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긴박했다. 그 당시 아프간의 1인당 국민소득은 70달러에 불과했다. 미국은 아프간을 염두에 두지도 염두에 둘 생각도 없었다. 1978년 친소 성향의 공산 반군이 정권을 장악했다. 새로운 정권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이 이어졌다. 반정부 봉기가 일어났고, 내전은 치열했다.
아프간 친소 지도부는 소련에게 무장 봉기 진압을 위한 지원을 강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이 반정부 세력을 지원하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개입을 주저했다.
당시 어렵게 시작된 화해 분위기 데탕트와 무기 협정 조인, 미 대통령 카터와의 회동, 서유럽 국가들 특히 서독과의 관계 파탄을 우려했다. 소련 지도부와 군관련 참모들은 아프칸 개입을 반대했다.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전쟁이 나더라도 서너 달이면 끝날 것이란 입장이었다. 모든 반대에도 불구하고,
1979년 크리스마스 이브, 소련 공수 부대가 카불 공항에 투하됐다. 5천명이었다. 2개 사단이 국경을 넘었다. 이듬해에 5만명의 병력이 그 이듬해에 12만명으로 늘었다.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1인당 국민 소득 70달러의 나라를 침공한 것이다.
이에 이슬람 세력은 더 큰 봉기로 맞섰다. 수도 카불에서 미국 대사 아돌프 덥스가 무장 세력에 의해 납치되어 총격전끝에 사망했다. 미국은 아프칸 문제에 개입했다. 미국은 '성스런 이슬람 전사'라는 뜻의 '무자헤딘 Mujahideen'에 대한 훈련과 외부 자금을 지원했다. 지원액은 총 30억달러가 넘었다. 미국의 무기로 무장한 반군은 기복이 심한 산악을 이용한 게릴라 전술로 소련을 괴롭혔다. 소련은 아프칸이라는 늪에 빠졌다.
소련은 전사자만 1만 5천명, 부상자 5만여명과 40여만명이 질병에 감염됐다. 천문학적 전비(50억 - 80억 루블)가 소모됐고 유가 폭락으로 소련 국가 재정이 휘청거렸다.
아프칸 민간의 참혹한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00만명 이상의 민간인 사망과 인구의 1/3인 300만명의 난민이 고통 받았다.
미국은 되도록 오랫동안 소련을 아프칸에 묶어 두기 위해 애를 썼다. 사우디와 파키스탄과 공조했고 유엔의 소련과 아프칸 반군간의 협상 중재의 시도가 실패하도록 최선을 다했다. 동시에 거금의 자금과 무기를 반군에 제공했다. 제공된 무기중 다수는 후일 미국과의 싸움에 사용됐다.
1989년 2월 15일 오늘, 9년 2개월 동안의 끔찍한 전쟁의 피해만을 남기고, 소련군이 철수했다. 그들은 '우정의 다리'를 걸어서 건넜다. 뒤 돌아 보지 않았다.
남겨진 아프간 국민들의 참혹한 피해에 소련도 미국도 '기본적으로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CIA의 무기는 여전히 계속 유입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32년 6개월 15일 후 미국군이 아프칸에서 철수했다. 그들은 야간에 철수하면서 뒤 돌아 보지 않았다.
출처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올리버 스톤, 피터 커즈닉 저
지도로 보는 세계정세, 파스칼 보니파스 저
잿더미의 유산, 팀 와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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