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30일 금요일

1월 15일 8,300만불 = 쌀 1,500만 가마

 

    연면적은 여의도 공원의 2.5배인 18만 평,

건물 내 복도 길이만 28km,

그러나 건물 내 어디에서 어디를 가든 걸어서 7분 내 도착할 수 있도록 설계,

모래와 자갈 68만 톤의 콘크리트, 284개의 화장실, 건축 기간 고작 16개월.


    1943년 1월 15일 오늘, 미국의 심장 펜타곤이 완공됐다.

건축비용만 8,300만 달러로 당시 일제강점기의 조선 민족이 한 해 동안 먹을 식량의 거금이었다.

그러나 오늘 조선 민족은 펜타곤 1.5채를 지을 수 있는 분량의 식량을 공출당했다.



1월 14일 오페라 "토스카"의 평행이동

 

    한 화가는 탈옥한 정치범 친구를 자신의 별장에 숨겨주었다.

로마 경찰청장은 그 화가를 체포했다.

그는 정치범의 소재를 물으며 그 화가를 고문실로 끌고 가 머리에 쇠테를 씌우고 조였다.

그 화가는 끝내 숨졌다.


    1900년 1월 14일 오늘, 로마 코스탄치 극장에서 푸치니의 오페라 <토스카>가 초연됐다.


    한 서울대생은 수배 중인 선배를 자신의 하숙집에 숨겨주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은 그 학생을 체포했다.

그들은 선배의 소재를 물으며 그 학생을 욕조 앞으로 끌고 가 물속에 머리를 집어넣었다.

그 학생은 끝내 숨졌다.


    1987년 1월 14일 오늘, 박종철은 그곳 남영동에서 사망했다. 곧 화장됐다.


    그후 역사는 7월 28일로 이어진다.



1월 13일 나는 고발한다

 

    "대통령 각하,

진실이 땅속에 묻히면 그것은 조금씩 자라나 엄청난 폭발력을 축적하며,

마침내 그것이 터지는 날 세상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릴 것입니다."

    "나는 고발합니다.

빌로 장군이 드레퓌스의 무죄를 입증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손에 쥐고도 이를 은폐했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고발합니다.

공니에 장군과 부아데프르 장군이 종교적인 편견과 군부의 배타적인 결속을 위해 불의를 방조했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고발합니다.

전쟁부가 여론을 오도하고 대중의 눈을 가리기 위해 신문을 이용해 추악한 캠페인을 벌였음을 고발합니다.

    나는 고발합니다.

첫 번째 군사법원이 비밀리에 제출된 서류를 근거로 피고인을 유죄 판결함으로써 법을 유린했음을 고발합니다."

"내가 행하는 이 일은 진실과 정의의 분출을 앞당기기 위한 혁명적인 수단일 뿐입니다.

나에게는 오직 하나의 열망, 즉 빛의 이름으로 고통받아온 인류의 이름으로 진실을 밝히려는 열망밖에 없습니다.

나의 이 불타는 항의는 내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

나를 법정으로 소환하십시오.

공개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를

    나는 기다리겠습니다."


1898년 1월 13일, 에밀 졸라 Émile Zola, "J'accuse…!"


출처 : 에밀 졸라, 대통령 펠릭스 포르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나는 고발한다! "J'accuse…!"」(1898)



1월 12일 야생의 삶! 글로 태어나다

 

    과거 캘리포니아 남부 사람들은 북부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북부의 차가운 바다에서 나는 신선한 굴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해안의 굴 양식장에서 굴을 훔쳐 파는 한 소년은 재혼한 엄마 부부와 살았다.

부부싸움이 잦은 부모를 피해 간 곳은 도서관이었다.

그 외에 통조림 공장, 아이스크림 가게, 볼링장 등에서도 일했다. 정치집단에서 행패를 부리는 일도 했고 무임승차하는 부랑자로도 생활했다.

수 많은 인간군상을 만났으며 그런 거친 현장에서 삶을 배웠다.

황금이 매장되어 있다는 알래스카까지 갔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 뿐이었다.

그러한 그의 거친 여정을 그는 자전적 소설로 남겼다.

그러한 그의 작품은 그를 미국 역사상 최초의 작가로의 백만장자로 만들어 주었다.


    1876년 1월 12일 오늘, 거친 생의 기록자 '잭 런던Jack London'이 태어났다.

그는 그후 종군 기자로 활약했고 직접 범선을 만들어 태평양을 횡단했다.

그는 그의 인생처럼 살아 온 '야성의 부름'의 고전을 남겼다.

그리곤 4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어쩌면 자살이 맞을 수도 있다.

"책을 읽을 줄 아는 노동자라면 모두 잭 런던의 책을 읽었다." 그에 대한 부고였다.


출처 : 야생의 부름 잭 런던 저



1월 11일 세계 최초의 복권 추첨

     1560년대 영국의 통치자 엘리자베스 1세의 고민은 막대한 국방 자금이었다.

세금을 더 이상 올릴 수도 없었다.

여왕은 꾀를 냈다.

복권의 발행이었다.

1장 10실링, 당청금은 5,000파운드였다.

노동자의 한 달 치 급여로 500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당첨금이었다.


    1569년 1월 11일 오늘, 런던의 세이 폴 대성당 문앞에서 세계최초의 국가 발행 복권 추첨식이 있었다.

당첨자는 나오지 않았다.

발행한 복권은 40만장이었지만 판매된 복권은 3만장이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모든 수익금은 여왕이 가져갔다.



1월 10일 나폴레옹의 이혼

 

    "나의 사촌들, 대신들, 그리고 귀족들이여.

지난 15년 동안 나의 삶을 아름답게 해주었던 사랑하는 아내와 헤어지기로 한 나의 결정은 오직 프랑스의 안녕을 위한 것이다.

우리 사이에 후계자를 얻을 희망이 사라졌기에, 나는 개인적인 감정을 희생하고 국가의 이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황후의 지위와 명예를 영원히 유지할 것이며, 무엇보다 그녀는 나의 가장 친밀한 친구로 남을 것이다.

나는 그녀가 나를 위해 치른 이 희생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1810년 1월 10일 나폴레옹 Napoléon.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자 황제이신 분의 허락을 얻어 선언합니다.

프랑스의 안녕과 정책을 위해, 그리고 제국의 앞날을 위해 후계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저는 깊이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이제 제 생애 가장 커다란 희생을 기꺼이 바치고자 합니다.

저는 이제 황후의 자리에서 물러납니다.

하지만 제가 황제의 곁에서 보낸 지난 세월의 명예와 사랑은 영원히 제 가슴속에 남을 것입니다.

저의 남편이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그분께 저의 모든 충성과 사랑을 남겨둔 채 저는 떠납니다."

1810년 1월 10일 조세핀 드 보아르네(Joséphine de Beauharnais)


    황후의 싸인은 심하게 흔들렸으며 2014년 경매에서 43만 5천유로(6억원 이상)에 낙찰됐다.

나폴레옹의 사인이 든 이혼 서류는 프랑스 당국이 보관중이다.



1월 9일 그래도 보고싶다 내 아들

 

    1940년생인 배은심은 그저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그녀는 광주에 살았다. 1980년에도 아이들은 무사히 커 주었다. 자랑스런 아들은 서울로 유학갔다.

1987년 6월 9일 그 아들이 최루탄에 맞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허겁지겁 중환자실로 달려갔다. 혼수상태, 그리고 27일간을 그곳에서 밤을 지새웠다.

최루탄에 맞아 피흘리는 아들의 사진이 전 세계 신문에 게재됐다.

국민들은 분노했고 군부독재정권 타도를 위한 민주화 열기는 들불이 됐다.

결국 전두환, 노태우는 손을 들고 직선제를 선언했다.

아들은 그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리고 7월 5일 어머니 배은심의 아들은 열사가 되어 숨을 거뒀다.

배은심은 아들의 뒤를 이어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녀는 초등학교만 나왔다. 그러나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더욱 단단하고 현실적이었다.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명예회복"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아들을 죽인 책임을 묻기로 했다. 서대문 경찰서장, 중대장, 소대장, 그리고 최루탄을 쏜 전투경찰 1인을 살인죄로 재판에 넘겼다. 법원은 기각했다.

국가를 상대로한 민사소송도 이어졌다. 1억원의 배상 판결을 받았다. "아들의 핏값"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돈을 받지 않으면 국가에 귀속된다는 규정에 따라 수령했다. 한 푼도 건드리지 않았다.

작은 집을 샀다. 그리고 "이한열 기념관" 현판을 달았다. 훈장도 달갑지 않았다.

그저 국가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명예를 되찾고 싶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희생자들의 유가족을 함께 위로했다.

“맘 단단히 먹소. 앞으로 더 기막힌 일이 많을 것이네.”

[출처] “보고 싶다 내 아들, 이한열.” ‘이한열 어머니’ 배은심 친필 메모|작성자 여성동아


    두 번 쓰러졌다. 2022년 1월 9일 오늘 새벽 또 쓰러졌다.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꾹꾹 눌러 쓴 작은 메모 하나 남겼다.

"그래도 그립다

보고 싶다.

내아들, 이한열,"



1월 8일 그래도 지구는 돈다

 

    파도바 대학의 한 교수는 턱없이 부족한 교수 월급을 보충하기 위해 과학 기구를 파는 작은 가게를 운영했다.

그는 망원경에 대한 얘기를 듣고 그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원통을 준비하고 그 양끝에 두 개의 유리 렌즈를 부착했다. 하나는 볼록이고 다른 하나는 오목했다.

그것으로 본 물체는 9배나 커보였다. 다시 60배의 성능으로, 또 1,000배로 확대해 볼 수 있는 뛰어난 성능의 망원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이 지상의 물체를 관찰할 때, 그는 천체를 관찰했다.

달을 관찰했다. 일반 대중은 당시 완전한 구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랬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망원경을 통해 달에도 지구처럼 산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1610년 1월 7일 어제, 더 개량된 망원경으로 목성 주위를 도는 4개의 위성을 발견했다.


    1642년 1월 8일 오늘, 플로렌스 근교 아르체트리의 격리된 집에서 감금생활을 하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사망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나직히 읊조렸다. 듣는 이는 없었다. 오늘은 상식이 됐다.


출처 : 지식의 원전 존 캐리 저, 바다 출판사



1월 7일 백만번의 키스를 보내며



    "사랑하는 누나에게,"

지금 밀라노에서는 오페라 공연이 한창이야.

그런데 누나, 공연하는 여가수가 얼마나 우스운지 몰라.

목소리는 너무 높아서 꼭 찔리는 소리 같고, 연기는 어찌나 어색한지!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보며 혀를 차시지만, 나는 웃음이 나와서 혼났어.

누나, 누나의 이탈리아어 공부는 잘 되어가고 있니?

나중에 내가 돌아가면 꼭 이탈리아어로 대화해 보자.

이곳 사람들은 말끝마다 손을 흔드는데 참 재미있어.

우리가 내일 어디로 떠날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하지만 어디에 있든 나는 누나를 생각할 거야.

누나의 손에 백만 번의 키스를 보내며.


    누나의 영원한 동생

- 볼프강 Wolfgang으로부터


    1770년 1월 7일



1월 6일 송아지의 아버지 탄생

 

    6.25 전쟁, 아내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군복무를 위해 남하한 남편을 찾아 피난길에 올랐다.

가산이랄 것도 없었다.

그저 아내의 재봉틀이 전부였다.

피난 도중 어린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 재봉틀을 팔아 쌀을 장만했다.

어린 장남이 그 쌀자루를 맡았다.

그 와중에 아내와 아들이 헤어졌다. 아들은 쌀자루를 어느 청년이 들어 준다는 말에 내어 주었다.

청년의 발걸음은 빨랐다. 따라갈 수가 없었다.

따라가자니 뒤 따라 오는 어머니와 동생들를 잃을 것 같고, 그냥 있자니 쌀을 놓칠 것 같았다. 아들은 어머니를 선택했다.

허겁지겁 뛰어온 아내는 울고 있는 아들과 그의 빈손을 보았다.

"내 아들이 똑똑해서 에미를 잃지 않았네."하며 아들의 머리를 껴안았다.

아내와 아들은 아버지를 대구에서 극적으로 상봉했다.


    1915년 1월 6일 오늘, 그 아내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인 시인 '박목월'이 탄생했다.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상봉 이후의 역사는 3월 24일의 역사에서



1월 5일 12,000프랑의 통조림

 

    나폴레옹에게 있어 군인이 상한 음식을 먹고 죽어 나가는 것은 전쟁 승패의 가장 큰 관건이라 여겼다.

냉장고가 나오려면 40년은 더 기다려야 했다. 나폴레옹은 거액의 공모전을 기획했다.

병사들을 위한 안전한 음식의 저장방법에 대하여.

프랑스 요리사 '니콜라 아페르 Nicolas Appet'가 이 문제에 정답을 제시했다.

유리병에 음식을 넣어 가열한 후 밀봉하는 방식이었다.

이 방식은 경이의 대상이었다,

재료를 수확했을 때와 똑같은 상태로 보존해 준다고 감탄했다.


    1810년 1월 5일 오늘, '통조림의 아버지' 니콜라 아페르'가 나폴레옹의 공모전 상금 12,000프랑을 획득했다.

현재가치로 2억이 조금 안되는 금액이었다.


출처 : 음식과 요리 헤럴드 맥기



1월 4일 점자의 탄생



    프랑스, 한 소년이 아버지의 공방에서 송곳에 눈이 찔렸다. 감염은 양쪽 눈의 시력을 모두 앗아갔다.

세 살 때였다.

소년은 지적능력이 뛰어났다. 교과서를 볼 수 없어 완전히 외워 버렸다.

소년은 군대의 야간 문자에서 힌트를 얻어 바늘로 종이를 찍어 자신만의 암호를 만들었다.

식재료통과 양념통에 새긴 표시를 손가락으로 읽어 설탕과 소금통을 정확히 구별했다.

1809년 1월 4일 오늘, 이렇게 점자를 창시한 '루이 브라이유 Louis Braille'가 태어났다.


    '브라이유 Braille'는 '점자'를 뜻하는 일반 명사가 됐다.



1월 3일 파문과 혼인



    중세, 가톨릭교회법은 사순절(Lent)기간에 육식은 물론 우유, 버터, 치즈등의 유제품 섭취도 금지했다.

올리브 오일이 풍부한 남유럽과 달리, 올리브가 자라지 않는 독일에선 버터가 필수적인 지방 섭취원이었다.

독일 사람들이 버터를 먹기 위해선 로마 교황청에 돈을 지불하고 '버터 섭취 허가증 Butterbrief'를 사야 했다.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는 이 시스템을 강력히 비난했다.

"우리 땅에서 나는 좋은 버터를 먹기 위해 왜 로마에 돈을 내야 하는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돈벌이 수단으로 삼지 마라."

그의 논리는 독일 민중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1521년 1월 3일 오늘, 가톨릭교회의 성직자이자, 교수, 수도원 지구장인 마르틴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최종 파문 당했다.

그로부터 4년 후, 그는 그가 수녀원에서 탈출시킨 수녀와 결혼했다.



1월 2일 알함브라 Alhambra' 궁전의 추억



    스페인 남부 그라나다의 사비카 언덕의 흙은 붉은 빛을 띤다.

그 위에 '알 함라 Al-Hamra (붉은 것)'란 뜻의 궁전이 지어졌다.

'알함브라 Alhambra' 궁전이다. 이슬람의 황금기였다.

그러나 궁전의 주인이 되기 위한 이슬람 왕조의 내전으로 국력은 분산, 약화됐다.

기독교 세력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사작전으로 도시와 궁전 주변의 농경지를 파괴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시민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고통받았다. 궁전의 마지막 왕인 '보압딜'은 시민들의 안전과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협약을 체결했다.


    1492년 1월 2일 오늘, 보압딜은 알함브라 궁전의 열쇠를 기독교 왕에게 넘겨주며 항복했다.

그는 700년간 이어왔던 왕국과 아름다운 궁전을 뒤돌아보며 '한탄의 언덕'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쏘아 붙였다.

"사내답게 지키지 못한 궁전을 위해 여자처럼 울지마라."

물론 항복의 조건인 시민의 안전은 지켜지지 않았다.



1월 1일의 의지

 

매년 1월 1일은 자신과의 약속의 날이였다. 의지의 날이였다.

누군가는 금연을,

누군가는 금주를,

누군가는 다이어트를,

누군가는 근육 만들기를,

누군가는 재테크를,

누군가는 책읽기를, ....

누군가는 또 다른 의지를 스스로 다짐했다.

비록 끝까지는 가지 못할지라도,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자신의 의지를 지키려 노력했다.

오늘이 그 날이다.

그리고 그 작은 의지는 스스로에겐 역사이기도 하다.

모두의 1월 1일 오늘, 그날 그날 알려진 혹은 알려지지 않은 역사를 기억하며 알아가는 하루가 되고, 또 자신의 역사를 엮어 갈 수 있는 역사의 다이어리를 편찬한다.

자신만의 역사는 또 다른 거대한 역사가 된다.

- 서문을 대신하여 1월 1일의 의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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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st Updated: January 30,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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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7일 첫번째 맥주

  '캐리 네이션 Carry Nation'은 남편의 알코올 중독으로 결혼 내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녀는 어느 날, "술집을 부수어 나라(Nation)를 이끄라(Carry)"는 운명적인 신의 계시를 듣고, 서슬 퍼런 도끼를 든 채 전국의 술집을 습격했다. 분노한 술집 주인들이 입구마다 "모든 나라(Nations) 사람은 환영하지만, 캐리(Carrie)만은 절대 사절한다"는 문구를 써 붙일 정도로 그녀의 투쟁은 강렬하고도 집요했다.

이러한 개인의 분노가 국가적 법령으로 이어진 데에는 시대적 비극도 한몫을 했다. 1914년 발발한 세계대전은 미국의 금주 여론에 불을 지피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 미국의 맥주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이들은 대부분 독일 출신이었고, 이들이 조국 독일과 밀접한 연계를 맺고 있다는 의구심은 곧 독일 맥주에 대한 국민적 반감으로 이어졌다. 정치권은 이러한 반독 정서를 기회 삼아 금주법을 준비했고, 마침내 1920년 1월, 알코올 함량 0.5% 이상의 술에 대해 생산과 판매를 전면 금지하는 금주법이 미국 전역에 선포됐다.

그러나 오히려 금주법은 갱단에겐 호재였다. 시카고의 냉혹한 마피아 보스 '딘 오배니언'은 평소 정갈하게 꽃을 다듬는 꽃집 주인으로 위장하며 이중생활을 즐겼다. 그는 상대 마피아 조직에게 불법 양조장을 팔아 넘겼다. 그러나 그는 연방 수사국이 곧 그 양조장을 급습할거라는 정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살해됐다. 그후 갱단들의 피의 복수가 이어졌다.

길었던 어둠의 시대를 끝낸 것은 역설적이게도 경제적 절망이었다. 대공황의 늪에 빠진 미국은 새로운 일자리가 절실했고, 정치인들은 양조장의 합법화가 수많은 고용을 창출할 돌파구가 될 것이라 판단했다. 새로 취임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술의 합법적 재생산과 판매를 전격 제안했다.

1933년 4월 7일 오늘 자정이 지나자마자, 합법적으로 생산된 첫 번째 맥주를 가득 실은 버드와이저사의 마차가 백악관으로 달려갔다. 이로서 금주법은 완전히 그 효력을 상실했다.

출처 ; 맥주의 역사 조너던 헤네시, 마이클 스미스

4월 7일 한 조선인의 일본군, 소련군, 독일군, 미군 포로의 삶

  조선인으로 태어나 18세의 나이에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됐다. 일본 관동군으로 소련군과의 전투에 투입됐다.

일본은 참패했다.

소련군의 포로가 됐다.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렸고, 소련과 독일군의 전투에 소련 군복을 입고 투입됐다.

소련군이 패했다.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독일은 '동방군단'을 만들었고 독일 군복을 입혀 프랑스 노르망디의 해변을 지키게 했다.

독일은 패망했다.

미군의 포로가 됐다.

영어는 못했고 독일어도 못했다. 러시아어도 못했고 일본어 조금과 한국어로 대답했다.

미군은 알아듣지 못했다. 영국의 수용소로 보내졌다.

1992년 4월 7일 오늘, 이 무명에 가까운 한국인이 미국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족들은 그가 그저 평범한 아버지인 줄로만 알았다.

미군이 알아듣지 못한 그 말은,

"이제 제발, 전쟁이 끝난 건가요?"였다.

출처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저

1월 15일 8,300만불 = 쌀 1,500만 가마

      연면적은 여의도 공원의 2.5배인 18만 평, 건물 내 복도 길이만 28km, 그러나 건물 내 어디에서 어디를 가든 걸어서 7분 내 도착할 수 있도록 설계, 모래와 자갈 68만 톤의 콘크리트, 284개의 화장실, 건축 기간 고작 16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