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배의 그늘 아래
1870년,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패배했다. 굴욕이 깊을수록 의심도 깊어졌다. 군부는 독일 간첩에 극도로 민감해졌고, 반유대주의 정서는 사회 전반에 독처럼 스몄다. 그 독이 한 사람을 향해 응집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한 장의 메모
1894년 가을, 독일 대사관 쓰레기통에서 문서 한 장이 나왔다. 프랑스 군사 기밀을 독일에 팔겠다는 내용의 명세서(bordereau)였다. 방첩부는 필적이 비슷하다는 이유만으로 유대계 포병 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를 용의자로 지목했다.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이미 그를 유죄로 만들었다.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이 선고됐다. 1895년 1월, 파리 사관학교 연병장. 드레퓌스의 계급장이 뜯겼고, 군도가 부러졌다. 군중은 환호했다. 그는 남아메리카 기아나 앞바다의 악마 섬으로 끌려갔다. 외부와의 연락은 완전히 차단됐다.
🔍 진범의 얼굴
1896년, 방첩부 새 책임자 조르주 피카르 중령이 독일 대사관 쓰레기통에서 또 다른 문서를 발견했다. 필적은 드레퓌스의 것이 아니었다. 페르디낭 에스테라지 소령의 것이었다. 진범은 처음부터 따로 있었다.
피카르는 진실을 보고했다. 군 수뇌부는 이미 내린 판결을 뒤집기 싫었다. 그를 튀니지 오지로 전출시키고 진실을 덮었다.
1898년 1월, 드레퓌스 가족이 에스테라지를 고발했다. 군사법원은 단 15분 만에 에스테라지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나는 고발한다
분노는 한 작가를 움직였다. 에밀 졸라. 이미 유럽 전역에 수백만 권의 책을 판 대문호였다.
1898년 1월 13일, 그는 신문 《로로르》 1면에 공개 편지를 썼다.
"J'accuse…!" — 나는 고발한다.(1월 13일의 역사 참조)
4,000단어짜리 이 편지는 군부, 법원, 정부를 전부 실명으로 고발했다. 신문은 하루 만에 30만 부가 팔렸다. 졸라는 명예훼손죄로 기소됐고 유죄를 선고받았다. 1898년 7월, 영국 런던으로 망명을 떠났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도 박탈됐다.
그러나 그의 글은 이미 세상에 나왔다.
💣 자백과 자살
같은 해 8월, 증거를 위조한 앙리 중령이 발각됐다. 체포 다음날, 그는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진상은 이제 부인하기 어려워졌다.
재심 반대파의 기세가 꺾였다.
⚖️ 무효 선언, 그러나 또 다른 유죄
1899년 6월 3일, 고등법원이 1894년의 재판을 무효로 선언했다. 명세서는 에스테라지가 썼다. 원심은 틀렸다.
그러나 완전한 해방은 아니었다. 드레퓌스는 브르타뉴의 소도시 렌에서 다시 군사재판을 받았다. 5년간 세상과 단절된 채 악마 섬에 갇혀 있던 그는 그제야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됐다. 그러나 참모본부의 상관들은 법정에서 또다시 위증으로 일관했다. 재판관 7명 중 단 2명만이 무죄를 인정했다. 법원은 정상을 참작해 10년형을 선고했다. 진실이 이겼다고 믿었던 세계가 다시 들끓었다.
✉️ 무덤에서 나온 남자
그 판결이 내려지던 바로 그 무렵, 졸라는 망명지 런던을 떠나 파리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로로르》에 「Justice(정의)」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하며 이렇게 썼다.
"내 도움으로 무덤에서 나올 수 있었던 남자의 귀환에 대한 생각. 드레퓌스의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은 나를 기쁨의 황홀경으로 몰아넣는다. 이 순간은 내 모든 고통을 보상하기에 충분하다."
11개월의 망명, 살해 위협, 훈장 박탈, 집 경매. 그 모든 고통이 그 한 문장에 담겼다.
그러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1899년 9월, 대통령은 드레퓌스를 특별 사면으로 석방했다. 무죄가 아닌 사면이었다. 드레퓌스는 받아들였다. 더 싸울 힘이 없었다.
🕯️ 끝내 보지 못한 결말
1902년 9월 29일 새벽, 에밀 졸라는 파리 자택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난로 연통이 막혀 있었다. 사고인지 타살인지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끝까지 그를 증오했던 보수 세력의 음모였다는 설이 남아 있지만, 진상은 미궁으로 남았다.
졸라는 드레퓌스의 완전한 무죄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4년 후인 1906년 7월 12일, 최고재판소가 드레퓌스의 모든 유죄 판결을 오판으로 파기했다. 드레퓌스는 소령으로 군에 복귀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억울한 누명을 벗기까지 꼬박 12년이 걸렸다.
졸라의 유해는 훗날 파리 팡테온으로 이장됐다. '프랑스의 양심'이라는 이름과 함께.
🌍 역사적 의미
드레퓌스 사건은 한 사람의 억울함을 넘어섰다. 프랑스를 드레퓌스파(공화주의·지식인·좌파) 와 반드레퓌스파(군부·교회·민족주의) 로 갈랐고, 지식인이 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이 사건을 취재하던 헝가리계 유대인 기자 테오도르 헤르츨은 유럽에서 유대인이 안전하게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훗날 시오니즘 운동을 창시했다. 한 사람의 누명이 20세기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은 것이다.
졸라가 썼다.
"진실은 전진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참조 : 진보와 저항의 역사, 김삼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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