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봉기와 코뮌의 시발
1830년생인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은 본래 가난한 아이들을 가르치는 파리의 교사였다.
또한 그녀는 보불 전쟁기 파리 포위전 당시, 시민들의 성금으로 제작된 400문의 대포를 관리하는 몽마르트르 감시위원회(Vigilance Committee) 위원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전면에 등장했다.
1871년 3월 18일 오늘 새벽, 아돌프 티에르의 임시 정부군이 이 대포 탈취를 위해 몽마르트르 언덕에 진입했다.
미셸은 즉시 종을 울려 시민들을 불러모았고, 순식간에 거대한 군중이 언덕을 에워쌌다.상황이 험악해지자 정부군 지휘관이었던 클로드 르콩트(Claude Lecomte) 장군은 시민들을 향해 세 차례나 "사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군인들은 굶주림과 고통을 함께 겪은 동포들에게 총을 쏘는 대신, 오히려 총구를 거꾸로 돌려 지휘관을 체포하고 시민들과 합류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르콩트 장군과 또 다른 장군 한 명이 현장에서 처형되었고, 당황한 티에르 정부는 베르사유로 도망쳤다. 드디어 파리 시내가 시민들의 손에 넘어가 파리 코뮌이 시작이 됐다.
2. 코뮌의 수립과 미셸의 다각적 활동
3월 26일 실시된 선거를 통해 3월 28일 자치 정부인 '파리 코뮌'이 공식 선포됐다. 미셸은 이 시기 행정, 교육, 군사라는 세 가지 영역에서 활동을 지속했다.
이 시기 미셸은 굽히지 않는 혁명 정신과 헌신적인 투쟁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붉은 처녀(La Vierge Rouge)'라는 별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미셸은 18구 감시위원회를 통해 종교 교육을 배제한 무상 의무 교육안을 수립했다. 또한 '여성 동맹'을 조직하여 여성의 노동권 확보와 성평등을 기초로 한 사회 구조 개편을 요구했다.
그녀는 국민방위군 제61대대에 소속되어 남성과 동일한 무장을 하고 전선에 투입됐다. 4월부터 시작된 베르사유 정부군의 공격에 맞서 이시(Issy) 요새와 뇌이(Neuilly) 방어전 등 주요 전투에서 보병 및 간호 인력으로 복무했다.
3. '피의 일주일'과 저항의 종결
5월 21일, 정부군이 파리 서쪽 성벽을 뚫고 시내로 진입하면서 '피의 일주일'이라 불리는 시가전이 전개됐다. 루이즈 미셸은 몽마르트르 언덕의 마지막 바리케이드에서 정부군과 교전했다.
'피의 일주일' 기간 동안, 사망한 코뮌 측 인원은 적게는 7,000명에서 많게는 3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됐다. 파리 시내는 시신 썩는 냄새가 진동했고, 세느강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전투 중 사망자보다 전투 종료 후 즉결 처형된 인원이 더 많았다.
살아남은 수만 명의 코뮌 가담자들은 투옥되거나 뉴칼레도니아 같은 먼 오지로 유배됐다.
5월 24일, 몽마르트르가 함락된 직후 정부군이 그녀의 어머니를 인질로 잡고 투항을 권고하자 미셸은 자수했다.
5월 28일 그녀가 체포된 직후,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의 최후 교전을 끝으로 파리 코뮌은 군사적으로 완전히 진압됐다.
4. 사법 처분과 유배지에서의 활동
1871년 12월 16일, 군사 재판에서 미셸은 코뮌의 모든 행위에 대한 책임을 자처하며 사형을 요구했다.
그녀는 티에르가 이끄는 승리한 정부를 향해 "당신들이 나를 석방한다면 나는 다시 투쟁할 것이다. 나를 죽여라!"라고 일갈했다.
정부군은 그녀를 사형시키고 싶었으나, 그녀가 민중의 영웅이 될 것을 두려워해 뉴칼레도니아(남태평양의 섬)로 무기한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타협했다.
미셸은 유배지인 뉴칼레도니아에서 원주민 카낙(Kanak)족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들의 문화를 조사했다. 특히 1878년 카낙족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반발해 일으킨 봉기를 지지하며 반제국주의적 입장을 명확히 했다.
5. 귀환과 아나키즘 운동으로의 이행
1880년 대사면령에 따라 파리로 귀환한 미셸은 이전보다 급진적인 아나키즘(무정부주의) 운동가로 변모했다.
그녀는 붉은 깃발 대신 검은 깃발을 혁명의 상징으로 처음 사용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실업자 시위를 주도했고, 이후에도 수차례 투옥과 석방을 반복했다. 미셸은 1905년 마르세유에서 사망할 때까지 국가 권력의 완전한 폐지와 민중에 의한 자치를 주장하는 강연 활동을 지속했다.
6. 사후 평가와 지하철 역사의 명명
1905년 루이즈 미셸이 마르세유에서 사망한 후, 그녀의 장례식에는 약 12만 명의 시민이 운집하여 파리 시내를 행진했다. 프랑스 정부와 파리시는 그녀의 사회적·정치적 활동을 기리기 위해 공공 시설물에 그녀의 이름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파리 지하철(Métro de Paris) 3호선의 '루이즈 미셸(Louise Michel)' 역이다. 파리 서북쪽 외곽 르발루아페레(Levallois-Perret)에 위치한 이 역은 1937년 개통 당시 '발리에(Vallier)'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6년 5월 1일 노동절을 기해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됐다.
이 역사는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교사로 시작해 무장 전사와 유배자로 살았던 루이즈 미셸의 생애가 프랑스 근대사의 공식적인 한 부분으로 기록되었음을 보여주는 물리적 지표로 남게 됐다.
그녀의 이름을 단 '루이즈 미셸'역 위 몽마르트르 정상에는 코뮌이 진압된 후, 보수적인 가톨릭 세력과 정부가 "혁명의 죄를 씻고 코뮌의 혼란을 참회한다"는 의미로 세운 성당 사크레쾨르 대성당(Basilique du Sacré-Cœur)이 반동의 상징으로 솟아 있다.
잘 읽었습니다. 루이즈 미셸 회고록도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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