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끌려오다
카지미에시 피에호프스키는 폴란드의 보이스카우트였다. 나치는 보이스카우트를 저항의 씨앗으로 보아 잡아들였다. 그는 프랑스로 달아나려 헝가리 국경을 넘다 붙잡혔다. 여러 감옥을 거쳐 1940년 6월 20일, 아우슈비츠에 끌려왔다. 수인 번호 918번이었다.
🤝 처형 명단
그는 수용소에서 처형 명단을 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어느 날 명단에서 친구 에우게니우시 벤데라의 이름을 보았다. 곧 죽을 친구였다.
두 사람은 탈출을 모의했다. 여기에 두 사람이 더 합류했다. 신부 유제프 렘파르트, 그리고 폴란드 국내군 장교 스타니스와프 야스테르. 네 사람의 일이 저마다 달랐고, 그 다른 일들이 합쳐져 하나의 계획이 되었다. 독일어가 가장 능숙한 피에호프스키가 지휘를 맡았다.
🔧 임무
벤데라는 정비공이었다. 차고에서 차를 빼내는 일을 맡았다. 피에호프스키와 나머지는 제복과 무기가 있는 창고를 맡았다.
준비는 미리 이루어졌다. 피에호프스키는 자신이 석탄을 채우던 투입구의 빗장을 손봐, 닫혀도 잠기지 않게 해두었다. 창고 문을 열 가짜 열쇠도 만들어두었다.
🎖️ 제복과 차
1942년 6월 20일 오후, 일과가 끝나갈 무렵이었다. 네 사람은 짐수레를 끄는 작업조로 위장했다. 쓰레기를 버리러 간다고 둘러댔다. 경비병은 별 주의 없이 그들을 적어두고 통과시켰다.
그들은 석탄 투입구로 창고 지하에 들어갔다. 가짜 열쇠로 문을 열었고, 잠긴 무기고는 쇠지레로 부쉈다. SS 제복으로 갈아입고 소총과 권총, 수류탄을 챙겼다. 피에호프스키는 바느질에 능해, 제복에 계급장을 직접 달았다.
벤데라는 차고로 가, 수용소에서 가장 빠른 차를 골랐다. 슈타이어 220. SS 장교의 차였다. 그는 그 차를 몰고 나와, SS 제복을 입은 세 사람이 기다리는 곳에 댔다.
🚗 정문
차는 정문으로 향했다. 'Arbeit Macht Frei', 노동이 자유롭게 하리라. 그 글자 아래 차단기가 내려져 있었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차가 멈췄다. 경비병이 다가왔다.
피에호프스키가 창밖으로 몸을 내밀어, SS 장교의 계급장을 보이며 독일어로 소리쳤다. 잠자느냐, 이놈들아. 문 열어라.
경비병이 황급히 차단기를 올렸다. 차는 정문을 빠져나갔다. 총성은 없었다. 경비병이 자세히 보았다면, 그 장교들의 얼굴이 식은땀에 젖어 창백한 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탈출한 그날은, 그가 아우슈비츠에 끌려온 지 꼭 2년 되는 날이었다.
🩸 남은 자들의 대가
네 사람은 흩어졌고, 살아남았다. 아우슈비츠는 탈출할 수 없다던 말이 그날 깨졌다.
그러나 대가는 떠난 자가 아니라 남은 자들이 치렀다. 나치는 보복으로 피에호프스키와 야스테르의 부모, 렘파르트의 어머니를 아우슈비츠로 끌고 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죽었다. 차고를 관리하던 카포 쿠르트 파할라는 탈출을 도왔다는 의심을 받아 고문당한 뒤, 11블록의 좁은 감방에 갇혀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죽었다.
자유를 얻은 네 사람의 몫을, 얼굴도 모르는 부모와 카포가 대신 갚은 셈이었다.
탈출은 SS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그들은 다시는 같은 일이 없도록 했다. 이 탈출 뒤, 아우슈비츠는 모든 수감자의 팔에 번호를 문신으로 새기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신분을 속이고 정문을 빠져나간 일이, 수십만 명의 살갗에 지워지지 않는 번호로 남았다.
🕯️ 또 하나의 감옥
피에호프스키는 끝내 나치에게 다시 잡히지 않았다. 그는 폴란드 국내군에 들어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싸웠다.
그러나 그의 감옥은 한 번 더 남아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폴란드에 들어선 공산 정권은, 그를 반공 저항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다시 가두었다. 나치의 수용소를 제 손으로 빠져나온 사람이, 같은 조국의 다른 정권 아래 7년을 갇혔다.
그는 2017년, 아흔여덟에 눈을 감았다. 정문으로 걸어 나온 그날로부터 일흔다섯 해가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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