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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2월 22일 일요일

2월 23일, 이오지마 전투의 성조기 :아버지의 깃발, 그리고 어머니의 직감: 이오지마 성조기 아래 지워진 이름 '할론 블록'

     🌋 1945년 초,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무렵, 이오지마는 미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전략적으로 포기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일본 고유의 영토였던 이 작은 화산섬에는 본토로 향하는 연합군 폭격기를 조기에 탐지하고 요격하기 위한 조기경보 레이더 기지와 전투 비행대대가 배치되어 있었다. 연합군의 목표는 명확했다. 이 섬의 일본군 전력을 무력화하고, 일본 본토 폭격을 주도할 B-29 폭격기의 비상 착륙장 및 이를 호위할 P-51 머스탱 전투기의 발진 기지로 삼는 것이었다.

이 중대한 전투를 앞두고 양측은 최강의 전력을 배치했다. 일본군은 미국 하버드대 유학 경험을 통해 미국의 잠재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엘리트 지휘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을 최고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구리바야시는 해변에서의 요격을 포기하는 대신 섬 전체를 요새화하여 지하 벙커 중심의 극단적인 지연전을 준비했다. 이에 맞서는 미군은 해병대의 명장 홀랜드 스미스 중장의 총괄 지휘 아래, 역전의 부대인 제3, 제4 해병사단과 신규 편성된 제5 해병사단까지 동원하여 총공세에 나섰다.

1945년 2월 19일, 미 해병대가 상륙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 중 하나인 이오지마 전투가 시작되었다. 

    1945년 2월 23일 오늘 오전, 미 해병대 제5사단 28연대 소속 정찰대가 섬의 최고봉인 수리바치산 정상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이날 오전 10시 20분경, 산 정상에 첫 번째 성조기가 게양됐다. 사상 처음으로 일본 본토에 성조기가 게양됐고, 이는 앞바다의 미군 함대에서도 보였다. 동행했던 미 해군 장관 포레스탈은 게양된 성조기를 가지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국기를 게양했던 대대장은 이 명령을 거부했다. 그는 먼저 게양된 성조기는 대대 금고함에 보관하고, 대신 더 큰 성조기를 게양했다. 이 큰 성조기는 진주만 공습 때 격침당한 군함에서 건져낸 그 성조기였다.

상부의 지시에 따라 마이클 스트랭크 분대장의 지휘 아래 할론 블록, 프랭클린 수슬리, 이라 헤이즈, 해롤드 슐츠, 해롤드 켈러 등 6명의 해병이 무거운 쇠파이프에 진주만의 깃발을 매달아 다시 세웠다. AP통신의 조 로젠탈이 이 찰나를 촬영한 사진은 곧바로 미국 전역 신문의 1면을 장식하며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사진 속에서 깃발을 밀어 올리던 청년들에게 그 섬은 빠져나올 수 없는 무덤이었다. 사진 속 6명 중 3명은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이오지마의 검은 모래 위에 쓰러졌다.

분대원들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챙기며 '늙은이'라 불리던 25세의 마이클 스트랭크 분대장은 3월 1일, 해변 모래사장에 다음 작전을 위한 지도를 그리던 중 아군 함정의 포격 오발로 허망하게 전사했다.

스트랭크가 전사하고 불과 몇 시간 뒤, 사진 맨 밑에서 폴대를 굳게 땅에 박고 있던 텍사스 출신의 고교 풋볼 스타 할론 블록 역시 일본군의 박격포탄에 맞았다. "이놈들이 나를 죽였어."라는 짧은 유언을 남긴 채 그는 눈을 감았다.

깃발 게양 직후 고향의 어머니에게 "곧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가 해주신 음식을 먹고 싶어요"라고 편지를 썼던 열아홉 소년 프랭클린 수슬리마저, 전투가 거의 끝나가던 3월 21일 저격수의 총탄에 숨을 거뒀다.

전사자들의 피로 얼룩진 전투가 끝나갈 무렵, 미국 본토는 한 장의 사진이 만들어낸 국가적 열광에 빠져 있었다. 해병대는 전쟁 채권 판매를 위해 사진 속 인물들의 신원을 서둘러 발표했고, 깃발 하단을 꽂고 있던 인물을 낙하산 부대 출신의 전사자 '행크 핸슨'으로 명명했다.

그러나 텍사스주 웨슬라코에 살던 할론 블록의 어머니, 벨 블록은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보자마자 직감했다. 아들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철모와 뒷모습뿐이었지만, 그녀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저건 내 아들 할론이야. 내가 쟤 기저귀를 수천 번도 더 갈아줬어. 내 아들의 엉덩이와 뒷모습을 내가 모를 리 없단말이야."

어머니의 외로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벨 블록은 정부와 군 당국에 사진 속 인물은 핸슨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 할론이라고 수없이 편지를 쓰고 호소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군 당국은 이미 전국적으로 확정된 '영웅 명단'을 번복할 이유가 없었고, 세상 사람들과 이웃들은 그녀의 주장을 그저 전사한 아들을 잊지 못하는 슬픈 어머니의 헛된 환상이나 착각으로 치부하며 동정할 뿐이었다.

한편, 그 무렵 진실을 알고 있는 단 한 사람이 있었다. 깃발 게양의 생존자이자 할론의 전우였던 피마 인디언 출신의 이라 헤이즈였다. 헤이즈는 상부에 사진 속 인물이 핸슨이 아니라 할론 블록임을 즉각 보고했다. 하지만 전쟁 자금 조달을 위해 완벽하게 포장된 영웅 명단이 필요했던 군 당국은 그에게 "명단은 이미 확정되었으니 입을 다물라"고 명령했다. 전우들을 잃은 죄책감에 더해 진실마저 침묵해야 하는 고통 속에서 헤이즈는 매일 밤 술에 의지하며 서서히 망가져 갔다.

전쟁이 끝나고 이듬해인 1946년, 알코올 중독과 심각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던 헤이즈는 마침내 중대한 결심을 했다. 그는 단지 이름 없이 잊힌 죽은 전우의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자신이 살던 애리조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텍사스의 블록 가족 농장까지 무려 1,300마일(약 2,100km)을 히치하이킹과 도보로 이동했다.

마침내 블록 가족의 집 문을 두드린 헤이즈는,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고립되어 있던 어머니 벨 블록과 마주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진실을 털어놓았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진 속 그 자리에 있던 건 헨리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 할론이었습니다."

이라 헤이즈의 결정적인 증언과 어머니의 끈질긴 요구가 결합되자, 미 해병대는 결국 무시하던 사안에 대해 재조사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1947년, 군 당국은 사진 속 하단의 인물이 행크 핸슨이 아닌 할론 블록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역사적 기록을 정정했다.

1947년, 미 해병대가 사진 속 인물을 '행크 핸슨'에서 '할론 블록'으로 공식 정정하면서 어머니 벨 블록의 길고 외로웠던 싸움은 마침내 끝이 났다. 국가가 쓰다 버리려 했던 거대한 수레바퀴 앞에서, 아들의 기저귀를 갈아주던 어머니의 기억이 승리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승리가 죽은 아들을 살려낼 수는 없었다. 사진 속 주인공이라는 명예가 주어졌어도, 벨 블록에게 남은 현실은 이오지마의 검은 화산재 아래 묻힌 스무 살 아들의 싸늘한 죽음뿐이었다.

    🪖 그로부터 2년 뒤인 1949년, 이오지마 제5해병사단 묘지에 임시 매장되어 있던 할론 블록의 유해가 마침내 텍사스주 웨슬라코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기차역으로 아들의 관이 들어오던 날, 벨 블록은 차가운 나무관을 부여잡고 오랫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냈다. 영웅을 위한 거창한 환영 행사는 없었지만, 가족들만의 조용한 장례식을 통해 어머니는 비로소 아들을 고향 땅에 온전히 묻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들의 이름이 역사에 올바르게 새겨진 이후, 어떤 보상이나 유명세도 쫓지 않았다. 남은 가족과 함께 평범하고 조용히 살아 갔다. 

아들의 명예를 되찾아주기 위해 1,300마일을 걸어왔던 이라 헤이즈가 1955년 차가운 길바닥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벨 블록은 누구보다 깊이 슬퍼하며 아들의 전우를 애도했다.

    🪦 그녀는 1980년, 84세의 나이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고 15년이 지난 1995년, 웨슬라코에 잠들어 있던 할론 블록의 유해는 이오지마 전투 50주년을 맞아 텍사스 하를린젠에 위치한 해병대 군사 학교(Marine Military Academy)의 이오지마 기념비 곁으로 이장됐다.

참고 서적 : 전쟁영화로 마스터하는 2차세계대전, 이동훈 저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저


원본 사진: Joe Rosenthal / AP 통신 (AI 컬러 복원 및 인물 식별 편집)
이 전투에서 해병 대원 6,821명이 전사했으며, 1만 9,000여명이 중상을 입었다. 일본 구리바야시의 병력 2만 1,000명은 모두 사망했다. 사령관 구리바야시도 사망했으며 일본군 병사들이 굴 깊숙한 곳에 그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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