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마르크 블로크는 1886년 리옹의 유대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자이기 전에 군인이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해 두 차례 부상당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939년 전쟁이 다시 터지자, 쉰셋의 나이에 또 한 번 군에 복귀했다.
그러나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군복이 아니라 그가 바꿔놓은 역사학 그 자체였다.
🌾 누구의 역사인가
블로크 이전의 역사는 왕과 영웅의 역사였다. 누가 즉위했고 누가 전쟁에 이겼으며 어떤 법전이 반포되었는가. 역사는 권력자의 말과 조약과 연대표로 쓰였다. 들에서 밭을 갈고 빵을 굽고 세금을 내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기록 어디에도 없었다.
블로크는 그 시선을 뒤집었다. 1929년 그는 동료 뤼시앵 페브르와 함께 학술지 《아날(Annales)》을 창간하고, 새로운 역사학의 길을 열었다. 사건과 인물의 나열이 아니라, 사회와 경제가 흘러가는 긴 구조를 보려 했다. 그는 지리와 사회학과 경제학을 역사에 끌어들였고, 중세의 경작지 형태와 화폐, 농민의 삶과 믿음을 사료로 삼았다.
그의 대표작이 그 방향을 보여준다. 《프랑스 농촌사》는 왕조의 흥망이 아니라 땅과 농민의 천 년을 다뤘고, 《봉건사회》는 제도의 조문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간 사람들의 관계와 감정을 그렸다. 왕과 법전의 역사에서, 이름 없이 살다 간 다수의 역사로. 블로크가 연 이 길 위에서 20세기 역사학 전체가 다시 쓰였다. 그가 '아날학파'의 창시자로 불리는 까닭이다.
✡️ 이방인이 된 프랑스인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너졌다. 비시 정권의 반유대법이 그의 삶을 갈랐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는 소르본의 자리를 잃었고, 클레르몽페랑으로, 다시 몽펠리에로 밀려났다.
그는 자신을 이렇게 적었다. 나는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나, 프랑스인으로 죽는다. 박해가 거세지자 그는 레지스탕스로 들어갔다. 블랑샤르, 아르파종, 나르본 같은 가명을 쓰며, 리옹 지역 저항 조직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 몽뤼크 감옥
1944년 3월 8일, 블로크는 리옹에서 게슈타포에 체포됐다. 몽뤼크 감옥에 갇혀 고문당했으나, 저항 조직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옥중에서도 그는 역사학자였다. 함께 갇힌 젊은 저항자들에게 프랑스 역사를 가르쳤고, 한 사람은 봉건 시대 경작지 형태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고 회고했다. 고문을 견딘 쉰여덟의 그는 둥근 안경을 쓴 채, 갇힌 자의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1944년 6월 16일
노르망디 상륙이 시작되자 독일군은 후퇴를 준비하며 흔적을 지우려 했다. 1944년 6월 16일 저녁, 게슈타포는 몽뤼크 감옥에서 스물여덟 명의 저항자를 끌어냈다. 손이 묶인 채 트럭에 실린 이들은 생디디에드포르망 인근의 빈 들판으로 끌려갔다. 가는 길에 한 독일 장교는 전쟁은 아직 이긴다고, 곧 런던이 무너진다고 떠벌렸다.
들판에서 그들은 네 명씩 끌려 나가 총을 맞았다. 블로크의 곁에는 열여섯 살 소년이 떨고 있었다. 총알이 아플까 두려워하는 소년에게, 블로크는 말했다. 아니란다, 얘야, 아프지 않아. 그는 "프랑스 만세"를 외치며 가장 먼저 쓰러졌다.
이튿날 아침, 생디디에드포르망의 학교 교사가 들판에서 시신들을 발견했다. 한참 동안 블로크의 죽음은 '어두운 소문'으로만 떠돌았고, 뒤늦게야 페브르에게 확인되었다.
📚 미완의 유작
블로크는 두 권의 책을 끝맺지 못하고 떠났다.
하나는 《이상한 패배》였다. 1940년 프랑스가 왜 그토록 빠르게 무너졌는지, 군 지도부와 사회의 실패를 냉정하게 파고든 책이다. 다른 하나는 《역사를 위한 변명》이었다. 역사가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사색한 글로, 나치의 총살로 집필이 멈춘 채 남았다. 두 책 모두 그가 죽은 뒤 출간되어 고전이 되었다.
1941년 그가 쓴 유언에는 평생의 원칙이 담겼다. 나는 언제나 생각과 표현에서 완전한 진실하기를 힘써 왔다. 크뢰즈 지방의 그의 묘비에는 그가 바란 대로 한 줄이 새겨졌다. "딜렉시트 베리타템(Dilexit Veritatem)"은 라틴어로 "그는 진실을 사랑했다"는 뜻이다.
🕯️ 잊혔다가, 되살아나다
처형 현장에는 1946년 추모비가 세워졌다. 그날 함께 총살된 저항자들의 이름과 나란히 그의 이름도 새겨졌다. 그러나 한동안 블로크의 죽음은 학계 바깥에서 잊혔다.
그가 다시 발견된 것은 1980~90년대였다. 학술 모임과 연구서가 그의 삶을 재조명했고, 스트라스부르의 학교와 대학에 그의 이름이 붙었다. 그를 가둔 몽뤼크 감옥은 국가 기억의 장소로 보존되었다. 잊혔던 역사학자가 천천히 프랑스의 기억 속으로 돌아온 것이다.
2024년 11월, 마크롱 대통령이 스트라스부르 해방 80주년을 맞아 발표했다. 그의 저작과 가르침과 용기를 기려, 마르크 블로크를 팡테옹에 모신다고. 그 자리에는 그의 후손들이 함께했다.
⚖️ 두 개의 프랑스를 끌어안다
블로크는 《이상한 패배》에 이런 문장을 남겼다. 프랑스 역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두 부류의 프랑스인이 있다고. 랭스 대관식의 기억에 가슴 떨리기를 거부하는 자들, 그리고 연맹 축제의 이야기를 감동 없이 읽는 자들.
랭스 대관식은 왕정과 가톨릭의 프랑스를 상징한다. 역대 국왕이 기름 부음을 받고 즉위하던 자리다. 연맹 축제는 그 반대편, 혁명과 공화국의 프랑스를 상징한다. 1790년, 시민들이 새로운 질서에 충성을 맹세하던 자리다. 프랑스 근현대사는 이 두 기억이 서로를 부정하며 충돌해 온 역사였다. 왕정의 프랑스를 사랑하는 자와 혁명의 프랑스를 사랑하는 자가, 서로를 진짜 프랑스인이 아니라 여겼다.
블로크는 그 둘을 대립시키지 않았다.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 모두에 가슴 떨릴 수 있어야 프랑스를 이해한다고 했다. 천 년에 걸쳐 쌓인 모든 프랑스를 끌어안는 시각이었다. 그에게 프랑스인은 혈통이나 땅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음으로 느끼면 누구나 프랑스인이었다.
그러나 이 문장은 오염되었다. 2015년, 극우 정치인 마리옹 마레샬이 이를 비틀어 말했다. 랭스 대관식과 연맹 축제에 가슴 떨리지 않는 자는 진정한 프랑스인이 아니라고. 포용의 문장이 배제의 잣대로 뒤집힌 것이다. 지난 20여 년간 극우는 블로크를 끊임없이 끌어다 인용했다. 유대인이자 좌파 지식인이며 나치에 맞서 죽은, 그러면서도 프랑스를 깊이 사유한 그 이름이 탐났던 것이다. 그의 증손자는 말했다. 극우의 강령은 블로크와 완전히 배치되는데도 그를 인용하는 것이 모순이며, 깊이 불쾌하다고.
블로크의 글은 그 전유를 스스로 반박한다. 그는 적었다. 나는 프랑스인이고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으며, 내 마음에서 그 무엇도 프랑스를 뽑아낼 수 없다고. 뿌리가 흙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는 땅과 혈통을 앞세우는 모든 논리와 정반대편에 섰다.
🏛️ 2026년 6월 23일, 팡테옹
순국 82년 뒤, 프랑스는 그를 국가의 전당으로 불러들였다. 2026년 6월 23일, 마르크 블로크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정치와 문화, 과학의 위인에게만 허락되는 그 자리에 든 최초의 역사학자였다.
다만 그 관은 비어 있었다. 그의 유해는 유족의 뜻에 따라 크뢰즈의 시골 묘지에 그대로 두었고, 팡테옹의 관에는 훈장과 사진, 편지가 담겼다.
함께 운구된 아내 시몬은 남편이 처형되기 전에 떠났다. 남편이 체포되자 신분을 감춘 채 병으로 입원했고, 그의 생사를 끝내 알지 못한 채 1944년 7월 2일 눈을 감았다. 그녀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역사를 쓰던 사람이 역사가 되어 돌아왔다. 진실을 사랑한다고 적었던 한 학자가, 그 진실을 위해 죽은 지 82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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