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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22일 월요일

📂 6월 13일, 펜타곤 페이퍼스

 📷 1968년 3월, 어느 아침

베트남 꽝응아이성의 작은 마을 미라이에 미군 한 중대가 들어섰다. 그날 아침 네 시간 동안 주민 수백 명이 죽었다. 노인과 여자와 아이였다. 무장한 사람은 없었다. 군은 이 일을 작전의 성공으로 보고했고, 일 년 넘게 묻어 두었다. 진실이 알려진 것은 1969년 11월, 한 기자가 그것을 캐낸 뒤였다.

이것이 그 무렵 전쟁이 도달한 자리였다.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 거리로 나온 사람들

저항은 강의실에서 시작되었다. 1965년 봄, 대학마다 교수와 학생이 모여 밤새 전쟁을 토론하는 자리가 열렸다. 그 목소리는 곧 거리로 나왔다.

1965년 11월 27일, 워싱턴 기념탑 앞에 이만 오천 명이 모였다. 소아과 의사 벤저민 스폭이 연단에 섰다. 미국에서 그의 육아서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마틴 루서 킹의 아내 코레타 스콧 킹이 그 곁에서 연설했다. 포크 가수 조앤 바에즈와 필 오크스가 노래했다. 백악관 앞을 돌아 의회로 행진이 이어졌다.

해가 갈수록 사람은 늘었다. 시위는 한 도시의 일이 아니라 전국의 일이 되었다.

🕵️ 정해진 답

정부는 답을 미리 정해 두었다. 존슨은 이 많은 사람의 뒤에 외국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모스크바나 베이징이 시위에 돈을 댄다는 증거를 그는 CIA에 요구했다. 찾아내라기보다 입증하라는 명령에 가까웠다. 그렇게 1967년 가을, 자국민을 감시하는 비밀 작전이 시작되었다. CIA가 해외에만 손을 대도록 정한 헌장을 어긴 일이었다.

요원들은 대학에 잠입했다. 반전 인사의 이름이 수십만 건의 색인으로 쌓였다. FBI도 같은 일을 했다. 군도 민간인 십만 명의 파일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외국의 손은 나오지 않았다. CIA는 백악관에 보고했다. 공산주의의 자금도, 지휘도, 증거가 없다고. 존슨은 그 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닉슨이 자리를 이어받아 같은 보고서를 다시 청했다. 답은 같았다.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도 같았다. 사찰만 1974년까지 이어졌다. 헬름스는 뒷날 털어놓았다. 그 광범위한 감시는 외국의 손이 없음을 대통령에게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고. 답은 처음부터 나와 있었다. 권력이 그 답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 금고 속의 기록

같은 시기, 다른 한 사람이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였다. 그는 늦어도 1965년에는 이 전쟁을 이길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그 판단을 밖으로 내지 않았다.

1967년 6월, 그는 비밀리에 연구를 발주했다. 미국이 어떻게 이 전쟁에 이르렀는지를 기록으로 남기려 했다. 대통령 존슨에게도, 국무장관 러스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현직 국방장관이 자기 정부 몰래, 자기 정부가 치르는 전쟁의 실패를 해부한 것이다.

분석가 서른여섯 명이 열여덟 달에 걸쳐 작업했다. 결과는 마흔일곱 권, 칠천 쪽이었다. 1969년 초 완성되었으나 아무도 읽지 않았다. 뒷날 「펜타곤 페이퍼스」라 불릴 그 기록은 몇몇 관료의 금고 속에 잠겼다.

⛓️ 감옥을 택한 청년

연구에 참여한 사람 가운데 대니얼 엘즈버그가 있었다. 그는 보고서 전체를 읽은 극소수였다. 한때 미국의 개입을 지지한 매파였다.

1969년 8월, 그는 한 모임에서 징집을 거부한 청년 랜디 케일러의 연설을 들었다. 케일러는 곧 감옥에 들어간다고 담담히 말했다. 친구들이 그곳에 있어 기쁘다고 했다. 엘즈버그는 강당을 나와 빈 화장실에 주저앉아 한 시간 넘게 울었다. 그를 바꾼 것은 말이 아니라 그 삶이었다.

그해 가을, 엘즈버그는 동료 앤서니 루소와 함께 문서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의회를 택했다. 풀브라이트와 맥거번 같은 상원의원에게 문서를 건넸으나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1971년 3월 2일, 그는 마흔일곱 권 가운데 마흔세 권을 《뉴욕타임스》 기자 닐 시핸에게 넘겼다.

📰 1971년 6월 13일

일요일 아침, 《뉴욕타임스》 1면에 두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하나는 닉슨의 딸 트리샤의 결혼식 사진이었다. 다른 하나는 펜타곤 페이퍼스의 첫 보도였다. 닉슨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거기 적힌 거짓말은 전임자들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무관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 거짓 위의 전쟁

문서가 드러낸 것은 두 겹이었다. 첫째, 이 전쟁은 거짓 위에 세워졌다. 둘째, 정부는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병사를 계속 보냈다.

미국은 작전을 은밀히 넓혀 왔다.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폭격했고, 북베트남 연안을 기습했다. 어느 것도 보도되지 않았다. 문서는 북베트남 폭격이 적의 전의를 꺾지 못한다는 정부 자신의 판단을 담고 있었다.

미국이 왜 그곳에 있었는지도 적혀 있었다. 1965년 국방차관보 존 맥노턴의 메모가 그 목표를 숫자로 남겼다. 칠십 퍼센트는 굴욕적인 패배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이십 퍼센트는 남베트남을 중국의 손에서 지키기 위해서였다. 남베트남 국민을 위해서는 십 퍼센트뿐이었다. 동맹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체면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 네 대통령의 거짓

거짓의 주인은 네 명이었다.

트루먼은 시작을 숨겼다. 1950년부터 미국은 프랑스의 식민지 전쟁에 군사 원조를 댔다. 개입은 알려진 것보다 일렀다.

아이젠하워는 약속을 깼다. 1954년 제네바 협정은 이 년 뒤 통일 선거를 정했다. 그 선거가 열리면 호찌민이 이길 것이 분명했다. 미국은 선거가 열리지 못하게 했다. 입으로는 자결을 말하고 손으로는 그것을 막았다.

케네디는 동맹의 죽음을 미리 알았다. 1963년 11월, 미국이 세운 남베트남 대통령 응오딘지엠이 쿠데타로 무너지고 살해되었다. 문서는 케네디 행정부가 그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음을 보여 주었다.

존슨의 거짓이 가장 또렷했다. 1964년 유세에서 그는 「우리는 더 넓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고 거듭 말했다. 「아시아의 청년들이 할 일을 시키려고 미국의 아들들을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폭격을 원하는 쪽은 상대 후보라고 몰아세웠다. 그러나 북베트남 폭격 계획은 선거 한참 전에 마련되어 있었다. 통킹만 결의안의 초안조차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에 작성되어 구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 막으려는 손

정부는 막아야 했다. 보도 다음 날, 법무장관 존 미첼이 중단을 요구했다. 《뉴욕타임스》가 응하지 않자 가처분을 받아냈고, 세 번째 기사를 끝으로 보도가 멈췄다. 연방정부가 안보를 이유로 신문을 사전에 막은 첫 사례였다.

그러나 엘즈버그는 이미 사본을 여러 곳에 나눠 둔 뒤였다. 6월 18일 《워싱턴포스트》가 받아 이었다. 정부가 막으면 다른 신문이 터뜨렸다. 결국 열아홉 개 신문이 이 문서를 들고 있었다. 한 곳을 막는 일은 처음부터 가망이 없었다.

사건은 빠르게 대법원에 닿았다. 1971년 6월 30일, 대법원은 여섯 대 셋으로 정부에 패소를 안겼다. 사전 검열을 정당화할 입증 책임을 정부가 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휴고 블랙은 적었다. 언론의 자유는 통치자가 아니라 피치자를 위해 보호되며, 권력을 가진 자는 거북한 언론을 견뎌야 한다고.

법으로 막는 데 실패하자, 정부는 방식을 바꿨다. 백악관은 비밀 공작반을 꾸렸다. 누수를 막는다 하여 「배관공」이라 불렸다. 이들은 엘즈버그의 약점을 캐려고 그의 정신과 의사 사무실에 침입했다. 같은 자들이 뒤에 워터게이트 빌딩에 들어갔다. 닉슨이 그 일을 승인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974년 8월, 그는 사임했다. 막으려던 손이 막으려던 자를 무너뜨렸다.

🌫️ 그 후

발주자와 폭로자의 길은 갈렸다.

맥나마라는 오래 침묵했다. 1968년 국방부를 떠나 세계은행으로 갔다. 자신이 발주한 문서가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그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틀렸다, 끔찍하게 틀렸다」고 적은 것은 1995년의 일이었다. 2009년 세상을 떠났다.

엘즈버그는 침묵하지 않았다. 그의 혐의는 정부의 불법을 이유로 1973년 기각되었다. 그는 평생을 반전과 내부고발의 편에 섰다. 뒷날의 고발자들을 옹호했다. 2023년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은 진실을 묻었고, 한 사람은 진실을 꺼냈다. 같은 칠천 쪽이 두 삶에 정반대의 무게로 얹혔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 올리버 스톤, 피터 코즈닉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 앨런 브링클리

잿더미의 유산 - 팀 와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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