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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3월 23일 월요일

🌑 3월 24일, 더러운 전쟁에서의 백합 ⚜️

 아르헨티나 현대사에서 가장 어두운 그림자로 남은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은 1970년대 아르헨티나를 뒤흔든 국가적 비극이었다. 

1976년 3월 24일 오늘에 일어난 군사 쿠데타였다.

쿠데타의 시작 (1976년 3월 24일)

당시 아르헨티나는 극심한 경제난과 좌우익 간의 정치적 폭력으로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이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Jorge Rafael Videla) 장군이 이끄는 군부가 이사벨 페론 대통령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군부는 이를 '국가 재편성 과정(Proceso de Reorganización Nacional)'이라 명명하며 질서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더러운 전쟁'의 전개

명분은 질서였으나, 실상은 반대파를 뿌리 뽑기 위한 무자비한 국가 테러였다.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뿐만 아니라 노조원, 학생, 기자, 심지어는 그들에게 동조한다고 의심받는 평범한 시민들까지 포함됐다.

이 시기의 가장 끔찍한 특징은 '실종'이었다. 군경은 사람들을 납치해 비밀 수용소에 가두고 고문했으며, 살해 후 시신을 유기했다. 

또한 산 채로 약물을 투여해 비행기에서 바다나 강으로 던져버리는 잔혹한 처형 방식도 동원됐다.

수용소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군인 가정에 강제로 입양시켰다. 산모들은 처형됐다.

평범한 어머니의 절규

그 때 평범한 어머니였던 아수세나의 아들 Nestor와 그의 여자친구 Raquel이 군부에 의해 납치됐다. 아수세나는 아들을 찾기 위해 군부대, 경찰서, 성당을 전전했지만, 어디에서도 답을 들을 수 없었다.

"우리 각자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면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요. 하지만 우리가 함께 모인다면 독재자들도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그녀는 다른 실종자 가족들을 설득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카사 로사다(대통령 궁) 앞 오월 광장에 처음으로 13명의 어머니와 함께 섰다.

저항의 상징이 된 '흰 스카프'

당시 아르헨티나는 3인 이상의 집회가 엄격히 금지된 계엄 상태였다. 경찰이 "해산하라, 멈춰 서 있지 마라"고 위협하자, 아수세나와 어머니들은 기발한 지혜를 냈다.

멈춰 서지 말라고 하니, 서로 팔짱을 끼고 광장의 탑을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걷기 시작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목요일의 행진'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서로를 식별하기 위해 아기들이 쓰던 천 기저귀를 머리에 썼는데, 이것이 오월 광장의 어머니들을 상징하는 세계적인 아이콘 '흰 스카프(Pañuelo Blanco)'가 됐다.

그녀의 실종과 비극 (1977년 12월)

오월 광장의 어머니들이 세력을 키워가자 군부는 첩자를 투입하기로 했다. 젊고 잘생긴 해군 대위였던 알프레도 아스띠스가 낙점됐다.

그는 자신을 '구스타보 니뇨(Gustavo Niño)'라고 소개하며, 실종된 형제를 찾는 가련한 청년으로 위장해 어머니들의 모임에 나타났다.

아수세나를 비롯한 어머니들은 이 젊은 청년을 친아들처럼 아꼈다. 그가 모임에 나올 때마다 어머니들은 그를 안아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었으며, 심지어 아수세나는 그를 매우 신뢰하여 단체의 핵심 명단과 연락처를 공유하기도 했다.

'유다의 입맞춤' (1977년 12월 8일~10일)

아스띠스는 거사를 치르기 전, 누가 핵심 인물인지 군부 요원들에게 알리기 위해 잔인한 방법을 썼다.

산타 크루스(Santa Cruz) 성당에서 어머니들이 모였을 때, 아스띠스는 체포조가 지켜보는 가운데 특정 어머니들에게 다가가 볼에 입을 맞추거나 포옹을 했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표식(Targeting)이었다.

그 신호에 따라 아수세나를 포함한 12명의 인권 운동가들이 납치됐다. 아수세나는 12월 10일, 신문에 실종자 명단을 올리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괴한들에게 끌려갔다.

죽음의 수용소 ESMA와 '죽음의 비행'

아수세나는 악명 높은 해군기계학교(ESMA) 수용소로 끌려갔다.

그녀는 그곳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동료들의 행방을 발설하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1977년 12월 말경, 군부는 그녀와 동료들에게 "다른 교도소로 이감한다"고 속인 뒤 강제로 약물을 투여해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비행기에 태워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산 채로 던져버렸다. 그녀는 '더러운 전쟁'의 가장 끔찍한 처형 방식인 '죽음의 비행(Vuelos de la muerte)'에 의해 희생됐다.

끈질긴 추적과 단죄

배신자 아스띠스는 민주화 이후 전 세계적인 공분을 샀다. 그는 잘생긴 외모 뒤에 숨겨진 잔혹함 때문에 '죽음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수세나와 함께 납치된 사람들 중에는 프랑스 수녀 2명도 포함되어 있었기에, 프랑스 정부는 아스띠스에 대해 국제 체포령을 내리고 강력히 압박했다.

아스띠스는 수십 년간 군부 특사령 등으로 처벌을 피해 다녔으나, 2000년대 들어 아르헨티나 정부가 과거사 청산에 박차를 가하면서 결국 법정에 섰다.

2011년, 그는 아수세나 비야플로르를 포함한 수많은 실종 사건에 대한 책임으로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법정에서도 그는 반성하기는커녕 당당한 태도를 보여 유가족들의 가슴을 다시 한번 후벼 팠다.


역사의 역설

아수세나를 죽이면 운동이 멈출 줄 알았던 군부의 계산은 완전히 틀렸다. 그녀의 실종 이후, 어머니들은 더욱 단단해졌고 전 세계 언론은 이 '사라진 어머니들'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아수세나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그녀가 광장에 남긴 원형 행진은 50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도 매주 목요일 오후 3시 30분, 오월 광장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그녀의 이름, 아수세나(Azucena)는 스페인어로 '백합'을 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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