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프랑스의 왕이었던 남편을 잃고 다시 고국 스코틀랜드의 해변에 발을 디뎠다. 19세의 아름다운 미망인의 입에선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프랑스여, 안녕." 이 작별 인사는 훗날 그녀의 운명에 대한 예언이 되었다.
그녀는 태어난 지 6일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왕가 혈통이라는 이유로 분쟁의 중심에 섰다. 종교적, 정치적 혼란을 피해 프랑스로 보내진 그녀는, 그곳에서 뭇 남성들을 굴복시킬 만큼 유혹적이고 위험한 매력을 지닌 여인으로 성장했다.
당시는 정치와 종교가 뒤엉킨 혼란의 시기였다. 신교도(프로테스탄트)인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 Elizabeth의 치하에서, 억압받던 가톨릭교도들에게 그녀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메리 또한 고향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교황청의 외교 사절들은 이 여성이 절대 권력을 주장하며 엘리자베스의 강력한 대척점이 될 것이라 경고했다. 엘리자베스 역시 9살 어린 이 5촌 조카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적수가 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녀의 삶에는 수많은 사랑이 있었고, 그곳에는 피를 부르는 살인과 암살이 뒤따랐다. 젊고 아름다운 기사와의 결혼(단리 경), 그 남편에 의해 눈앞에서 처참히 살해당한 비서(음악가 리치오), 그리고 남편을 암살한 혐의를 받는 또 다른 정부(보스웰 백작)와의 재혼까지. 심지어 그녀는 남편을 죽인 의혹을 받는 정부를 군 통수권자에 해당하는 대원수직에 임명했다. 국민들은 경악했고, 더 이상 여왕을 존경하지 않았다. 수치심마저 잊은 듯한 행보에 결국 반란이 일어났다. 정부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그녀는 신하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정부의 아이(쌍둥이)를 사산한 그녀는, 탈출을 감행하여 잉글랜드에 있는 친척, 엘리자베스에게 몸을 피탁했다.
(중략: 실러의 희곡 묘사) 두 여왕은 '앞쪽에는 나무가 우거지고 뒤로는 넓은 풍경이 펼쳐진 포서링헤이 성의 공원(The Park at Fotheringhay Castle)'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녀는 오만한 엘리자베스에게 겸손히 다가갔으나, 엘리자베스는 그녀의 아름다움과 꺾이지 않는 기품에 질투와 분노를 느꼈다.
"그래, 그대는 이제 끝이다.
그대는 이제 더 이상 아무도 유혹할 수 없다.
너의 값싼 명예는 천한 아름다움에 불과할 뿐이야."
이러한 증오에 대응하는 메리의 혀는 더욱 날카롭고 치명적이었다. 그녀는 엘리자베스의 가장 아픈 치부인 출생의 비밀을 찔렀다. 헨리 8세가 앤 불린과 결혼하여 낳았으나, 간통죄로 처형당한 어머니를 둔 엘리자베스는 가톨릭 세계에서 사생아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대 모친은 정숙함을 물려주지는 못했지.
잉글랜드의 왕위는 사생아에 의해 더럽혀졌다!
그대야말로 내 발아래 엎드려야 해.
내가 바로 그대의 국왕이니까!"
충격과 분노로 말을 잃은 엘리자베스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그리고 곧장 그녀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하고 커다란 국새(Great Seal)를 날인했다.
1587년 2월 8일 오늘, '스코틀랜드인의 여왕(Queen of Scots)'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가 포서링헤이 성에서 처형되었다. 역사적으로 이 세기의 라이벌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많은 창작자는 작품 속에서 두 여왕의 만남을 주선했고, 그 장면을 비극의 클라이맥스로 장식했다. 독일의 대문호 프리드리히 실러는 1800년 발표한 희곡 '마리아 슈투아르트Maria Stuart'에서 이 대립을 가장 극적으로 묘사했다.
실제로 두 여성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서 스치기라도 했다면, 분명 저런 대화가 오갔을 것이라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출처 : 대결로 보는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 루돌프 K. 골트슈미트 옌트너 저, 달과 소 출판 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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