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권으로 산 자유
덴마크 비지는 1767년 무렵 카리브해 세인트토머스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해진다. 본래 이름은 텔레마크였다. 열네 살 무렵 노예상 선장 조지프 비지에게 팔려 그의 성을 따랐고, 여러 항해 끝에 찰스턴에 정착했다. 1799년, 길거리 복권에 당첨된 그는 그 돈으로 자기 몸값을 치르고 자유를 샀다. 그러나 그는 아내는 사지 못했다. 비지는 자유인이 되었지만 아내와 자식들은 사슬 안에 남았다.
⛪ 교회를 세우다
목수로 일하며 그는 노예제 폐지를 다룬 글을 읽었고, 아이티에서 노예들이 스스로 세운 나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그는 1816년 무렵 찰스턴에 독립 흑인 교회를 여러 흑인들과 함께 창립했다. 신도는 1,800명을 넘었다. 당국은 이 교회를 거듭 단속했다.
⚔️ 최대 봉기의 계획
결국 그는 봉기를 계획했다. 도시와 인근 농장의 흑인 수백에서 수천 명이 가담하기로 했다. 계획은 이랬다. 시내의 무기고를 습격해 무기를 확보하고, 노예주들을 제압한 뒤 도시를 장악하고, 배를 타고 아이티로 향한다. 거사일은 1822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로 잡혔다.
당시 훅인 봉기중 역대 최대의 계획이었다.
🔍 밀고와 수색
계획은 안에서 새어 나갔다. 봉기에 반대한 노예 몇 사람이 주인에게 밀고했다. 소문이 번지자 비지는 거사일을 앞당겼다. 그러나 6월, 그의 이름이 주모자로 지목되었고 찰스턴 일대에 이틀에 걸친 수색이 벌어졌다. 그는 자유를 얻지 못한 아내의 집에 숨어 있다 붙잡혔다.
⚖️ 미리 쓰인 판결
찰스턴 노역소에 갇힌 그를 비밀리에 꾸려진 특별 법정이 심리했다. 확실한 증거는 없었고 대부분 전해 들은 말이었다. 피고들은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판결문은 이미 쓰여 있었다. 역사가에 따르면, 이미 정해진 판결이 낭독되자 비지는 봉기의 과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답했다. 자신을 목매달 수는 있어도 그 생각까지 죽일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 1822년 7월 2일
1822년 7월 2일 오늘, 덴마크 비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와 함께 연루된 서른네 명이 처형되었고, 더 많은 이들이 유죄를 받거나 추방되었다. 얼마 뒤 그가 세운 교회는 백인 당국에 의해 불에 탔다. 모든 흑인 교회는 금지됐다. 이때부터 신도들은 공개된 예배당 없이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30년간 비밀리에 모여 예배를 올렸다.
🧱 다시 세워진 교회
남북전쟁이 끝나자 신도들이 정식으로 재조직하고 '이매뉴얼'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캘훈가 자리에 2층 목조 교회를 세웠다. 이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 바로 덴마크 비지의 아들 로버트 비지였고, 흑인 노동자들이 직접 지었다. 목조 건물이었고 얼마 뒤 지진으로 붕괴됐다. 1891년, 지금의 고딕 리바이벌 양식의 벽돌 건물이 완공되었다.
🖤 193년 뒤, 현재
그리고 2015년 6월, 스물한 살의 백인 남성이 바로 그 이매뉴얼 AME 교회에 들어가 한 시간가량 성경 공부에 함께 앉아 있다가 아홉 명을 총으로 살해했다. 희생된 아홉 명 중에는 담임목사이자 주 상원의원이던 클레멘타 핑크니도 있었다. 다시 벌어진 인종 증오의 폭력은 이렇게 193년간 이어졌다.
출처: 하워드 진의 《살아 있는 미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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