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두운 시대
여왕의 지배를 받는 나라에서 여성은 남성의 절대적인 지배를 받았다. 참정권도 없었다. 대학 학위도 여성에겐 금지됐다. 급여도 남성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나마 직업도 많지 않았다. 가난한 여성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을 팔아야 했다.
그녀는 19세기의 어두운 면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녀는 힘없는 사람의 유일한 무기, 단식투쟁을 시도한 최초의 행동주의자였다.
🏇 1913년 6월 4일, 더비
1913년 6월 4일 오늘, 여성 참정론자 에밀리 데이비슨(Emily Davison)은 세계 최고의 경마 대회 '더비 스테이크스' 경기 관람장에서 난간을 넘어 트랙으로 뛰어들었다. 힘차게 달리는 말들 중 한 말을 향해 곧장 뛰어갔다. 그리곤 조지 5세 소유의 말과 충돌했다. 그녀의 손엔 여성 참정권을 얻기 위한 깃발이 들려 있었다.
사람들은 국왕 말의 건강을 걱정했다. 그녀는 나흘 후에 죽었다.
🐎 남겨진 기수
조지 5세의 말은 앤머(Anmer), 거기에 타고 있던 기수는 허버트 존스였다. 존스는 갈비뼈가 부러지고 타박상을 입었지만 회복은 빨랐다. 더비 2주 만에 다시 왕의 말에 올라 경주에 나섰다. 조지 5세는 일기에 "가엾은 허버트 존스와 앤머가 나가떨어졌다"며 그날을 가장 실망스러운 날이라 적었다. 알렉산드라 왕대비는 "잔혹한 미친 여자"가 일으킨 사고라며 존스를 위로하는 전보를 보냈다. 한 여자의 죽음 앞에서 왕실이 걱정한 것은 말과 기수였다.
훗날 존스가 평생 "그 여자의 얼굴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러나 그 서사는 후대에 반박됐다. 그의 가족도, 한 연구자도 그것을 헛소리라 잘랐다.
⚰️ 장례가 된 행진
그녀의 장례식은 추모를 넘어 거대한 시위가 됐다.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이 직접 행렬을 꾸렸고, 런던 도심엔 수천 명이 늘어섰다. 유해는 고향 노섬벌랜드로 옮겨져 모페스에 묻혔다. 어머니가 새긴 묘비명은 이러했다. "노섬브리아의 단식투쟁가여, 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 그 아래엔 운동의 표어가 함께 새겨졌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Deeds not words).
대중의 반응은 한쪽으로 흐르지 않았다. 충돌 장면은 필름에 담겨 곧 악명 높은 사건이 됐고, 누군가는 그녀를 순교자로, 누군가는 미친 여자로 불렀다. 병상의 그녀에게 증오 편지가 날아들었다. 한 사람을 향한 그 분열이 곧 시대의 얼굴이었다.
🌅 끝내 온 것
데이비슨이 죽고 5년 뒤인 1918년, 영국은 30세 이상 일정 자격을 갖춘 여성에게 처음으로 투표권을 줬다. 1928년엔 21세 이상 모든 여성으로 그 권리가 넓어졌다. 남자와 같은 선에 서기까지, 트랙 위에서 깃발을 들었던 한 여자의 죽음이 있었다.
출처 : 유럽사 산책 헤이르트 마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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