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떠나라는 통보
1946년 2월, 미 해군 준장 벤 와이엇은 비키니 환초 주민들을 불러 모아 섬을 떠나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 일이 "인류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주민 지도자 유다는 모든 것이 신의 뜻에 달렸다는 말로 답했다. 그해 3월 7일, 167명의 주민이 조상 대대로 살아온 섬을 떠나 롱게리크 환초로 옮겨졌다. 그들은 이주가 일시적이라고 들었다.
☢️ 7월 1일
1946년 7월 1일 오늘 아침, 비키니 환초의 석호에는 낡은 군함 90여 척이 표적으로 떠 있었다. 그중에는 전쟁에서 노획한 일본과 독일의 전함도 있었다. 미군은 이 함대 상공에서 나가사키에 쓴 것과 같은 종류의 원자폭탄을 터뜨렸다. 크로스로즈 작전의 첫 실험, 암호명 '에이블'이었다.
미국은 이미 한 해 전에 폭탄을 실전에 두 번 썼고, 그전에 시험으로도 성공을 확인한 뒤였다. 그래서 이 실험의 목적은 폭탄의 성능 확인이 아니었다. 원폭이 군함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재보는 것, 그리고 원자력 시대에 해군이 여전히 쓸모 있는지를 두고 벌어진 군 내부의 다툼을 가리는 것이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때와 달리 이 실험에는 대규모 언론과 외국 참관인이 입회했다. 냉전이 시작되던 시점의 공개된 힘의 과시이기도 했다.
에이블의 폭탄은 표적을 크게 빗나가 다섯 척만 가라앉혔다. 해군은 안도했다. 그러나 표적함에 실어둔 돼지와 염소, 쥐들은 빗나간 폭발에도 상당수가 방사선으로 죽거나 병들었다. 눈에 보이는 폭풍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방사선이 진짜 위협이었다.
🏝️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7월 25일, 두 번째 실험 '베이커'가 물속에서 이어졌다. 1946년부터 1958년까지 비키니 환초에서는 스물세 차례의 핵실험이 이루어졌다. 롱게리크로 옮겨진 주민들은 곧 식량과 물이 부족해졌고, 이후 다시 다른 섬으로 옮겨졌다. 일시적이라던 이주는 끝나지 않았다. 방사능 오염으로 섬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 되었다.
👙 이름의 여행
1946년 7월 5일, 첫 실험 나흘 뒤, 프랑스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는 파리의 한 수영장에서 두 조각짜리 수영복을 선보였다. 그는 이 옷을 '비키니'라고 불렀다. 며칠 전 보도된 그 핵실험만큼 폭발적인 반응을 노린 이름이었다. 정식 모델들이 착용을 거부하자, 무용수 미슐린 베르나르디니가 대신 입고 무대에 섰다. 경쟁하던 디자이너 자크 앵은 비슷한 시기에 조금 더 큰 수영복을 내놓으며 '아톰(원자)'이라 불렀다.
섬에서 사람들이 쫓겨나고 땅이 오염되던 그해 여름, 그 섬의 이름은 지구 반대편에서 여름의 대명사가 되었다.
🌡️ 그 후
비키니 환초는 오늘날에도 사람이 살지 않는다. 원주민과 그 후손들은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킬리섬과 마주로에 흩어져 살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정착한 킬리섬마저 해수면 상승과 강한 폭풍으로 살기 어려워졌다. 핵실험으로 고향을 잃은 사람들이, 이제는 기후위기로 두 번째 삶터마저 잃을 처지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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