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3년 6월 11일, 사이공의 교차로
1963년 6월 11일 아침, 사이공의 번잡한 거리에 300여 명의 승려가 행진했다. 그중 한 노승이 앞으로 나섰다. 틱꽝득. 그는 길 한복판 방석 위에 가부좌로 앉았다. 다른 승려들이 5갤런들이 휘발유 통을 그의 몸에 부었다. 틱꽝득은 직접 성냥을 그어 무릎 위에 떨어뜨렸다.
불길이 그를 삼켰다. 그는 근육 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곁에 있던 승려들이 소방차를 막아섰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다. 10분 만에 노승은 뒤로 쓰러졌다.
AP 통신 기자 맬컴 브라운이 그 장면을 찍었다. 사진은 이튿날 전 세계 신문 1면에 실렸다. 그날 이전까지 '베트남'이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던 미국인들이, 그날 이후 그 이름을 입에 올렸다. 조간을 펼친 케네디가 탄식했다. "맙소사."
⛪ 가톨릭 형제의 나라
틱꽝득은 무엇에 항의해 몸을 태웠나. 그 답은 한 가문에 있었다.
응오딘지엠은 1955년 부정선거로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이 됐다. 미국은 그를 공산주의에 맞서는 보루로 떠받쳤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가족 통치였다. 동생 응오딘뉴가 비밀경찰과 특수부대를 쥔 실세였고, 또 다른 동생 응오딘껀은 중부를 봉건 영주처럼 다스렸으며, 형 응오딘툭은 대주교로 종교적 권위를 보탰다.
지엠은 독실한 가톨릭이었다. 다수인 불교도는 군 진급에서, 공직에서, 토지에서 차별받았다. 프랑스 식민기부터 이어진 가톨릭 우대 구조를 정권이 그대로 물려받았다.
도화선은 1963년 5월 8일이었다. 후에에서 정부가 석가탄신일의 불교기 게양을 금지하자 시위가 일었고, 정부군이 발포해 비무장 민간인 9명이 죽었다. 며칠 전 가톨릭 행사에서는 종교기 게양이 허용됐던 터였다. 분노가 전국으로 번졌다. 6월 11일의 불길은 그 한 달간 쌓인 위기의 정점이었다.
💋 바비큐를 말한 여자
정권에는 또 한 사람의 얼굴이 있었다. 마담 뉴.
본명은 쩐레쑤언, '봄의 아름다움'이라는 뜻이었다. 응오딘뉴의 아내이자 지엠의 제수였다. 지엠이 평생 독신이었기에, 한 궁에 함께 살던 그가 사실상 영부인이었다. 귀족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결혼과 함께 가톨릭으로 개종한 여자. 프랑스어와 영어는 유창했으나 베트남어는 서툴렀다. 벌집처럼 틀어 올린 머리와 몸에 붙는 아오자이. 서방은 그를 '드래건 레이디'라 불렀다.
틱꽝득이 불탄 뒤, 그가 입을 열었다. 승려들의 분신을 "바비큐"라 불렀다. 불타는 것을 보고 손뼉을 쳤다고 했다. 분신하려는 승려가 더 있다면 성냥을 대주겠다고 했다. 그 말이 전 세계의 공분을 샀다.
9월, 그는 유럽과 미국 순방에 나섰다. 케네디 주변 인사들을 "핑크"라 불렀고, 미국 자유주의자가 공산주의자보다 나쁘다고 했다. 그 오만한 언사가 워싱턴의 인내심을 끊었다. 케네디는 쿠데타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 11월 2일, 장갑차 안
8월, 정권은 전국 사찰을 습격해 승려 수천 명을 잡아들였다. 미국의 인내심은 바닥났다. 묵인의 신호가 사이공의 장군들에게 전해졌다.
11월 1일, 즈엉반민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충성파는 허를 찔려 줄줄이 붙잡혔다. 반란군이 대통령궁에 들이닥쳤을 때, 형제는 이미 없었다. 지하 터널로 빠져나가 쩌런의 한 성당에 숨은 뒤였다. 가톨릭 형제가 마지막으로 몸을 숨긴 곳이 성당이었다. 그들은 직통선으로 반란군을 속이며 시간을 끌었다.
이튿날 아침, 형제는 항복했다. 안전한 망명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약속은 거짓이었다. 군 사령부로 돌아가는 장갑차 뒤칸에서, 두 사람은 손이 뒤로 묶인 채 근거리에서 총을 맞았다. 방아쇠를 당긴 자는 즈엉반민의 경호원 응우옌반늉. 부검은 처형식 총상을 드러냈다.
쿠데타 세력은 형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다음 날 흘러나온 사진이 거짓을 뒤집었다.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이 손이 묶인 채 장갑차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9년의 가족 정권이 그렇게 끝났다.
🕯️ 남은 자들
마담 뉴는 그때 미국에 있었다. 남편과 시아주버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 그가 말했다. 내 가족이 미국의 축복 아래 배신당해 죽었다면, 베트남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일 뿐이라고.
그는 고국에 돌아가지 못했다. 이탈리아로, 다시 프랑스로 망명해 반세기를 더 살았다. 1967년 맏딸이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스물둘에 죽었다. 그의 부모는 일찍이 사위의 정권에 등을 돌리고 불교 탄압에 항의해 대사직을 던졌다. 가족은 정치로 갈라졌다.
마담 뉴는 2011년 로마에서 여든여섯에 눈을 감았다.
틱꽝득이 성냥을 그은 지 다섯 달 만에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그의 예언도, 마담 뉴의 예언도 같은 곳을 가리켰다. 베트남의 이야기는 그제야 시작이었다. 지엠이 사라진 자리에 쿠데타가 잇따랐고, 미국은 점점 더 깊이 그 수렁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 노승이 불 속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그 아침이, 긴 전쟁의 문을 연 셈이었다.
🪷 타지 않은 심장
세월이 흘렀다. 한때 정권에 부담이던 그 불길은, 통일된 베트남에서 다른 이름으로 남았다.
화장한 그의 몸에서 심장만은 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사리라 불렀다. 심장은 사리사에 모셔졌다가 베트남국사로, 다시 은행으로 옮겨졌고, 1991년부터는 국가은행 금고에서 특별 보안 아래 보관됐다. 자비의 상징이자 베트남 불교의 성물이었다.
34년이 지난 2025년, 심장은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나왔다. 유엔 베삭 축제 기간, 사리를 친견하려는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어떤 날은 6만 명이 다녀갔다. 그해 12월, 심장은 영구한 안식처를 얻었다. 1963년의 비폭력 투쟁을 기리려 세운 63미터 높이 다바오탑에, 심장이 봉안됐다.
그의 이름 앞엔 이제 '보살'이 붙는다. 그가 몸을 태운 교차로는 기념 공간이 됐고, 매년 6월 11일이면 그곳과 사찰에서 소신공양 추모식이 열린다. 정치적 항거의 인물이 종교의 성인으로 남은 것이다.
불 속에서 미동도 없이 앉아 있던 노승은 갔다. 그러나 타지 않은 심장 하나가, 60년이 지나도록 그 아침을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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