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3년 2월 18일 오전 11시, 매서운 겨울바람이 부는 뮌헨 대학교의 웅장한 본관 건물 앞. 한스 숄 Hans Scholl과 소피 숄 Sophie Scholl 남매가 무거운 여행 가방을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의 가방 속에 든 것은 전공 서적이 아니라, 발각되는 즉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반역의 증거'인 백장미단의 전단지 수천 장이었다.
오늘이 벌써 6번째였다. 4번째 전단에는 "우리는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의 깨어난 양심이다. 백장미단은 당신들을 결코 편안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라는 선언이 명시되었다. 이 6번째 전단에는 스탈린그라드에서 희생된 병사들의 몰락과 히틀러에 대한 조롱과 비난의 내용이 들어 있었다. 제작된 전단은 뮌헨, 프랑크푸르트, 빈 등지로 우편 발송되거나 직접 배포됐다.
'백장미단(Weiße Rose)'은 한스와 소피 남매를 주축으로 뮌헨 대학교 학생들(알렉산더 슈모렐,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빌리 그라프등)과 철학 교수 쿠르트 후버가 함께 결성한 비밀 반나치 저항 조직이었다. 펜과 낡은 등사기를 무기 삼은 이 젊은 지식인들은, 히틀러 독재 정권이 자행하는 잔혹한 학살과 무의미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며 폭력에 마취된 독일인들의 양심을 깨우기 위해 목숨을 건 비폭력 투쟁을 이어오고 있었다.
대학 본관은 강의가 한창이었기에 텅 빈 복도에는 섬뜩할 정도의 정적만이 감돌았다. 남매의 구두 발소리만이 높은 천장을 울렸다. 심장 박동 소리마저 들릴 듯한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 두 사람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굳게 닫힌 강의실 문 앞마다, 복도의 굽이진 모퉁이마다 나치의 광기를 고발하는 전단지 무더기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가방이 서서히 비워질 무렵, 두 사람은 웅장한 중앙 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가장 꼭대기 층(3층) 난간에 도달했다.
곧 수업이 끝나고 수많은 학생이 복도로 쏟아져 나올 시간이 임박했다. 소피 숄은 가방 밑바닥에 남아 있던 마지막 전단지 뭉치를 움켜쥐고 즉시 3층 난간 너머, 중앙 홀의 허공을 향해 힘껏 밀어 던졌다.
하얀 전단지들이 마치 '백장미'처럼 천천히 허공을 가르며 1층 바닥을 향해 눈부시게 흩날렸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1층에 있던 나치 당원이자 대학 관리인 야코프 슈미트가 보고 있었다. 난간에 서 있던 숄 남매를 발견한 그의 날카로운 고함이 본관 건물에 울렸다.
"거기 멈춰라! 저들을 체포하라!"
슈미트는 미친 듯이 달려가 대학 본관의 육중한 철문들을 모조리 걸어 잠갔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강의실 문이 열리고 쏟아져 나온 수백 명의 학생들은 바닥에 뒤덮인 하얀 전단지와 굳게 닫힌 정문, 그리고 계단 위를 포위당한 숄 남매를 숨죽인 채 지켜볼 뿐이었다.
곧이어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검은 가죽 코트를 입은 게슈타포(비밀국가경찰)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권총을 든 그들이 남매를 에워쌌다.
"체포한다! 반역자 놈들!"
하지만 남매는 두려움에 떨거나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이 수천 명의 양심을 깨울 것임을 알았기에, 오직 서로를 한 번 쳐다본 뒤 꼿꼿한 자세로 게슈타포의 곁을 따라 걸어 나갔다.
지옥 같은 72시간의 심문 (2월 18일 ~ 2월 21일)
체포 직후 한스와 소피 숄 남매는 비텔스바흐 궁전에 있던 게슈타포 본부로 압송되었다.
소피는 범행을 부인했으나, 오빠 한스가 증거 앞에 자백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지려 했다. 그녀를 심문했던 게슈타포 수사관 로베르트 모어는 훗날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침착했고, 나치즘의 부당함을 당당히 논박하여 나조차 흔들리게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오빠 한스 역시 동생을 보호하려 애썼고, 다른 동료들의 이름을 발설하지 않기 위해 버텼다. 하지만 가방 안에서 발견된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의 7번째 전단을 위한 초안 때문에 친구인 프롭스트까지 체포되고 말았다.
'인민 재판소'의 연극 (2월 22일 오전)
히틀러는 이 사건을 본보기로 삼기 위해 악명 높은 '피의 판사' 롤란트 프라이슬러를 베를린에서 뮌헨으로 급파했다.
프라이슬러 판사는 재판 내내 고함을 지르며 피고인들을 모욕했다. 변호인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했을 뿐, 피고인들을 변호하지 않았다.
재판 중 소피 숄은 판사를 똑바로 응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들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있겠지요. 다만 그것을 말할 용기가 없을 뿐입니다."
악마와 같았던 판사마저 당황케 했다.
오전 10시에 시작된 재판은 단 3시간 만인 오후 1시에 끝났다. 판결은 '반역죄'로 인한 단두대 사형이었다.
마지막 면회와 집행 (2월 22일 오후 5시경)
독일 법에 따르면 사형 선고 후 집행까지 90일의 유예 기간이 있어야 했으나, 나치는 이를 무시하고 선고 당일 오후 5시에 집행을 명령했다.
처형 직전, 부모님과의 짧은 면회가 허용되었다. 어머니는 "소피, 다시는 널 볼 수 없겠구나"라며 울먹였다. 소피는 "어머니, 고작 몇 년 더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라며 오히려 어머니를 위로했다.
한스는 감옥 창살 너머로 친구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으며 "너희들은 역사의 이름을 남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남매는 나치 정권초에 각각 '히틀러 유겐트'와 '독일 소녀단'에 가입해 활동했었다. 아버지는 자녀들과 격렬하게 논쟁하며 나치 체제의 폭력성과 기만성을 경고했었다. 아버지는 히틀러를 피리 소리로 아이들을 유혹해 죽음으로 몰고 가는 '하멜론의 쥐 몰이꾼'에 비유했었다.
합숙생활에서 나치의 억압과 증오, 거짓 그리고 예술과 문학을 금지하는 획일적 교육에 환멸을 느끼고 아버지의 말이 옳았음을 알았다. '자유를 옭아 매는 독재 권력의 족쇄'가 나치의 실상임을 알리고 저항하는 방법을 알리고저 목숨을 걸었던 것이었다.
단두대 앞에서의 최후 (오후 5시 직후)
뮌헨의 슈타델하임 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소피 숄은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단두대로 향했다. 그녀는 당당하게 걸어갔다. 간수들은 그녀의 용기에 압도되어 이례적으로 처형 전 담배 한 대를 피울 수 있게 배려해주기도 했다.
한스 숄이 마지막으로 단두대에 올랐다.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 그는 소리쳤다.
"자유여 영원하라! (Es lebe die Freiheit!)"
그의 나이 24세였으며 여동생 소피는 21세였다.
그 이후
숄 가족의 연좌제(Sippenhaft) 체포
게슈타포는 나치의 연좌제 규정을 적용하여 남은 가족들을 전원 체포했다. 아버지 로베르트, 어머니 막달레나, 그리고 남은 형제자매들은 재판 없이 구금되어 강도 높은 심문을 받았다.
한스와 소피의 남동생 베르너 숄 (Werner Scholl, 1922~1944 추정)은 1943년 2월 22일 형과 누나의 인민재판 당일, 뮌헨의 법정에 몰래 진입하여 재판 과정을 지켜보았고 처형 직전 교도소에서 마지막 면회를 했다. 연좌제로 구금되었다가 풀려난 후, 독일군 의무병으로 징집되어 동부 전선(소련)으로 파병되었다. 이듬해인 1944년 6월, 전투 중 실종되어 전사 처리되었으며 끝내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다.
숄 남매의 맏언니 잉게 숄 (Inge Scholl, 1917~1998)은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약 5개월간 수감 생활을 했다. 전후인 1952년, 동생들의 투쟁과 재판 기록을 모아 책 『백장미(Die Weiße Rose)』를 출간하여 백장미단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렸다. 평생을 평화주의 및 반핵 운동에 헌신하다 1998년에 암으로 타계했다.
숄 남매의 둘째 언니 엘리자베트 숄 (Elisabeth Scholl, 1920~2020) 전후인 1945년, 동생 소피 숄의 연인이었던 프리츠 하르트나겔(Fritz Hartnagel)과 결혼했다. 하르트나겔은 본래 전선에서 싸우던 독일군 장교였으나, 소피와의 지속적인 서신 교환을 통해 나치 체제의 부당함을 깨닫고 반전주의자로 돌아선 인물이다. 엘리자베트는 남편과 함께 숄 남매의 편지와 기록을 보존했으며, 강연과 인터뷰를 통해 동생들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증언하는 데 주력했다. 2020년 2월,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부모의 삶 (로베르트와 막달레나)
아버지 로베르트 숄 (1891~1973)은 연좌제 구금 이후, 해외 라디오 방송 청취 혐의가 추가되어 18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종전 후 미군정에 의해 울름시 초대 시장으로 임명되어 파괴된 도시의 전후 복구를 이끌었다.
어머니 막달레나 숄 (1881~1958)은 나치 정권하에서 두 자녀(한스, 소피)를 처형으로 잃고, 아들(베르너)마저 전장에서 실종되는 비극을 겪었다. 남편의 투옥 기간 동안 가족을 부양했으며, 전후 전범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1958년 사망했다.
백장미 단원의 최후
나치의 협조자들의 최후
1945년 2월 3일, 베를린 법정에서 재판을 진행하던 중 미 공군의 대규모 폭격이 시작됐다. 공습경보가 울리자 다음 선고 서류를 챙기느냐 미처 방공호로 피신하지 못한 바로 그 순간, 법원 건물에 폭탄이 명중했고, 무너져 내린 두꺼운 돌기둥에 깔려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가 죽을 때 챙긴 서류는 다음 선고를 내릴 피고인의 문서였고, 그 선고 역시 사형 선고였다. 프라이슬러의 죽음 덕분에 그 피고인의 사형 선고는 내려지지 못했다.
마지막 전단지
나치는 백장미단이 제작한 전단지와 뿌려진 전단지를 즉시 거두어 불태웠다. 그러나 단 한장이 나치의 눈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 중립국인 스웨덴을 거쳐, 마침내 노르웨이를 통해 연합군 측인 영국 런던에 기적적으로 도착했다.
수개월 후인 1943년 가을, 영국 왕립공군(RAF)의 폭격기들은 수백만 장으로 복사된 낯선 종이 뭉치를 쏟아냈다. 독일 상공에서 눈보라처럼 흩날린 그 종이의 맨 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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