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년의 간격
한국 현대사에서 6월 10일은 우연이라 부르기엔 너무 또렷한 날이다. 1926년 이날 식민지 조선의 학생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고, 꼭 61년 뒤인 1987년 이날 시민들이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쳤다. 한 번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으려는 함성이었고, 한 번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으려는 함성이었다. 날짜 하나가 두 시대의 저항을 꿰뚫었다.
🏴 1926, 상여 뒤의 만세
발단은 한 황제의 죽음이었다. 1926년 4월 2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이 승하했다. 사회주의 계열의 권오설과 김단야는 본래 5월 1일 메이데이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순종 승하 소식을 듣고, 이들은 방향을 틀었다. 장례일에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기로 했다.
준비는 치밀했다. 조선공산당과 천도교, 학생 단체가 연합전선을 이뤘다. 권오설을 중심으로 '6·10 투쟁특별위원회'가 꾸려졌고, 10만 장에 달하는 격문이 인쇄됐다. 격문에는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같은 구호가 담겼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 했다. 거사는 사전에 발각됐고, 권오설은 시위 며칠 전 체포됐다. 경성에만 7천여 명의 육·해군이 깔렸다.
그럼에도 6월 10일 아침, 함성은 터졌다. 순종의 인산일, 2만 4천여 명의 학생이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했다. 오전 8시 30분경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며 격문을 뿌렸다. 인산 행렬이 지나는 길마다 민중이 합세했다. 시위는 계획만큼 번지지 못했고 전국에서 천여 명이 붙잡혔지만, 침체됐던 민족운동에 다시 불씨를 댕겼다.
6·10 만세운동은 홀로 선 사건이 아니었다. 3·1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 사이를 잇는 다리였고, 1927년 신간회 결성의 발판이 됐다.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한 깃발 아래 손잡은 민족통일전선의 실험이기도 했다.
✊ 1987, 광장의 함성
61년 뒤, 같은 날짜에 또 하나의 항쟁이 시작됐다. 이번엔 식민 권력이 아니라 군사정권이 상대였다.
도화선은 여러 죽음과 거짓이었다. 1987년 1월 박종철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졌고, 당국은 이를 축소·은폐했다. 4월 13일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 요구를 거부하는 '호헌 조치'를 발표했다. 6월 9일엔 연세대생 이한열이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다. 분노가 임계점을 넘었다.
6월 10일, 항쟁이 본격화됐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 이 구호가 거리를 뒤덮었다. 시위는 6월 29일까지 전국으로 번졌다. 학생만이 아니라 넥타이를 맨 직장인까지 거리로 나섰다.
결국 정권이 물러섰다. 6월 29일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수습안을 발표했다. 그해 12월 새 헌법에 따른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6월 항쟁은 한국 민주화의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 다리를 놓은 날짜
두 사건은 시대도 적도 달랐다. 한쪽은 제국주의에, 한쪽은 독재에 맞섰다. 그러나 닮은 골격이 있었다. 둘 다 학생과 청년이 앞장섰고, 둘 다 한 사람의 죽음(순종, 박종철·이한열)이 기폭제가 됐으며, 둘 다 흩어져 있던 힘을 하나로 묶어낸 연대의 순간이었다.
1926년의 만세가 곧장 독립을 가져오지 못했듯, 그것이 헛된 것도 아니었다. 그 불씨가 다음 저항으로 이어졌다. 1987년의 함성도 마찬가지로, 앞선 4·19와 그 이전의 모든 외침 위에 서 있었다. 6월 10일은 그 계보를 한 줄에 꿰는 날짜로 남았다.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는 사람들이, 시대를 건너 같은 날 거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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