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About)

"안녕하세요" History Diary 365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역사 속 숨겨진 이야기를 매일 기록하는 공간입니다. 🏛️ 매일 하나의 주제를 선정하여, 그날의 강렬했던 기억과 교과서 밖 생생한 역사적 순간들을 조명합니다. ⏳ 모든 글은 직접 탐구한 문헌과 서적 등 객관적인 사실(Fact)을 바탕으로 작성되며 📜, 과거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는 깊이 있는 시선을 지향합니다. 문의나 제안, 혹은 궁금한 역사가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 📧 Email: historydesign00@gmail.com

2026년 2월 19일 목요일

🤺🩸 2월 20일, 명예를 건 피의 방아쇠: 미국 초기 정치인들의 치명적인 결투사


1. 1800년 대선과 73표 동점 사태: 킹메이커 해밀턴의 선택

1800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는 애덤스와 찰스 핑크니의 연방파, 그리고 제퍼슨과 에런 버의 공화파 측의 격렬한 논쟁 속에서 치러졌다. 연방파는 제퍼슨과 그 추종자가 권력을 장악하면 프랑스 혁명처럼 공포 정치가 실현될 것이라고 흑색선전을 일삼았다. 또한 공화파는 애덤스를 왕정 복귀 음모를 가진 자로, 시민의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선거전은 팽팽했고, 결전은 뉴욕에서 벌어졌다. 공화파의 에런 버는 독립전쟁 참전 군인 조직까지 끌어들였고, 결국 공화파가 뉴욕주를 석권했다. 당시 선거인단은 두 사람에게 표를 던질 수 있었다. 한 표는 자기 정당의 대통령 후보에게, 또 다른 한 표는 부통령 후보를 위해 사용했다. 그러나 공화파의 두 후보 제퍼슨과 에런 버에게 똑같이 73표가 돌아가면서 선거 결과는 결국 연방 의회의 결정 사항이 돼버렸다.

연방 의회를 장악한 연방파의 핵심 전략가인 알렉산더 해밀턴은 '버라는 인물은 신뢰성, 원칙, 도덕도 없고 오직 권력욕만 있는 위험한 괴물이라 대통령직을 맡길 수 없다'라는 결단을 내리고 연방 의원들을 설득했다. 결국 36번의 치열한 재투표 결과, 미국 제3대 대통령에 제퍼슨이, 부통령에 버가 당선됐다. 이 일로 에런 버에게는 해밀턴에 대한 끔찍한 증오심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2. 건국의 아버지를 향한 총구: 해밀턴 대 에런 버의 비극

공화파의 제퍼슨은 재선에도 성공했다. 반면 위기에 몰린 연방파는 연방에서 탈퇴해 '북부 연합'을 결성할 계획을 세웠다. 그것이 성공하려면 뉴잉글랜드, 뉴저지와 함께 꼭 뉴욕주를 가져와야만 했다. 연방파의 연방 탈퇴 지지자들은 에런 버에게 접근하여 뉴욕 주지사 출마를 권했고, 버는 이를 수락했다.

이때 또다시 해밀턴은 버를 '경멸스러운 인간'이라고 비난했고, 이는 신문 1면에까지 기사화됐다. 버는 결국 주지사 선거에서 패배했다. 극도의 증오심으로 가득 찬 버는 해밀턴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해밀턴은 결투 신청을 거부하면 비겁자로 낙인찍힐 것이 두려워 이를 수락했다.

둘은 뉴욕을 벗어난 뉴저지의 위호켄에서 서로에게 총을 쐈다. 총상을 입은 해밀턴은 다음 날 사망했다. 비극적이게도 그 장소는 3년 전 해밀턴의 장남이 결투를 벌이다 총에 맞아 사망한 바로 그 장소였다.

3. 미래의 대통령이 쏜 복수의 총알: 앤드루 잭슨 대 찰스 디킨슨

또한, 훗날 미국의 제7대 대통령이 될 앤드루 잭슨은 사소한 경마 내기 시비로 젊은 변호사 찰스 디킨슨과 격렬한 말다툼을 벌였다. 디킨슨은 앤드루 잭슨의 아내 레이첼(Rachel)을 '중혼자(두 남편을 둔 여자)'라고 공개적으로 모욕했다. 레이첼은 전 남편과의 이혼 서류가 완전히 정리된 걸로 알고 잭슨과 결혼을 했던 것이었다. 분노가 치민 잭슨은 즉각 디킨슨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디킨슨은 주에서도 알아주는 명사수였기에 잭슨의 패배가 확실해 보였다. 예상대로 잭슨이 먼저 총에 맞았지만, 그는 쓰러지지 않고 버티어 서서 디킨슨에게 총을 발사했다. 디킨슨은 복부를 관통당해 몇 시간 후 사망했다. 잭슨은 이때 박힌 총알을 평생 몸에 지닌 채 훗날 대통령에 당선됐다.

4. 멈추지 않는 피의 역사: 해군 제독과 상원 의원의 결투

이외에도 미영전쟁과 바르바리 전쟁의 영웅인 스티븐 디케이터 제독이 복귀 문제로 얽힌 결투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으며, 훗날 30년간이나 상원 의원으로 재직한 토머스 하트 벤턴 역시 상대 변호사와 두 번의 결투 끝에 상대를 죽이는 등 피의 역사가 반복됐다.

5. 편지 배달이 부른 참극과 1839년 결투 금지법의 탄생

이러한 결투의 악습이 빚어낸 마지막 비극은 1838년 초 하원 의원들 사이에서 벌어졌다. 하원의원 조나단 실리는 유력 언론사의 편집장이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그를 강력히 비판했다. 당사자인 제임스 왓슨 웹은 자신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친구인 하원 의원 윌리엄 J. 그레이브스에게 결투 신청서 전달을 부탁했다.

부탁을 받은 그레이브스는 실리 의원에게 결투 신청서를 내밀었지만, 실리는 이를 거부하며 웹이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다시 한번 비난했다. 그러자 역설적이게도 그레이브스가 '자신의 친구를 모독하고 자신의 체면을 구겼다'는 이유로 실리에게 직접 결투를 신청했다. "모욕을 당하고 피하면 겁쟁이"라는 당시 정치권의 압박 때문에 실리도 결국 이 황당한 결투를 수락하고 말았다.

앞선 두 번의 총격이 서로 빗나가자 주위에서 결투를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레이브스는 세 번째 총을 쏘아 실리의 대퇴동맥을 정확히 맞혔다. 아내와 세 아이를 둔 35세의 실리 의원은 그 자리에서 숨졌다.

워싱턴 정가와 미국 전역은 발칵 뒤집혔다. "국민의 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 그것도 당사자도 아닌 편지 배달 문제로 사람을 쏴 죽이는 게 말이 되는가!"

이 어처구니없고 비극적인 죽음이 마침내 의회를 움직였다. 1839년 2월 20일, 미국 의회는 워싱턴 D.C. 내에서의 결투를 전면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야만적인 짓거리가 명예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던 피의 역사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참고 문헌: 『있는 그대로의 미국사』 (앨런 브링클리 저)

댓글 없음:

댓글 쓰기

🔥 3월 25일, 1,600km의 거리, 1분의 암흑: 방글라데시의 눈물과 '서치라이트 작전'

부자연스러운 탄생 (1947년) 1947년 영국령 인도가 독립할 때, 힌두교 중심의 인도와 이슬람교 중심의 파키스탄으로 분리됐다. 이때 '이슬람교'라는 공통점 하나만으로 약 1,600km나 떨어진 두 지역이 하나의 나라가 됐다. 바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