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콜럼버스의 귀환이 불씨를 당기다
1492년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에서 돌아오자 유럽의 두 해양 강국이 충돌했다. 카스티야 왕실을 등에 업고 떠난 항해였지만, 포르투갈은 그 섬들이 자국의 기존 조약 범위 안에 있다고 주장했다. 1493년 3월 리스본에 기항한 콜럼버스를 포르투갈 국왕 주앙 2세가 직접 궁정으로 불러 이야기를 들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 교황이 선을 긋다
스페인 왕실은 로마로 달려갔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1493년 5월 교황 칙서 〈인터 카에테라〉를 발포해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 100레과 지점에 남북으로 선 하나를 그었다. 선 서쪽은 스페인, 동쪽은 포르투갈 몫이었다. 교황의 결정이 중립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은 공공연했다. 알렉산데르는 발렌시아 출신 스페인인이었고, 페르난도 왕의 군대는 프랑스의 침공에서 교황령을 보호하고 있었다.
🤝 두 왕국이 직접 마주 앉다
포르투갈은 교황의 결정을 거부했다. 주앙 2세는 그 선이 너무 동쪽에 치우쳐 있어 포르투갈이 목표로 삼던 인도 항로마저 위협받는다고 판단했다. 전쟁 대신 협상을 택한 양국은 스페인 소도시 토르데시야스에서 직접 교섭에 나섰다. 1494년 6월 7일, 양국 외교관들이 서명한 문서가 토르데시야스 조약이다.
📏 370레과, 상상의 선
포르투갈 외교관들은 경계선을 카보베르데 제도 서쪽 370레과 지점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레과(league)는 중세부터 근대 초까지 유럽에서 통용된 거리 단위로, 사람이 한 시간에 걸을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았다. 포르투갈 레과는 약 5.9km였으니, 370레과는 대략 2,200km에 해당한다. 스페인은 선 이동을 수용하는 대신 콜럼버스가 발견한 섬들에 대한 포르투갈의 승인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선은 어디까지나 상상의 선이었다. 당시 항해자들은 경도를 측정할 기술이 없었다. 대서양 한복판 서경 약 46도 30분을 지나는 이 선을 실제로 항해 중에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 브라질이 태어나다
조약이 낳은 가장 뜻밖의 결과는 브라질이었다. 선을 370레과로 이동시킨 덕분에 남아메리카 동쪽 끝 돌출부가 포르투갈 구역 안으로 들어갔다. 1500년 포르투갈 탐험가 페드루 알바레스 카브랄이 그 해안에 닿았을 때, 그 땅은 조약상 이미 포르투갈의 몫이었다.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에서 브라질만이 유일하게 포르투갈어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지구 반대편은 나중에
조약은 처음부터 결함을 안고 있었다. 경계선이 지구 반대편에서 어떻게 이어지는지 명시하지 않았다. 1519년 마젤란의 세계 일주 이후 태평양 쪽 경계 분쟁이 본격화됐고, 결국 1529년 사라고사 조약을 통해 반대편 경계선을 따로 획정해야 했다.
👑 "아담의 유언장을 보여달라"
유럽의 다른 나라들은 처음부터 이 조약을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태양은 나에게도 똑같이 빛난다. 아담의 유언장에서 나를 세계의 몫에서 배제한 조항을 보여달라"고 비꼬았다. 영국과 네덜란드 역시 조약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탐험에 나섰다. 1534년 프랑스 탐험가 자크 카르티에가 캐나다에 도달한 것도 그 흐름 위에 있었다.
세계 지도도 없이, 경도 측정 기술도 없이, 두 나라는 지구 전체를 나눴다. 그 선의 동쪽과 서쪽에서 수천만 명이 살고 있었지만, 조약문 어디에도 그들의 이름은 없었다.
출처
- UNESCO Memory of the World, The Treaty of Tordesillas of 7 June 1494
- Encyclopædia Britannica, "Treaty of Tordesillas"
- World History Encyclopedia, "Treaty of Tordesillas"
- EBSCO Research Starters, "Treaty of Tordesillas"
- EHNE Digital Encyclopedia of European History, "The Treaty of Tordesillas, June 7, 1494"
- Wikipedia, "Treaty of Tordesil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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