁의는 3,341건이었다. 1960년대 이후 산업화 기간 전체의 쟁의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고, 그중 76%가 노조가 없던 중소 사업장에서 일어났다. 그해가 저물 무렵 노동조합은 2,675개에서 4,103개로, 조합원은 약 104만 명에서 127만 명으로 늘었다.

8월 중순, 울산의 현대 노동자 6만여 명은 중장비를 앞세우고 가족과 함께 도심을 행진했다. 전투경찰이 물러섰다. 8월 말부터 정권은 강경 진압으로 돌아섰지만, 흐름은 멈추지 않았다.

🕯️ 그날

그리고 오늘, 이한열이 끝내 숨졌다.

2026년 9월 16일 수요일

7월 4일, 뉴욕 노예해방

🇺🇸 건국, 그러나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하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밝혔다. 그러나 독립 이후에도 노예제는 남부와 북부 모두에서 이어졌다.

뉴욕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노예제는 약 200년간 존속했다. 1626년 네덜란드인이 처음 노예를 들여왔고, 영국 지배 아래 규모가 커졌다. 1790년 뉴욕의 노예는 2만 1천 명이 넘어, 북부에서 가장 많았다.

폐지는 단번에 이뤄지지 않았다. 1799년 법은 그 뒤에 태어난 아이들만, 그것도 오랜 의무 노동을 마친 뒤에야 풀어주었다. 1817년 법이 마지막 해방일을 1827년 7월 4일로 정했다.

⛓️ 1827년 7월 4일

그렇게 이날, 뉴욕주에서 노예제가 법으로 완전히 끝났다. 약 4,600명이 자유인이 되었다. 뉴욕은 노예제 전면 폐지법을 통과시킨 첫 주였고, 남북전쟁 이전 북미에서 가장 큰 규모의 해방이었다.

해방일이 7월 4일이 된 것은 10년 전 법이 그렇게 정해두었기 때문이다. 하필 나라의 독립기념일과 같은 날이었다.

📅 하루 뒤에

정작 자유를 얻은 사람들은 그날을 축하하지 않았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술 취한 백인들이 독립기념일을 즐기다 벌이는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였고, 시끄러운 그날 대신 자신들만의 날을 갖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이튿날인 7월 5일, 약 4,000명이 브로드웨이를 행진해 아프리칸 시온 교회에 모였다. 그곳에서 흑인 노예제 폐지 운동가 윌리엄 해밀턴이 말했다. "오늘 우리는 쓰라린 속박에서 벗어나 구원받았다."

이 '7월 5일' 기념은 그 뒤로도 수십 년간 이어졌다. 25년 뒤, 탈주 노예 출신의 노예제 폐지 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유명한 연설 "노예에게 7월 4일은 무엇인가"도 7월 5일에 나왔다. 미국이 자유를 기념하는 그날을 노예의 눈으로 되물으며, 나라의 이상과 노예제라는 현실의 모순을 정면으로 고발한 연설이었다.

🎙️ 오늘날

'7월 5일'을 기념하는 전통은 남북전쟁 이후 대체로 사그라들었고, 노예해방을 기리는 날의 자리는 오늘날 6월 19일 준틴스로 옮겨갔다. 다만 더글러스의 그 연설은 지금도 해마다 7월 5일에 낭독된다. 워싱턴에 있는 그의 자택에서는 국립공원관리청이 매년 참석자들과 함께 연설 전문을 소리 내어 읽는다.

2026년 9월 14일 월요일

✈️ 7월 3일, 이란 항공 655편 사과하지 않은 격추

🌊 화약고가 된 만

1979년 혁명으로 국교가 끊긴 뒤, 미국과 이란은 서로를 적으로 여겼다. 1988년의 이란은 이라크와 벌인 전쟁의 8년째를 보내고 있었다. 두 나라는 페르시아만에서 서로의 유조선을 공격하며 상대의 숨통을 조였고, 사람들은 이 국면을 탱커 전쟁이라 불렀다.

미국은 겉으로 중립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이라크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뒤로는 이란에 몰래 무기를 팔았다. 1987년부터는 자국 국기를 새로 단 쿠웨이트 유조선을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만 안에 대규모 함대를 상주시켰는데, 이란은 이를 명백한 적대 행위로 받아들였다.

긴장은 곧 직접 충돌로 번졌다. 그해 4월, 유조선을 호위하던 미 군함이 이란이 부설한 기뢰에 부딪혀 선체가 크게 찢겼다. 나흘 만에 미국은 보복에 나섰고, 단 몇 시간 만에 이란 해군의 가동 전력 절반을 파괴했다. 그 바다 위로 여객기 한 대가 날아오른 것은 그로부터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 7월 3일, 7분

7월 3일 오늘 아침, 이란 남부 반다르아바스 공항에서 여객기 한 대가 이륙했다. 두바이로 향하는 655편이었고, 28분이면 닿는 짧은 노선이었다.

바로 그 시각, 미 순양함 빈센스호는 이란 고속정들과 총격을 주고받고 있었다. 교전에 쫓기던 배는 어느새 이란 영해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레이더에 상승하는 항적 하나가 잡히자, 승무원들은 그것을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F-14 전투기라고 판단했다.

실제로는 여객기였다. 민간용 식별 신호를 내보내며 정해진 항로를 따라 천천히 고도를 높이고 있었다. 그런데도 미 빈센스호는 미사일 두 발을 쏘았다. 이란의 민간 655편이 이륙한 지 7분 만이었다.

탑승객 290명은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그 가운데 66명이 어린이였고, 여섯 나라의 국적을 가진 이들이 함께 타고 있었다.

📉 빗나간 발표

사건 직후 미국이 내놓은 설명은 분명했다. 여객기가 빠른 속도로 하강하며 배를 향해 곧장 날아왔고, 민간 항로를 벗어나 있었다는 것이었다.

두 달 뒤에 나온 국방부 보고서는 그 설명을 대부분 뒤집었다. 여객기는 하강한 적이 없었다. 정해진 항로 안에서 천천히 상승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보고서는 빈센스호의 장교들에게 잘못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미국 대표로 선 사람은 부통령 조지 부시였다. 대선 유세가 한창이던 그는 격추를 정당한 대응이라 옹호하며, 사실이 어떻든 미국을 위해 사과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 훈장

2년이 지나, 미 해군은 빈센스호의 함장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페르시아만에서 보인 뛰어난 복무가 이유라고 했다. 리전 오브 메리트라 불리는 그 훈장의 표창장 어디에도, 그가 격추한 여객기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 655

이란은 미국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세웠다. 소송은 여러 해를 끌다가 1996년에야 합의에 이르렀다. 미국은 "깊은 유감"을 표하고 희생자 한 사람당 약 21만 달러의 배상금을 냈지만, 끝내 법적 책임은 인정하지 않았고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 태도는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았다.

미국에서 이 사건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이란에서는 해마다 그날을 기린다. 그리고 이란 항공은 여전히 테헤란과 두바이를 잇는 그 노선에 655라는 편명을 붙인다. 

"그리고 2026년, 미국과 이란은 그 격추가 일어난 바로 그 바다에서 다시 전쟁을 벌이고 있다."

2026년 9월 10일 목요일

🖤 7월 2일, 덴마크 비지, 죽지 않는 생각

🎟️ 복권으로 산 자유

덴마크 비지는 1767년 무렵 카리브해 세인트토머스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이름은 텔레마크였다. 열네 살 무렵 노예상 선장 조지프 비지에게 팔려 그의 성을 따랐고, 여러 항해 끝에 찰스턴에 정착했다. 1799년, 길거리 복권에 당첨된 그는 그 돈으로 자기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샀다. 그러나 그는 아내는 사지 못했다. 비지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아내와 자식들은 사슬 안에 남았다.

⛪ 교회를 세우다

목수로 일하며 그는 노예제 폐지를 다룬 글을 읽었고,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스스로 세운 나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1816년 무렵 찰스턴에 독립 흑인 교회를 여러 흑인들과 함께 창립했다. 신도는 1,800명을 넘었다. 당국은 이 교회를 거듭 단속했다.

⚔️ 최대 봉기의 계획

결국 그는 봉기를 계획했다. 도시와 인근 농장의 흑인 수백에서 수천 명이 가담하기로 했다. 계획은 이랬다. 시내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확보하고, 노예주들을 제압한 뒤 도시를 장악하고, 배를 타고 아이티로 향한다. 거사일은 1822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잡혔다.

당시 훅인 봉기중 역대 최대의 계획이었다.

🔍 밀고와 수색

계획은 안에서 새어 나갔다. 봉기에 반대한 노예 몇 사람이 주인에게 밀고했다. 소문이 번지자 비지는 거사일을 앞당겼다. 그러나 6월, 그의 이름이 주모자로 지목되었고 찰스턴 일대에 이틀에 걸친 수색이 벌어졌다. 그는 자유를 얻지 못한 아내의 집에 숨어 있다 붙잡혔다.

⚖️ 미리 쓰인 판결

찰스턴 노역소에 갇힌 그를 비밀리에 꾸려진 특별 법정이 심리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고 대부분 전해 들은 말이었다. 피고들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문은 이미 쓰여 있었다. 역사가에 따르면, 이미 정해진 판결이 낭독되자 비지는 봉기의 과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답했다. 자신을 목매달 수는 있어도 그 생각까지 죽일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 1822년 7월 2일

1822년 7월 2일 오늘, 덴마크 비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와 함께 연루된 서른네 명이 처형되었고, 더 많은 이들이 유죄를 받거나 추방되었다. 얼마 뒤 그가 세운 교회는 백인 당국에 의해 불에 탔다. 모든 흑인 교회는 금지됐다. 이때부터 신도들은 공개된 예배당 없이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30년간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올렸다.

🧱 다시 세워진 교회

남북전쟁이 끝나자 신도들이 정식으로 재조직하고 '이매뉴얼'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캘훈가 자리에 2층 목조 교회를 세웠다.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덴마크 비지의 아들 로버트 비지였고, 흑인 노동자들이 직접 지었다. 목조 건물이었고 얼마 뒤 지진으로 붕괴됐다. 1891년, 지금의 고딕 리바이벌 양식의 벽돌 건물이 완공되었다.

🖤 193년 뒤, 현재

그리고 2015년 6월, 스물한 살의 백인 남성이 바로 그 이매뉴얼 AME 교회에 들어가 한 시간가량 성경 공부에 함께 앉아 있다가 아홉 명을 총으로 살해했다. 희생된 아홉 명 중에는 담임목사이자 주 상원의원이던 클레멘타 핑크니도 있었다. 다시 벌어진 인종 증오의 폭력은 이렇게 193년간 이어졌다.


출처: 하워드 진의 《살아 있는 미국 역사》

🏠 7월 7일, 메리 서랫 하숙집의 과부, 865년

🏠 하숙집 메리 서랫은 워싱턴에서 하숙집을 운영하던 과부였다. 남편을 잃고 홀로 세 자식을 키우며, 방을 세놓아 생계를 이었다. 그 집에는 아들 존의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젊은 남자들이 아들을 찾아와 방에 모이곤 했다. 어머니는 이따금 그들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